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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60화 (460/541)

신을 단두대로 올려보내라(13)

에스파냐 외교관은 긴 한숨을 내쉬다가, 그 한숨을 가리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에스파냐가 언제까지나…… 신성 제국을 견제하려는 브리튼의 커다란 계획을 보조하는 존재일 수는 없죠.”

의미심장한 말이다.

상대가 단서를 던져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놓고 말하긴 민망하거나 보안을 유지해야 할 때, 언젠가 그 발언을 누군가 문제 삼아도 발뺌할 수 있도록, 어떤 식으로든 해석될 수 있는 단서 말이다.

종합해보자.

브라질 식민지가 받는 위협.

브리튼, 칼마르와 에스파냐의 의견 차이.

이 에스파냐 외교관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브리튼과 칼마르는 신연방을 절박한 심정으로 지지하는 에스파냐와는 처지가 다르다.

그래서 에스파냐는 아즈텍 신연방에 의용군을 계속 남겨두고 싶어 하지만, 브리튼과 칼마르는 의용군을 철수시킬 눈치다.

식민지를 지켜야 하는 에스파냐와 달리 그들은 새로운 이익을 얻으려고 의용군을 보낸 거니까.

이대로 신연방을 방치하고 떠나면 그간 들어간 비용은 확실히 손해로 남겠지만, 그 이상 손해가 커지진 않는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멕시카든 호데노쇼니든 브라질을 공격하는 순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손해를 떠안게 될 것이다. 에스파냐 해군의 명성도 이제 옛말이 된 지 오래인데, 그 공격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설령 해군 전력에서 앞선다 해도 잉카 공화국이 아즈텍 대륙의 승자를 위해 길을 열어주진 않을까?

어디까지나 에스파냐 측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그렇다는 소리다.

“……멕시카 자주국도 나름 활로를 모색하겠지요? 내전에서 승리한다는 결과가 같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오래 끄느냐,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느냐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니까요.”

견하가 슬며시 들이민 말에 에스파냐 외교관의 눈이 조금 커졌다.

피해망상에 가까울 정도의 추론이긴 했지만, 또 이렇게 놓고 보면 당연한 추측이기도 하다.

에스파냐의 입장을 두고 견하가 ‘고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멕시카 자주국도 ‘신연방을 돕는 유럽 열강을 어찌할 것인가’를 당연히 고민할 터.

어떤 행위든, 그 행위의 상대방 역시 ‘반응하는 존재’다. 능동적으로 해결책을 찾아 나서는 존재다. 이 점을 망각해선 안 된다.

신성 제국과 로마 제국 간 분쟁 소식은 이제 멕시카의 수도가 된 쿠아우테목에도 들어갔을 터.

내전을 빨리 끝낼 수 있는 희망이 보였다면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물론 에스파냐 쪽에선 견하의 추측이 옳은지 그른지, 확인해주지는 않는다.

“확실한 건 이번 이탈리아 분쟁에서 우리는 누구 편도 들 수 없다는 겁니다. 그건 브리튼이나 칼마르도 마찬가지겠죠.”

신성 제국을 지원하며 로마 제국에 맞설 수도 없고, 로마 제국의 움직임에 발맞춰 신성 제국을 포위해 타격을 입힐 수도 없다.

“다만, 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이상의 것’에 대한 탐욕을 드러낼 때, 에스파냐는 비로소 신성 제국의 편에 설 수밖에 없겠죠.”

프랑스 지역은 로마의 옛 갈리아 속주고, 에스파냐라는 나라 이름도 로마 속주 히스파니아에서 나온 것이다. 벨리사리우스 황제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옛 강역을 전부 수복한다’라는 미친 발상을 실행에 옮기려 든다면, 상황은 두 제국의 갈등 수준을 넘어선다.

“‘언제까지도 브리튼의 계획을 보조할 수는 없다.’…… 요컨대 그 정도의 안보 위협이 다가온다면 에스파냐는 신성 제국과 동맹을 맺을 정도로 외교 노선을 크게 전환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그 과정에서, 로마 제국을 지원하는 또 다른 세력이 없기를 바랄 뿐이죠.”

에스파냐가 다이온의 침묵을 바라는 이유가 바로 이거로군.

다이온 연방이 로마 제국을 지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벨리사리우스의 만용, 혹은 망상을 좌절시키는 데 효과가 있다고 보는 건가.

“적어도 로마 제국을 돕는 다른 나라가 있는 것보다는 상황이 낫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에스파냐와 고려의 이 비공식적 접촉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끝났다.

1929년의 고려 내전에서 비롯된 폭풍이 지나가는 동안 에스파냐는 다이온 연방이 에스파냐의 마카오 식민지를 계속 인정할 것인지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비공식 접촉에서 견하는 마카오에 대한 에스파냐의 주권을 존중할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다.

에스파냐 역시 다이온 연방과 이제까지처럼 경제적 협력을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고.

또 한 가지 결실이 있다면,

“그건 저희가 중재 역할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가능하겠습니까?”

“일본공화국은 우리에게도 해상방위동맹에 참여해달라고 제안해왔으니까요. 유럽 열강과 함께하는 해상방위동맹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태도로 나온 게 아닐지.”

이번에는 견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거였으면 차라리 낫겠군요.”

“이럴 때는 제삼국이 ‘정신 좀 차리라’고 윽박질러주면 됩니다. 고려뿐만 아니라 세계가 보기에 잘못되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 일본의 태도도 좀 달라지겠죠.”

***

그러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별개로, 견하는 돌아가는 기차에서 에스파냐 외교관이 뿌린 단서들을 냉소적으로 조합했다.

-에스파냐의 주장과는 달리, 그들이 브리튼이나 칼마르보다 아즈텍 대륙에서 먼저 발을 뺄 수도 있다.

-물론 가장 먼저 빠지는 건 신성 제국이겠지만.

결국 로마 제국의 압력에 굴복해 이탈리아를 내놓는다 해도, 국경 방어를 더욱 강화해야 할 테니까.

이탈리아가 신성 제국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자극받은 다른 민족들의 준동도 경계해야 한다. 자칫 제국의 해체로 이어지지 않도록. 그러다 보면 프로이센이나 마자르 역시 경계해야 할 테고.

-멕시카 측에서 에스파냐와 이미 접촉했을 수도 있다.

그 가정이 옳다면 브라질 문제는 사실 이미 해결을 봤을 것이다. 에스파냐는 ‘브라질이 받는 위협을 떨쳐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멕시카와 화의했다’고 주장하겠지.

견하와의 접촉은 바로 그런 주장을 하기 전에 밑바탕을 깔아두는 거고.

신성 제국이 발을 빼고, 에스파냐는 이미 멕시카와 뒷거래를 마쳤다면…… 브리튼과 칼마르가 신연방에서 계속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

아니, 열심히 발을 뺄 구실을 찾고 있던 그들은 안도하며 귀국 선박에 군인들을 싣겠지. 결과적으로 신연방을 지키지도, 아즈텍 대륙에 영향력을 확대하지도, 그리하여 경제적 이익을 구하지도 못했기에 정치인 몇몇이 책임을 지고 내려와야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싼값이다.

-과연 멕시카에 그 정도 외교력이 있을까.

필요하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필요에도 불구하고 이념을 이유로 수단을 가리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까.

얼핏 융통성이 없어 보이지만, 이념은 중요하다. 이념보다 실질을 중시하면 오히려 ‘실질적인 큰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멕시카 자주국은 아즈텍 대륙이 유럽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이념으로 봉기했다. 원주민 내셔널리즘을 지지 기반으로 삼아, 내전 중에도 쿠아우테목에서 대서양 전쟁의 영웅들을 기리는 행사를 중단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이념의 적’으로 내세운 자들과 타협할 수 있을까?

타협할 수 있다면, 그런 행위가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떠나서, 무서운 정치력이라고 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도 유연한 외교 정책을 펼치는 데 20년이 넘는 안정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멕시카가 적을 돕는 자들과 타협하면서 국제 정세를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갈 수 있다? 그러면서 내분도, 지지 기반의 약화도 없이 여전히 쿠아우테목에 버티고 있다?

이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집단이 멕시카 자주국 정부라면, 다른 것도 가능하리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 이를테면…… 멕시카가 이미 ‘일본과도’ 접촉을 마쳤다든가.

일본이 보여준 협상 태도는 이미 멕시카와 이야기가 끝났기 때문이 아닐까?

즉 일본이 이미 태평양에서 멕시카에 상당히 양보하고 침략을 예방한 시점에서, 고려와의 협상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저 고려가 어떤 구상을 짜두었는지 알아내고, 고려가 일본과의 협상에서 시간 낭비만 하도록 만들면 그걸로 일본의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다.

아니, 아니지.

멕시카가 일본에 접촉했다면, 그래서 일본이 ‘멕시카가 바라는 형태로’ 합의했다면, 일본이 그저 태평양에서의 양보만 하고 끝냈을까?

-우리만 일본과의 동맹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런 발상은 다른 이들도 할 수 있다.

-에스파냐 쪽에선 일본이 자기네를 믿어서 그렇게 나온다고 추측했지만, 만약 일본이 향후 멕시카와의 군사 동맹을 약속했다면?

멕시카에게 양보한 것을 대륙에서 보상받으려 한다면?

멕시카의 다이온 침략에 선봉으로 서려 든다면?

피해망상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건 견하도 자각하고 있다. 이 모든 추측의 근거 역시 추측이다. 리안에게 꺼내기도 민망할 상상이다.

그러나 그런 이성의 목소리와는 별개로,

‘포위당했다’는 위기감이 견하의 목덜미를 휘감아 간다.

***

견하의 상상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현실이 되었다.

멕시카 자주국의 밀사가 콘스탄티누폴리를 방문한 것이다.

아직 그들이 비밀결사 ‘철혈의 꽃’이던 시절의 인연으로, 신수덕이 이 방문을 주선했다.

미묘한 신경전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멕시카의 최고지도자 쿠에츠팔린과 신수덕은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았다.

쿠에츠팔린은 망명객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신수덕은 파멸인 및 기갑사 기술을 제공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래를 제공한 셈이다.

이제 신수덕은 아즈텍 대륙을 떠나 로마에 있으니 딱히 둘 사이의 불편한 앙금 같은 건 없다.

그렇기에 신수덕의 동맹 주선은 벨리사리우스의 생각 이상으로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주견하가 먼 동쪽에서 멕시카가 일본 또는 에스파냐와 제휴하지 않았는가 염려하고 있을 때, 멕시카는 다이온의 동맹이기도 한 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추진 중이었던 것이다.

“중앙아시아 대륙 건너편의 다이온에만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지.”

“대서양 건너편에도 동맹을 만들겠다는 폐하의 영단은 옳습니다. 다이온이 설령 세상의 절반을 지배하는 강대국이 된다 해도 어딘가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외교는 지나치게 위험하죠.”

신수덕은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았지만, 그의 관심사는 로마 황제의 균형 외교가 아니었다.

황제가 고려의 배반 가능성을 의식해 보험을 들어놓는 것 자체는 상식적인 외교 정책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로마 제국이 언제든 고려를 배반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다른 동맹이 하나 더 남았기 때문에 로마는 고려를 버려야 할 순간에 망설이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되고 나면, 고려는 외교적 고립이라는 벽에 부딪힌다. 동맹국과의 연결이 끊긴 고려에는 반드시 ‘틈’이 생긴다. 신수덕은 그 틈을 파고들 심산이었다.

멕시카의 밀사가 로마 황제 앞에서 예를 표한다. 외부에는 절대 노출해선 안 될 만남이었기에 절차는 간략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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