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단두대로 올려보내라(8)
“그런 의미가 아니잖습니까! 유감스럽지만 그들의 운명은 그들 손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괜히 다른 이의 운명에 끼어드는 오만을 범하고, 그 오만의 대가를 치를 필요까진 없다는 거죠!”
격론이 지루한 말꼬리 잡기로 변해가는 그때,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정확한 미래 예측은 어렵겠지만, 가능성 큰 예측은 전문가의 힘을 빌리면 해볼 수 있겠지요. 만약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우리끼리 여기서 이러니저러니 할 게 아니라 군사전문가의 견해를 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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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전쟁성 관료 및 군 대변인을 원로원에 불러 의견을 듣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개입 찬성파는 군인들에게서 ‘개입해도 안전하다’는 보장을 들으려 했다. 개입 반대파는 군인들의 말에서 개입해선 안 될 근거를 찾아내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모였다.
물론 개입 반대파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탄원서’라는 것을 황제가 직접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읊어댄 시점에서, 벨리사리우스의 개입 의지는 분명했으니까.
-동기는 형제들의 복수가 아닐까?
가장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지금 콘스탄티누폴리 총대주교를 통해 로마 교종을 파문한다 해도, 로마 교종 역시 콘스탄티누폴리 총대주교나 황제를 파문하면 그뿐이다. 그래서야 중세 때의 동서대분열을 반복하는 추태만 벌어진다.
하지만 북이탈리아를 영토로 편입할 수 있다면? 그렇게는 못 하더라도 북이탈리아에 괴뢰 왕국을 둘 수만 있다면?
굳이 파문이라는 복수 같지도 않은 복수를 하지 않아도 교종을 괴롭힐 수많은 방법이 생긴다. 교종령 따위 지워버리고 콘스탄티누폴리의 세계총대주교가 로마 총대주교를 임명, 천년 가까이 이어져 온 종교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황제 개인의 복수를 위해 수많은 생명이 피를 흘려야겠는가?
황제 앞에서 대놓고 말을 못 할 뿐, 개입 반대파는 그렇게 의견을 모았다.
황제의 영욕을 자신의 영욕과 동일시하는 자들은 많이 있으니 전장에 나설 사람이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목숨까지도 아까워하는 것이 정치가가 할 일이다.
-이 과정에서 황제가 군사적 성과를 거둔다면, 젊다는 약점을 덮어버리고 정국을 장악할 수도 있을 터. 그런 이득 역시 계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지독한 이기심이 그 동기이지 않은가. 누군가가 그 이기심을 위해 피를 흘리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벨리사리우스는 확실히 젊은이답지 않은 구석이 있다. 식민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라든가, 에반겔로스같은 멍청한 인간을 구워삶는 방식에서 보듯 확실히 뛰어나긴 하다.
그러나 젊은이답게, 그간의 성공에 취해 넘봐선 안 되는 곳까지 손을 뻗는다. 이탈리아 문제도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성공시키고, 그걸로 자신의 위신을 더욱 드높일 생각이겠지.
여기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도 모르고 날뛰는 젊은이라면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개입 반대파는 그렇게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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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황제수권법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벨리사리우스가 내뱉은 비웃음을, 신수덕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손님과 측근 사이, 애매한 위치에 두 발을 걸친 신수덕은 벨리사리우스가 어떻게 될지 지켜볼 심산이었다.
충분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젊긴 하지만 미리안과는 다르다.
로마인 내셔널리즘을 이용하긴 하지만 허동주와도 다르고, 또 자신과도 다르다.
이용만 하되 믿진 않는 것 같으면서도, 신념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 추진력이 있다.
“에반겔로스가 멋모르고 폐하께 넘긴 권한이니, 폐하께서도 잘 다루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개입 반대파는 아마 그 틈을 파고들어 폐하의 손발을 묶어둘 심산이겠지요.”
“순진하군.”
본인들은 에벤겔로스보다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벨리사리우스가 보기에 그들 역시 에반겔로스와 같은 부류였다.
“짐이 이탈리아 문제에 대한 개입을 논의하도록 허락한 건, 반대 의견을 완전히 짓누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겠지.”
아마도 황제수권법이 진면목을 보이는 건 그 이후가 될 거라고, 신수덕은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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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입 반대파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원로원에 마련된 청문회 자리에서 군이 ‘이미 결정된 입장에 따른 답변’을 내놓으리라는 점을 간과했다.
물론 어떤 조직이든 각자의 사정이 있고, 그 사정에 따라 곤란한 답변은 회피하고 변호해야 할 부분은 필사적으로 설명할 터이다. 개입 반대파는 이번에도 그 수준일 거라 막연히 짐작했다.
그러나 군이 결정한 것은 바로 ‘황제 폐하에 대한 입장’이었다.
“폐하께서 명하시면, 우리는 진격할 따름입니다.”
개입 찬성파 의원들과 비밀리에 접촉한 자리에서 한 장성은 그렇게 큰소리쳤다.
고려에서 루우가 목숨까지 걸어야 겨우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벨리사리우스는 비교적 손쉽게 얻었다.
이는 두 사람의 역량 차이도 아니고, 고려와 로마의 차이도 아니다.
순전히 두 사람이 속한 왕조의 차이였다.
보르지긴 가문도 오래된 데다 고려 왕씨 가문과 여러 차례 통혼하긴 했지만, 1929년 시점에서 루우는 아예 새로 세우는 왕조의 첫 군주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고려인들에게 보르지긴은 어쨌든 외국 왕조이고, 아무리 왕씨 황실과의 밀접한 혼인 관계를 설명해도 당장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루우는 자신이 새 왕조의 시조로 적합하다는 걸 몸소 증명해야 했다. 그러고도 납득하지 못하는 군인들은 내전을 통해 토벌해야 했다. 내전에서 루우의 반대편에 선 군인들에게는 ‘군주에게 반역한다’라는 부담감이 아예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다르다.
류리크-팔레올로고스도 루스계 공가와 같은 뿌리, 류리크 가문의 피가 섞이긴 했지만 팔레올로고스의 황통이 아예 끊겼다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정통성, 그에 따른 권위가 단절 없이 누적됐다. 이 사실은 막대한 가문의 유산이 되어 준다.
고려군과 달리 로마군은 황제의 이탈리아 개입 의지를 지지하기로 일치단결한 것이다.
물론 이는 즉위 직후 보여준 황제의 행보가 군의 신용을 얻은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루우처럼 따르지 않는 군인을 대규모로 숙청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 적은 없다.
유산은 물질적인 것뿐만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무형의 유산이 주는 혜택은 대를 거듭할수록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더 큰 혜택으로 돌아온다.
많은 가문의 수장들이 완고한 태도로 가문의 영광을 강조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가문의 영광을, 유산을, 끊임없이 누적시키기 위해서. 유무형의 유산이 후손들에게서 빛나도록, 그리고 영원히 대물림되도록.
“그 말은, 군은 전쟁을 감수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미 원로원 의원님들 사이에도 말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반드시 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고.”
“호오, 군에서도 그렇게 내다봅니까.”
“신성 제국은 이미 막대한 물적, 인적 자원을 아즈텍 대륙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의 독립운동이 대봉기로 이어지고, 여기에 우리가 개입해 전쟁을 벌이지 않고선 이탈리아를 지킬 수 없다는 판단이 설 경우, 신성 제국은 이탈리아를 포기합니다.”
포기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일단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아즈텍 대륙에 보낸 군대를, 대서양을 건너서 다시 되돌려놓지 않으면 대응할 수가 없다
이탈리아인들만의 봉기야 어떻게든 국내 주둔 군경으로 대처한다 해도, 로마군의 전력을 당해낼 수는 없다.
“신성 제국 정부로서는 이탈리아와 아즈텍 정책, 둘 모두의 실패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적어도 실패를 하나로 줄일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전력을 온존하면서 알레마니아와 게르마니아 영역이라도 지키려 할 테지.
“무엇보다도 신성 제국은 이런 상황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줄 우방국이 없습니다.”
애초에 신성 제국의 보나파르트 왕조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나폴레옹 1세가 겪었던 포위망을 로마 제국이 뚫어 주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이야 패배하고 동북 변방에 찌그러져 이를 갈아대고, 보헤미아는 독립을 얻었지만, 이번엔 합스부르크를 대신해 보나파르트가 주인 행세를 하려 들진 않을까 경계했다.
합스부르크 왕실이 도망쳐 들어간 마자르야 당연히 옛 오스트리아, 지금은 알레마니아라 불리는 땅을 되찾으려고 혈안이 되었고.
북방의 칼마르, 서남방의 에스파냐는 신성 제국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각자 독립을 지키려 으르렁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해협 건너편에서 브리튼 왕국이 배후 조종했다.
이런 포위망 속에서 퇴위당할 뻔한 나폴레옹 1세를 구원한 것이 바로 로마 제국이다.
로마 제국이 나폴레옹 포위망을 무력화하고 막대한 지원을 계속하는 한 브리튼도 마자르도 나폴레옹의 몰락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유럽의 현 세력 구도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신성 제국을 로마 제국이 배신했다는 것은, 신성 제국 외교의 크나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신성 제국의 다른 우방으로는 에이레가 있다. 신성 제국 덕분에 브리튼에서 독립할 수 있었던 에이레가 신성 제국을 배신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러나 에이레는 브리튼 왕국의 재침공을 염려해야 할 지경의 국력이니, 바다 건너 신성 제국을 도울 형편이 아니다.
“신성 제국 입장에서는 굴욕적이긴 해도, 이탈리아를 내놓고 다시금 로마 제국과 화의를 맺는 게 최선입니다.”
이 경우 단순한 화의가 아니라, 로마 제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신성 제국이 굽히고 들어온다는 의미가 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영토 보전만을 고집할 경우, 나폴레옹 1세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보나파르트 포위망은 로마 제국을 통해 완성되고야 만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인들의 봉기를 우리가 뒷받침해주기만 해도, 우리는 이탈리아라는 새로운 영토를 단번에 확보할 수 있다는 결론이로군.”
“예. 신성 제국에 모조리 멍청이만 있는 게 아니라면. 물론 일부 신성 제국군의 반발에 따른 희생은 있겠습니다만, 본격적인 전쟁이라 볼 수 없는 수준의 교전일 겁니다.”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면 그렇다고, 군 관계자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러나 합리적이라는 말은 누가 봐도 이치에 합당하다는 의미보다는, 그 말을 하는 자에게 흡족한 결과를 내기까지의 과정이 이치에 합당하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더 많이 담고 있다.
이 경우도 그랬다.
즉 로마 제국의 개입 찬성파에겐 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이, 신성 제국 입장에선 비합리적이기 짝이 없는,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것으로 비친다는 말이다.
개입 찬성파는 신성 제국이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굴복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이탈리아를 포기하지 못한 채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이라 본다.
그러나 신성 제국에겐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굴복하는 것이 비합리적이고, 고립이라는 위기를 감수하면서도 영토 보전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런저런 분석을 곁들였지만, 결국 자기 좋을 대로 하고야 마는 착각.
벨리사리우스에겐 그런 착각을 일깨워주거나 제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착각을 십분 활용해야겠다는 계획만이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