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단두대로 올려보내라(7)
“현재 북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하는 시위는, 해외의 여론마저도 우리 로마인들의 억울한 처지를 동정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대 황제들을 재현이라도 하는 것처럼, 벨리사리우스는 원로원에서 교종과의 회담 결과와 이탈리아인들의 반응을 보고하는 연설을 했다.
물론 여기는 로마시가 아니라 콘스탄티누폴리다. 로마시가 제국의 수도였던 시절처럼 황제가 원로원 의원들의 ‘동료’로서 정책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지는 않는다.
황제가 ‘주인’으로 행세하려 할 때마다 원로원 의원들이 반발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건 천수 백 년 전에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다.
대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모양만큼은 유지해서 옮겨심었지만, 콘스탄티누폴리 원로원은 로마시의 원로원과는 다르다.
기능 측면에서 유사성이 있고, 근대를 거치며 개혁을 거듭한 끝에 많은 권한을 돌려받았다 해도, 시간은 다시금 격변을 일으켰다.
어떻게 보면 시간이란 변화의 동의어다.
황제수권법의 통과 이후 펼쳐지는 이 광경은, 고대와도, 중세와도, 근대 이후와도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니까.
“비극의 피해자는 우리 임페리움(帝國)이기도 하고, 좁게 보면 류리크-팔레올로고스 황실이기도 하며, 더욱 좁게 보면 저, 벨리사리우스 개인이기도 합니다. 형제를 잃고 뒤이어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황실의 일원이라고는 해도 남은 평생 학자로 살아갈 일만 남았던 젊은이가 뜻하지 않게 황제라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졌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아 충분히 동정을 살만한 처지입니다.”
벨리사리우스는 잠깐 숨을 골랐다.
“그러나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합니다. 북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시위는 단순히 동정만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시위가 이토록 광범위하게, 대규모로 일어나고 점점 기세를 더해만 가는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복합적인 이유는 ‘오래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는 시간과 함께 다른 이유를 쌓아 올리고, 심지어는 원한 수준까지 깊어지기도 한다.
“이탈리아인들이 오랜 세월 독립을 갈망해왔다는 것은 여기 계신 의원님들도 다 아실 겁니다. 보나파르트 왕조 이전이든 이후든 신성 제국에선 이탈리아를 본국과는 구분되는 별개의 왕국으로 분류해왔죠.”
이는 신성 제국이 이탈리아를 그만큼 중시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본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신성 제국의 이러한 조치는 이탈리아를 안정시키면서도, 반대로 이탈리아인들이 정체성을 자각하게 했다.
“이러한 이탈리아인들의 마음을 등에 업고, 교종청은 신성 제국 내에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보나파르트 황조는 교종 앞에서 무릎 꿇고 얌전히 제관을 받는 게 아니라, 시조 나폴레옹 1세처럼 자기 손으로 관을 쓰는 전통이 자리 잡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전 시대처럼 종교적인 영향력만으로 힘을 발휘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교종청에는 보다 세속적인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교종청은 반쯤은 협박으로, 또 반쯤은 회유로 이탈리아 독립의 열망을 활용했다.
한편으로는 교종청의 목소리가 신성 제국 내에서 외면당한다면 ‘이탈리아인들의 독립운동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며 협박을,
다른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인들이 신성 제국의 질서에 복종하도록 달래려면 교종청 밖에 없다’며 회유를.
신성 제국은 이러한 반협박을 못마땅해하면서도, 교종청의 권위를 통치에 이용해왔다. 어쨌든 사람들은 괜히 교회와 반목하는 정부보다는 화목한 정부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법이다.
“이번 교종청의 행태를, 이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독립 열망을 이용만 해 온 역사와 겹쳐 본 것입니다. 더는 교종청에 휘둘려가며 이탈리아 독립을 추구하지 않겠다, 우리는 이탈리아 민중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 그런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이 교종청에 대한 반발만으로 이번 시위에 나선 건 아니었다.
그들은 교종청을 대체할 새로운 언덕을 찾았다.
비잔티움, 콘스탄티누폴리라는 언덕을.
물론 벨리사리우스는 그 사실을 굳이 말로 하진 않았다.
“심지어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말을 잠시 끊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발표하기에는 민망하다는 듯.
“‘로마 교종은 프랑스의 개’라고도.”
특유의 묵직한 위엄을 지키고 있던 원로원에 비로소 술렁임이 돌았다.
그 술렁임이 충분히 원내를 돌만큼 벨리사리우스는 말없이 서 있었다.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고개는 의원들의 머리 위 어딘가를 향한 채로.
고대와 같은 토가는 없었지만, 벨리사리우스는 그 순간 충분히 원로원의 주목을 받는 황제였다.
“이번에 교종과의 회담에 임하면서, 저는 탄원서 하나를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의 독립운동은 일반적으로 지역별, 도시별로 분화되어 있긴 합니다만, 그들 역시 힘을 모아야 할 필요를 느끼기에 대표하는 협의체가 있습니다. 이 탄원서는 그 협의체가 저에게 비밀리에 전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벨리사리우스가 한 말만으로도 의원들은 황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하기 시작했다.
“‘형제 로마인들이여’,”
벨리사리우스는 거기서 다시 말을 멈추고 의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어떤 이는 흥분으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평소 로마의 고토인 ‘본국 이탈리아’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물이다.
또 어떤 이는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인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평소 로마에서 내셔널리즘의 대두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물이다. 이탈리아인들이 로마 제국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충격이 그의 몸을 휩쓸고 있는 것이리라.
세 번째 부류는 공포로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이 또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형제를 부르는 뜨거운 목소리에 호응하는 것은 뜨거운 불의 바다가 국경에 펼쳐지는 걸 의미하니까.
반응을 충분히 살폈다고 생각한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탄원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를 위해 당장 이탈리아로 들어와 피를 흘려달라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당신들도 고토를 회복하니 이익이 아니냐고, 그런 뻔뻔한 말을 하지도 않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신성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통보를 하려고 벨리사리우스에게 접근해 탄원서를 전하진 않았을 것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침착하게 황제가 다음 구절을 읽기를 기다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도움의 손길을 뻗을 준비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탐욕스러운 프랑스인들이 알프스를 넘어와 우리 운동을 철과 피로 진압하기로 했을 때, 그때 여러분이 우리의 남겨진 사람들을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잔혹한 짐승 같은 게르만들을 보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프랑스인들이 제국의 여러 민족을 통치하는 방식이니까요. 자유제국이라는 위선의 깃발을 드높인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만, 최종적인 자유를 얻으려는 움직임만큼은 피비린내 나는 곤봉을 내리치는 자들이 바로 보나파르트인 까닭입니다.’”
이탈리아로의, 개입.
자신들을 형제라 부르는 이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신성 제국의 위선에 대한 의분으로 주먹을 부르쥐는 이들이 있다.
이탈리아를 회복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다며 화색이 도는 이들도 있다.
당장 벨리사리우스의 입을 막고, 이런 싸구려 형제애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외치고 싶은 이들도 있다.
입장은 제각각이지만, 그들 모두 하나의 사실에는 동의했다.
신성 제국과의 충돌이 머지않았다는 것.
“‘우리의 목숨을 구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그것은 여러분들이 이 탄원을 읽는 순간 군사적 개입을 결정한다 해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딸과 누이와 연인과 아내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어갈 것입니다. 우리의 부탁은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을 형제들이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벨리사리우스의 어조가 가라앉았다. 그는 착잡함이 묻어나는, 다소 잠긴 목소리로 탄원서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나갔다.
“‘로마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오래도록 임페리움의 밖에 따로 떨어져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가 우리를 외면했다고 원망하지도 않고, 프랑스와 게르만의 군홧발에 짓밟혔다고 우리의 정체성을 부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서 집에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남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흩어졌던 집안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더라도 이 최종적인 진리 하나만큼은 모르는 척할 수 없으리라 믿습니다.’”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질문이 쏟아졌다.
“원로원에 탄원서를 보이시기 전에 이미 폐하께서 충분한 검토를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자리에 탄원서를 보낸 이들이 이탈리아 독립운동에서 얼마만큼의 대표성을 지니는지, 그들이 예고한 일이 정말 임박했는지를 따지지는 않으려 합니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행동할 것인가, 아닌가’.”
그 원로원 의원은 발언을 마치고 군주를 향해 예를 표했고, 벨리사리우스 역시 연장자이자 원로원 의원인 그를 향해 예를 보였다.
좀 더 젊은 의원이 일어나 발언했다.
“다양한 의견이 있겠습니다만, 과연 이것보다 우선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입니다. 임페리움의 시민으로서,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만큼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벨리사리우스 입장에선 반가운 의견이지만, 그는 곧장 어떤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전쟁을 의미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폐하의, 우리의, 임페리움의 명예는 분명 중요합니다. 하지만 당장의 작은 명예를 위해 큰 명예를 손상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상대로 곧장 반론이 나왔으니까.
벨리사리우스가 지켜보는 동안 원로원은 격론의 장으로 변해간다.
“단순히 명예의 문제로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외면하는 동안 우리를 형제라 부른 이들의 ‘피’가 흐릅니다! 그들의 목숨은 뜨거운 피가 흐르며 실재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런 목숨을 구하면서 명예가 따라오는 것이지, 명예에 그들의 목숨이 따라오게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잖습니까!”
“전쟁이 벌어지면 잃게 될 로마 제국 젊은이들의 목숨 역시 실재하는 겁니다!”
“왜 전쟁이 벌어지리라 단정 짓습니까? 우리가 전쟁을 꺼리는 만큼 신성 제국도 전쟁을 꺼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탈리아인들을 돕는 걸 신성 제국도 묵인할 수밖에 없지요.”
“지나친 낙관주의입니다. 여기 의원님께서 신성 제국이 알아서 물러나리라 내다보시는 것처럼, 신성 제국에서도 로마군이 알아서 물러서리라 예측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세상에는 우발적 충돌에서 시작된 전쟁이 넘쳐납니다. 우리도 그런 어리석은 길을 걸을 수는-”
“어리석다니요! 자기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고 미래를 제 손으로 결정하려는 것이, 그런 이들을 돕는 행위가 어리석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