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단두대로 올려보내라(12)
일본 측의 손길을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단을 재선정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걸린 시간을 생각해보면 이번에도 제대로 된 대표단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 점이 먼저 견하의 심기를 거슬렀다.
어쨌든 견하를 비롯한 다이온 대표단은 다시 협상 자리로 나갔다.
전과는 다른 얼굴들이 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양쪽은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일본의 새로운 대표단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다이온 대표단은 대체 왜 가만히 앉아 있냐고 추궁하는 듯한 얼굴로.
마침내 저들이 자신들의 추태에 사과할 생각이 없음을 알았을 때, 견하는 다시 한번 속이 긁히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시는 것 같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원하는 게 뭡니까.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상식 밖의 결례를 범한 거겠죠?”
피곤을 유발해 판단력을 흐트러트릴 목적이라면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칭찬해주고 싶었다. 실제로 견하는 그냥 빨리 끝내고 자리를 떠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새로운 일본 대표단의 반응은 견하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비죽인다.
토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 새끼들…….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노성을 내지르고 싶다.
일본 외교의 또 다른 나쁜 버릇이 튀어나온다. 상대가 알아서 이쪽이 원하는 바를 말해주길 기다리는 것이다.
견하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말씀하실 게 없다면 이 협상에 더는 의미가 없다고 봐야겠습니다만.”
“고려는 상대의 체면을 배려하는 법도 모릅니까?”
요구 사항을 솔직히 말하면 체면이 손상되니,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게 배려라는 뜻인가? 아니면 전에 벌어진 일을 추궁, 압박하는 것은 체면이 손상되니 고려가 알아서 일본을 배려해달라는 의미인가?
견하는 그 순간 확신했다.
이 회담은 결렬되어야만 한다.
“주제를 모르는 자들에겐 멸망만이 기다릴 뿐. 멕시카에 처절히 저항하다 멸망하든, 항복해서 그들에게 합병되든 이제 다이온이 알 바 아닙니다. 고려와 다이온은 자국에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하겠습니다.”
굳이 무엇이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일’인지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건 일본에서 알아서 상상하라지.
그 말과 함께 견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황당하게도 일본 대표단은 당황한 얼굴이 된다.
마치 자기네가 뭘 잘못했기에 이 회담이 파탄으로 치닫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일본이 자치라도 지키고 싶다면 다이온 연방에 가입하시죠. 우리 폐하께 충성하겠다면 그건 약속할 수 있겠군요.”
다이온 대표단은 견하를 따라 일어났다. 견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다,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덧붙이기로 했다.
“혹시라도 다이온으로 나를 찾아올 생각이 있다면, 경고하는데, 감히 내 약속의 신뢰성을 묻지 마십시오.”
***
“진심이야 어찌 되었든, 그 지경이라면 나라를 지킬 의지는 없다고 간주해야겠지.”
짜증 나는 회상을 머릿속 한구석으로 치워버리며, 견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귀국 후 외무성에서는 ‘일본공화국에 자국 방어 의지가 있다고 간주할만한 근거는 전무함’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견하의 소감에 조유관과 다른 외교관들도 동의한 것이다.
견하의 보고 역시 대동소이했다. 다만 그는 상식을 벗어난 일본의 외교 결례와 함께, 그런 결례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한 추측을 덧붙였다.
첫째, 설마 침략이 그렇게 이르겠느냐는 식의 무사안일주의.
둘째, 다이온이나 다른 강국으로부터의 독립성을 강조한 나머지 해상방위동맹을 지나치게 믿고 있다. 해상방위동맹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저항할 능력이 충분했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을 사실과 혼동한다.
셋째, 국토방위라는 장기적인 전략보다는 결정을 미루어 자국 내 정치세력간 균형이라는 단기적 안정에 집착한다. ‘조화와 협력을 통한 통치’라는 이상에 괴이할 정도의 자부심을 품고 있다.
외무성도, 일을 좀 더 속도감 있게 추진할 수 있는 자신의 최측근도 일본의 기괴한 장벽 앞에 좌절하고 돌아왔다. 그 사실에 리안은 경악했다.
“……외교적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되겠지만…… 정말 쓰고 싶지 않았던 수단의 가능성을 더는 무시할 수 없겠어.”
견하도 말이 안 된다며 코웃음 쳤고, 그저 ‘이야깃거리’로 치부되던 계획.
일본이 멕시카에 굴복하기 전에 고려가 먼저 점령하는 예방 전쟁.
그 이야기가 나온 것도 벌써 한 달 전의 일이다.
“마카오를 점령해서 안보의 위협을 제거해야 할…… 그런 상황은 안 오겠지.”
에스파냐인들은 좀 더 상식적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견하는 일단 낮잠에 빠져들었다.
***
일본 정계의 거두, ‘선생’이라 불리는 노인은 한탄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길을 선택해버린 건가.”
후배들의 어리석음에 깊은 한숨을 뽑아내지만, 늙은 가슴 속은 폐병이라도 걸린 양 쓰라리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걸까.
그래도 자신이 젊었던 시절에는 공화국의 기원, ‘농민공화’의 기풍이 좀 남아 있었는데.
어느새 일본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마치 왕정 국가의 귀족처럼 여긴다.
국민은 표를 줄 때나 쓸모가 있을 뿐이고, 경쟁해야 할 정치인들끼리 ‘동료’ 의식이 높아졌다. 정파와 이상을 초월해서.
아니, 정치인들 사이에 경쟁보다는 조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기풍이 확산하니, 정치인들의 ‘이상’은 자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국민에게 무엇을 해줘야겠다, 나라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겠다,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협치’인지 뭔지 하는 핑계로 권력을 어떻게 나누어 가질지, 그 과정을 얼마나 ‘원만하게 풀어낼지’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국민 중에는 정치인들이 싸우지 않아서 ‘진정 국민을 위한 정책을 낼 것이다’라는 착각에 빠진 이도 있는 모양이지만…… 싸우지 않는 정치인에게서 좋은 정책이 나올 리 없다.
적당히 투표하고, 적당히 선거에서 이겨서, 적당히 자리를 갈라 먹고 조화와 협력 속에 일본을 통치한다고 믿으며 아무것도 결단하지 않는 세월을 수십 년간 보냈다.
그러다 보니 국외의 위기에도 뚜렷한 의견이 나올 리가 없다.
어떤 의견이 있는 정치인도 그 의견을 관철하기보다는 ‘다른 의견을 지닌 이’의 체면을 어떻게 살려줄까, 그와 어떻게 ‘협력’해서 무난한 정책을 만들까를 먼저 고심한다.
바람직하게 들리지만,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정치인이다. 시체와 다를 바 없다. 그러니 고려와의 외교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러도 정치인들은 태평 무사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둔해 빠진 놈들은 ‘죽이라’고 했건만…….”
아무래도 선생의 조언은 노인의 망령으로 치부된 모양이었다.
“주견하라는 청년이 좀 건방지긴 해도 제대로 꿰뚫어 봤어.”
아니, 청년 하나가 꿰뚫어 볼 정도로 오늘날 일본의 정치와 외교는 얄팍한 지경에 이른 걸지도 모른다.
정말 큰 문제는……
“아무리 고려가 선거와 민주주의 비슷한 것을 실천한다 해도 본질은 호전적인 제국이라는 거지.”
주견하가 일본을 떠나며 남긴 말이 마음에 걸린다.
저쪽은 체면에 따른 허세가 없다.
아마 지금쯤 진지하게 일본의 선제 점령을 논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럽에서 벨리사리우스가 미친 짓을 벌이고, 점점 어두워져만 가는 세계정세 속에서 그 가능성도 이제 커져만 간다.
애초에…… 고려도 다이온도 중세 일본을 멸망시킨 나라가 아니던가.
***
“우리는 로마에도, 신성 제국에도 반대하는 행동을 취하기 어렵습니다.”
마카오의 한 카페 야외석에 앉아서, 견하와 에스파냐의 외교관은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시시콜콜한 잡담이라도 나누듯 두 사람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늘어졌지만, 주변 테이블의 손님들 대부분이 경호원이다. 에스파냐는 고려에서 온 이 ‘중요한 손님’을 지키는 데 상당한 성의를 보이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지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즈텍 대륙에 발이 묶인 건’ 신성 제국뿐만이 아니니까요. 유럽 정책에서 우리는 브리튼과 함께 신성 제국을 견제합니다만, 아즈텍 정책에서는 사실상 동맹이라고 봐야 합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는 유럽의 ‘의용군’들이 신연방을 위해 손발 맞춰가며 싸울 수가 없겠지.
끄덕이는 견하를 보며 에스파냐 외교관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즈텍 대륙에서의 일이 해결되지 않는 한 에스파냐, 칼마르, 브리튼이 이 문제에서 뚜렷한 태도를 드러내진 않을 겁니다.”
“그 정도의 정보까지 공유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브리튼과 칼마르도 동의한 일입니까?”
에스파냐 외교관은 슬며시 웃을 뿐 바로 답하진 않았다.
“국장, 아니 준장 각하라고 불러야 할까요.”
“편하게 주견하 씨, 정도로 하시죠. 여기는 개인 자격으로 ‘관광’을 온 거니까요.”
“그렇다면 세뇨르…… 모든 나라가 화목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의 외교라고는 합니다만, 우리는 갖은 애를 써서 최소한 ‘적국’만큼은 줄이려고 합니다.”
“이해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확장에 발맞춰 우리가 괜한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군요.”
“벨리사리우스 황제의 행동에 침묵한다 해도, 아니, 간접적인 지원을 한다 해도, 다이온 연방이 ‘직접적인 군사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부담은 상당히 감소합니다.”
그 시점에 견하는 깨달았다. 브리튼을 중심으로 한 세 나라의 동맹은 이미 고려에 대한 방침을 정했다.
여기서 이 외교관이 들려주는 말은 ‘대본’이다.
거짓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 대본은 간절하게 고려의 침묵을 바라고 있다.
“다이온은 ‘태평양에서 뭔가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서남쪽의 일은…… 잡음이 좀 있긴 해도 어쨌든 바라트와 타협점을 찾아냈으니까요.”
“현시점에서 다이온이 ‘태평양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 지목할 수 있는 나라는…… 아즈텍 내전에서 승기를 쥔 자겠죠.”
“참으로 감사한 솔직함입니다만, 염치없게도 솔직한 답변을 더 듣고 싶습니다. 에스파냐, 브리튼, 칼마르가 아즈텍 신연방에서 의용군을 철수시킬 가능성은……?”
에스파냐 외교관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 망설임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
“……동맹국 간에도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견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식민지라고 할 것이 없는 칼마르, 아프리카 일대에 식민지를 보유한 브리튼과 달리, 에스파냐는 브라질 식민지가 있으니까요.”
북으로는 아즈텍 대륙, 남으로는 잉카 대륙, 드넓은 땅에 보유했던 식민지들은 건설과 동시에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대서양 전쟁을 끝으로 아즈텍 연방과 잉카 공화국에 의해 대부분 무너지고, 에스파냐에 남은 것은 브라질 식민지 정도. 그것도 포르투갈과 동군연합을 이루지 않았더라면 얻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 마카오도 동군연합 포르투갈이 개척한 식민지 아니던가.
“다른 곳은 몰라도 신연방이 아닌 다른 세력이 승리했을 때, 그들이 브라질 식민지를 향해 보복 전쟁을 걸 가능성은 크다고 봅니다.”
견하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지금은 잉카 공화국이 북쪽, 아즈텍의 내전에 별다른 의견 표명을 하지 않고 있지만…… 누구든 승자가 결정되면 그들의 우방이 되어 브라질 식민지 공격에 앞장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견 차이는…… 바람직한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