신을 단두대로 올려보내라(15)
“교종이 로마군의 진격을 막아보겠다고 로마 시민을 제물로 삼아 악마를 불러냈다!”
이것이 로마 제국이 내세운 공식 입장이었다.
반대로 신성 제국에선 ‘그리스인들이 악마의 힘을 빌려 테러를 벌였다’라며 역선전을 실행했지만,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인’이라는 표현이 로마인들의 분노만 자극했을 뿐.
“본국 이탈리아를 잃었다는 이유로 야만인들이 우리의 정통성을 부정하던 멸칭이 아닌가!”
한때는 프랑크인 샤를마뉴가 서로마 황제를 참칭했었고, 그 계승자를 자처한 신성 제국의 황제 역시 건방지게도 ‘로마인의 황제’라 칭했던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런 자들이 콘스탄티누폴리에 사신을 보낼 때 외교문서에 상대를 로마 제국이 아닌 ‘그리스 제국’이라 적곤 했다. 당연히 외교 문제가 되었고 그때마다 서유럽과 로마 제국의 관계는 파탄 났다.
이런 식으로 외교적 갈등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고자 ‘신성 로마 제국’에서 ‘로마’라는 명칭을 빼기로 한 것이 바로 나폴레옹 1세 때의 일이다.
유일한 로마는 콘스탄티누폴리에 도읍을 둔 제국뿐이라는 공식적인 선언을 덧붙인,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로마 제국은 동남쪽에서 포위망을 뚫고 나폴레옹의 숨통을 틔워 줄 유일한 동맹이었으니, 보나파르트라는 새로운 황실의 시조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탓이었지만.
그리고 나폴레옹 1세의 관심사는 합스부르크의 권좌를 빼앗아 프랑스와 게르만 모두의 주인이 되는 것 말고는 없기도 했다.
따라서 신성 제국이 콘스탄티누폴리의 제국의 ‘로마’라고 부르는가, ‘그리스’라고 부르는가는 두 나라의 관계가 얼마나 극적으로 변했는지를 상징했다.
물론 벨리사리우스는 냉소와 함께 그 또한 선전전으로 적극 활용했지만.
***
“단교를 선언하는 마당에 예의를 차릴 것은 없겠지요.”
신성 제국의 대사는 크로아티아의 사령부를 찾아와 벨리사리우스 앞에서 그렇게 선언했다. 똑바로 마주 보며, 허리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이제는 이 사령부의 정식 이름도 크로아티아가 아니다. 로마 황제는 어떤 망상증을 앓고 있는지는 몰라도 ‘달마티아-일리리쿰’이라는 고대의 이름을 이 사령부에 붙였다.
대사는 그런 황제의 망상증을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황제수권법 덕분에 콘스탄티누폴리 외무성이 아니라 이 궁벽한 곳까지 외국 대사가 직접 와야 했습니다.”
이런 불손한 태도에 어떤 모욕이 돌아오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로마인들은 황제부터 하급 장교에 이르기까지 무표정했다. 어차피 떠날 놈에게 쓸 신경과 시간이 아깝다는 듯.
“귀국길은 어떻게 잡으셨는지?”
황제의 답변도 무미건조했다. 딱히 무슨 답을 듣겠다는 게 아니어서 마치 하품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중립국인 마자르를 통해서 귀국할 예정입니다.”
아, 하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대사는 덧붙였다.
“귀국하기 전에 마자르에 먼저 경고할 생각입니다.”
“뭐라고 할 생각이오?”
“혹시라도 합스부르크가 100년 전에 빼앗긴 제위를 되찾으려는 어설픈 수작은 부리지 말라고. 그랬다간 우리 신성 제국의 손이 아니라 그리스 황제의 망상 속에서 마자르는 ‘판노니아 속주’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벨리사리우스의 표정은 이 정도 도발에도 변하지 않았다. 대사는 한참 황제를 노려보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휙 등을 돌려 사령부를 떠났다.
***
벨리사리우스는 로마 황제였지만, 만약 ‘선전전의 황제’라는 게 있다면 그것도 자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신수덕, 그대가 듣기엔 어떨지 몰라도 고려 황제와 그 내각은 이 방면에선 실로 전설적이라고 평할 수 있네.”
신수덕은 양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언젠가는 죽이고 싶은 상대라고 해도…… 아니, 그 정도 능력이 있기에 제가 죽이고 싶을 만한 짓을 할 수 있었던 거겠죠.”
“선전선동, 여론전…… 고려는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활용했네. 몽골의 황위와 다이온의 패권을 노리는 모든 경쟁자를 그렇게 물리쳤어.”
지금 벨리사리우스가 하는 말을 듣는다면 루우는 얼마나 전율할 것인가.
그리고 그 전율은 자신의 거대한 영향력을 목도한 데서 오는 환희일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세계대전의 토대를 마련하고야 말았다는 경악일 것인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도 못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저 극동 제국의 성공 사례를 충실히 좇을 뿐.
“확고하고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만이 최종적인 승리를 만들어주진 않네. 이러한…… 어떤 사람 눈에는 참으로 ‘같잖은 수’까지도 활용해야 상대를 확실히 몰아붙일 수 있지.”
몰아붙인다.
벨리사리우스는 신성 제국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 자체를 없앨 생각이다.
외교력을 총동원해 다른 나라의 도움을 구한다든지.
혹은 다른 어떤 책략으로 로마 제국에 맞선다든지.
그것도 안 되면 총력을 기울여 결연히 이탈리아를 수호하는 것조차,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수단으로서의 파멸인은 참 유용하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신수덕은 벨리사리우스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아직도 이 청년 황제가 선구자인지, 그저 광인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다.
그런 인간에게 대뜸 위험한 기술을 넘겨준 자신도 웃기는 인간이지만.
“지옥을 만드는 데는 품이 많이 드네. 그렇지 않나?”
신수덕 자신도 산동 공방전 때 한족들에게 지옥을 선사해봤기 때문에 잘 안다. 지옥이라는 상상 속 개념을 지상에 구현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지상에 낙원을 만드는 것만큼 들어간다.
독가스와 총알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죽일 사람을 모을 때도 석탄과 석유가 들어간다. 총검도 마모되는 물건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짓을 하는 병사들의 정신이 소모된다.
그런 학살을 벌이다 보면 병사들이 일에 익숙해진다고들 착각하기 쉽지만, 그저 정신이 마모되다 망가질 따름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게 된다는 건, 당장 옆에 선 같은 병사나, 뒤에 선 상관도 사람으로 안 보이게 된다는 뜻이니까.
착란과 발광을 방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인력을 교체한다. 여기에도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이런 걸 싹 무시하고 밥만 준다 해도 역시 다 돈이다.
“하지만 파멸인은 그럴 필요가 없네.”
제국의 발상지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군을 일으켰으면서, 옛 수도를 도륙 내는 이 사람의 정신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무엇을 바랄 것 같나, 신 총독.”
이젠 산동 총독이 아니건만, 황제는 신수덕을 그렇게 불러주었다.
딱히 신수덕의 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던 듯, 황제는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웃었다.
“구원을 바란다네.”
***
교종청이 지난 100년간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사실은, 신성 제국이 교종청이 처한 고난을 외면할 이유로 충분했다.
그러나 신성 제국 역시 고난에 처한 상황에서, 고난의 원인이 같다는 점은 신성 제국의 정치가들로 하여금 방침을 재고케 했다.
“현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바다 건너 에이레야 이 사태에서 동맹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겠죠. 기껏해야 우리가 아즈텍에 그러했듯이 의용군을 보내는 것 정도?”
“교종청도 군사적 동맹으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만, 역시 종교적 단결을 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교종청이 부렸던 수작은 잠시 잊고, 동맹으로서의 유용성에 주목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황제 나폴레옹 5세도 딱히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기에, 엑스라샤펠 황궁의 의견은 교종청과 제휴하는 쪽으로 모이는 듯했다.
문제는…… 도저히 교종청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
추기경이나 주교를 비롯한 교회 조직 전체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이탈리아가 전쟁터가 되어버린 탓인가 싶었기에, 뱃길을 통해 서쪽으로 돌아 로마시에 진입을 시도해보았다.
아직 이탈리아가 완전히 로마군 수중에 넘어간 건 아니었지만, 전선이 지도에서 반듯하게 그려지는 것과 달리 적들은 이탈리아의 산야를 누비며 임무를 수행 중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절단과 그들을 호위하는 병력은 로마에서, 악몽을 보았다.
***
하늘에서 누군가 검은 옷자락을 내린 듯, 장막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그 광경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메스꺼웠는데, 들어와서는 더한 모습에 몸을 떨어야 했다.
위대한 성인, 초대 교종의 이름이 붙은 대성당은 이미 무너졌다.
검붉은 연기…… 아니, 불길인가? 용암처럼 꿈틀대는 저것은 무엇인가.
차라리 흔적도 없이 무너져서 ‘과연 이곳이 그곳이 맞는가?’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면, 소름이 덜 돋았을까?
무너진 폐허 곳곳에서 이 유명한 건물의 흔적들이 보인다. 그 흔적들이 ‘설마’하는 생각을 비웃는다. 이곳은 그들이 익히 아는 바로 그곳이며, 이제 다시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사절단은 조사단이 되어 조심스럽게 대성당으로 접근했다.
사람들은 거의 없다. 동쪽, 강 너머 시가지에는 파멸인이라 불리는 괴물이 출몰했다고 하지만 여기는 그렇지 않다.
마치 이 정도 파괴로 충분했다는 듯.
물론 강 너머 시가지도 지옥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폐허를 살피면 살필수록, 모두의 마음속에 한 가지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교종청은…… 완전히 사라졌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혁세주인지 뭔지의 공격으로, 단 일격에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검붉고 거대한. 그러니까 교종청의 돔 이상으로 굵은 벼락이 내리쳤다고 한다.
그게 정말 가능한 현상인지,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들의 머리 위 하늘에, 새빨간 달을 한껏 지표 가까이 끌어당긴 것 같은 형상의 무언가가 떠 있었으니까.
신의 지상 대리인은 붉은 칼날의 단두대에서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시야에 혁세주를 넣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도시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로 빨려 올라갈 것 같았으니까.
한편으로,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그들을 도시에서 쫓아내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로마 제국, 그 황제 벨리사리우스의 소행이라면 이보다 더 명확한 메시지가 있으랴.
그들은 엑스라샤펠도 이렇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를 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