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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57화 (457/541)

신을 단두대로 올려보내라(10)

심각한 분위기 속에 그래도 활기가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의 위기가 닥쳐와도 결국 극복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반란군이 수도를 함락시킬 듯 몰아쳐도, 괴물이 들끓는 칸발리크에 고립되어도, 다이온 연방이 파탄 코앞까지 가더라도, 그들은 해결해오지 않았던가.

이번 일도 그럴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일도 그럴 것이다.

벨리사리우스와 로마 제국이 촉발한 이 위기의 파도도 고려는, 다이온은 잘 타고 넘을 것이며,

흉흉해져만 가는 아즈텍 대륙의 정세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안도가 어전에 감돈다.

루우는 갈등했다.

한마디 해야 할까.

굳이 할 필요가 있는 말일까.

자신보다 몇 배는 더 치밀한 리안이나 견하가 안일함에 젖어 마냥 낙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가슴 한구석을 쿡쿡 찌르는 이 불안은 무엇일까.

권력 중추, 혹은 측근이라 불리게 된 이 친구들에 대한 불신은 아니다.

……불안의 정체는 벨리사리우스가 보이는 행보의 기시감이다.

로마 황제가 벌이는 일들……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나, 하는 묘한 기분.

“…….”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게 숨을 삼킨다.

벨리사리우스의 행보는 루우가 고려의 황제가 되고 다이온 연방의 수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닮았다.

이런 말이 있다.

‘세계대전을 거치고도 왕과 황제들이 살아남은 것은, 중세의 종언을 유예한 것에 불과하다’라는 말.

진즉에 끝났어야 할 군주들의 시대가 억지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승전국이라 해도 황제 체제가 세계대전 동안 드러낸 불합리함은 민중의 분노를 사기엔 충분했다.

민중이 그간 흘린 피는 대가로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기에 충분했고.

군주가 퇴위하진 않더라도 그 권한을 대폭 축소하며, 민족의 완전 독립은 아니더라도 연방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그러나 신성 제국이든 로마 제국이든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입헌’이라는 이름으로 황제권을 헌법 아래 종속시켰지만, 정작 그 헌법이 황제의 강대한 권력을 보장해주는 내용이라면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대공황을 지금껏 유예됐던 ‘제국의 해체’가 마침내 독촉장을 받은 것이라 해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 즉위는 시대를 거스르는 움직임처럼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냐.

루우의 지지자들은 그녀의 즉위가 단순히 혈통에 의지하지 않고 내전에서의 활약으로 정당성을 입증, 민중의 지지를 받은 것이기에 기존의 황제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유형의 황제는 옛 로마 제국에도 많이 있었고, 신성 제국의 나폴레옹 1세도 그러했다.

따지고 보면 루우와 같은 유형의 황제는 짧게 잡아도 100년이 넘은 구시대의 유산 아닌가.

애초에 동양에서 말하는 ‘천명’도, 군사적인 승리를 하늘이 부여한 운명이라 치장한 것일 뿐.

-벨리사리우스에게 나는 이상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만 게 아닐까.

벨리사리우스는 민족자결이나 군주 시대의 종말이라는 흐름을 정면에서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아니 애초에 그게 시대의 흐름이 아니라고 보는 건 아닐까?

로마 황제는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수권법을 통해 로마의 ‘입헌’에 뿌리를 둔 질서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렇다. 어리석은 이들은 강력한 통치자가 질서를 잡아줄 것이라 여기지만, 기존 원칙을 대체하고 나타난 강력함은 그 자체로 질서의 파괴일 뿐이다.

벨리사리우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루우가 동아시아를 지배한 다이온이라는 유물을 발굴한 것처럼, 벨리사리우스도 본국 이탈리아를 수복한 로마라는 유물을 발굴하려 든다. 당장 그 자신의 이름이 이탈리아를 수복했던 장군 벨리사리우스와 똑같지 않은가.

루우는 자기 영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 감정은 죄책감인가 교만인가.

고려의 황제가 되고, 몽골의 카간이 되는 그 목적에만 몰두한 나머지 시야가 좁아졌던 건 아닐까. 다이온의 유일한 군주가 된 지 이제 반년 가까워가건만, 루우는 그 반년 전의 자신이 무척 어리게 느껴졌다.

동군연합 다이온의 주인 자리를 얻어낸 게 주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전혀 돌아보지 못했다.

-이건 소녀의 장래 희망 같은 게 아니야.

자신이 한 일이 돌이 되어, 세계라는 연못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 사실에 루우는 자부심을 느끼기보다는 뱃속이 차가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자신은 어떤 씨앗을 세계에 뿌렸으며, 그 싹이 돋아나 세계를 어떻게 덮어나갈 것인가.

루우는 이제 그 감정을 명확히 무엇이라 말할 수 있었다.

두려움이었다.

***

목덜미에 남아 있는 숨결을 떠올리며, 견하는 열차 개인실에서 몸을 느슨하게 풀었다.

자주 누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때때로 보내는 따스한 밤은 견하에게 삶의 이유가 되어준다.

일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힐 때,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권력을 둘러싼 투쟁은 견하의 가족을 앗아갔지만,

또 이렇게, 새로운 가족을 주었다.

-그래도 결혼은 너무 이른 이야기겠지.

괜히 설레발쳐서 리안의 싫증만 유발한다면, 견하에겐 그야말로 악몽 같은 일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평범한 연인들이 그렇듯 언젠가는 자신이 청혼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애매하게 그때쯤을 가정해봤다가, 이내 또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누나는 독신을 고수할지도 몰라.

안 그래도 리안의 반대 세력은 연인과 친구들을 정치판에 끌어들여, 국정을 소꿉장난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한다. 리안이 세운 너무나도 명확한 공적 앞에 그런 목소리는 금세 힘을 잃지만.

요즘 견하와 감찰국이 하는 일은, 그런 헛소리를 감시하다 지나치다 싶은 건 짓밟아버리는 것이다.

괜히 ‘다양한 의견’이랍시고 헛소리를 내버려 두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 견하는 그렇게 내다봤다.

-그런 의견의 출처는 아무래도 제국입헌당 내 노장파인 것 같은데 말이지.

안세규는 요즘 조용하다. 얌전해졌다기보다는 때를 노리고 있는 것이겠지. 총선거에서의 패배 이후 그는 당을 추스르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 와중에 괜히 태사를 공격해봤자 얻는 게 없으니.

하지만 노장파는 기세가 한창 올랐다.

-누구의 관대함 덕분에 류성일이 제국최고회의 의장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저 누나에게서 양보를 받아냈다고 좋아 날뛰는 늙은이들…….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견하가 그들을 감시하는 시선에는 그런 경멸이 가득 차 있다.

-주제도 모르고 태사 자리까지 넘보는 작자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스무 살 계집애가 운 좋게 이뤄놓은 업적 따위, 자신이 하면 언제든 더 큰 성과를 이룰 수 있다…… 이런 착각을 하는 멍청이가 지금도 있긴 하다.

견하와 감찰국은 그런 이들을 ‘철 좀 들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건 그들의 ‘배후’에 있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경고에 불과해.

그 누군가는 류성일일 수도 있고, 자신이 아직 알아내지 못한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뚜렷한 실체가 없는, 노장파 전반의 망상이 배후일지도.

-좀 더 거친 방법을 쓴다면 명확하게 알아낼 수 있으련만.

하지만 리안이나 다른 누군가가 말려서가 아니라, 견하 본인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제국입헌당 노장파는 잠재적 위협 요인이면서도 동시에 리안의 기반이기도 하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의원에게 감찰국,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경찰실 제복을 입은 ‘당원’들이 찾아가 ‘항의’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압박이 되겠지만, 적의 공세를 저지만 할 뿐 이쪽에서 반격해 결정타를 먹이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에 결코 만족스럽진 않다.

-어쨌든.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니, 지금은 정적들이 공격할 빌미를 최대한 줄여나간다.

리안이 독신을 고수하면 자신도 독신으로 평생을 살아갈 생각이다. 불만은 없다. 형식적으로 가족이냐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느냐가 견하에겐 훨씬 중요했다.

앞으로도 계속 리안의 곁을 지킬 수 있다면 견하는 그걸로 족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해서 리안의 권력을 흔들 요인이 줄어든다면, 그 방식을 택하는 게 견하는 더 낫다고 판단했다.

리안과의 미래, 리안과 함께 한 식사, 대화…… 그런 걸 떠올리며 온기를 머금었던 견하의 눈빛이, 점차 차가워진다.

그의 생각은 어느샌가 당장의 일로 옮겨갔다.

리안과 친구들 외에 다른 인간에게 따스한 감정을 품을 일은 없다. 다른 인간들과 해야 할 일은 교류가 아니라 측정이다.

마카오로 향하는 이번 여정도 마찬가지다.

‘공식적 외교 접촉’은 아니기에 견하는 제복이 아니라 사복 차림으로, 마카오로 ‘휴가’를 가고 있었다.

이번 휴가를 통해 에스파냐, 그리고 그 동맹국인 브리튼과 칼마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물론 저쪽에서도 고려가 ‘로마 제국의 우방으로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견하를 통해 알아내고 싶겠지. 그래서 견하의 ‘마카오 관광’을 기꺼이 안내하기로 한 거고.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서유럽과의 외교는…… 방치된 건 아니지만 고려에겐 생소한 영역이다.

-이번 일을 공부할 기회로 삼아야지.

외교적 활로는 여러 방향으로 열어두는 게 좋다.

분명 벨리사리우스에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배운 것도 있지만, 로마 제국하고만 굳건한 관계를 구축하면서 스스로 외교의 폭을 좁힐 이유는 없다.

-가능하다면 신성 제국 쪽과도 접촉해보고 싶긴 한데…….

당장 돌아가는 상황이며, 견하의 권한을 생각하면 그건 어렵다.

-일단은 에스파냐, 브리튼, 칼마르 쪽으로 길을 튼다는 점에 만족해야겠지.

어쨌든 지금껏 의존하던 경로 외의 다른 길을 개척한다는 점에서, 이번 마카오행은 의미가 깊다.

그렇다……. 이를테면 몇 달 전 실컷 쓴맛을 봤던, 도저히 신용할 수 없는 일본공화국과의 외교에 의존하는 태평양 정책이라든가.

“일본도 고려가 자기네와 상의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태평양 정책이 없다는 걸 아니까 그렇게 나왔던 거겠지. 하지만 ‘대체품’을 찾아낸다면 일본의 태도도 달라질 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밀려오는 듯하지만, 견하는 불쾌한 회상을 곱씹어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 정도로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자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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