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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53화 (453/541)

신을 단두대로 올려보내라(6)

몰락은 한순간이다.

서유럽을 혼돈으로 밀어 넣어 몰락시키겠다던 토칸의 당찬 구상은 불과 며칠 만에 완전히 뒤집혔다.

은밀한 곳에서, 적이 눈치채지 못하는 공격을 가하던 형세는 이제 정반대가 되었다.

누가, 어디서 공격해오는지 모르고 쫓기는 건 이제 토칸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산속을 헤맨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토칸을 겨냥하여, 포위망이 좁혀오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동양에서 온 관광객이나 노동자로 위장해 빠져나가려 했다.

아무래도 동양인은 눈에 띄니까. 그게 가장 나은 대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토칸은 상대가 신수덕인지 모른다.

신수덕인 줄 알았다면 괜히 마을이나 도시를 떠돌며 시간 끌지 않고 야생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신수덕은 허동주 밑에서 고려민국의 잔당을 토벌한 적도 있고, 산동 총독으로 있을 때는 한족 독립운동 진압에서 성과를 거둔 사람이다.

지하조직의 생태를 파악하고 집요하게 추적해 들어가는 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토칸은 간신히 ‘이탈리아 독립운동 조직이 벨리사리우스의 수족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파악했지만, 그것마저도 늦은 셈이었다.

그 시점에도 토칸은 여전히 추격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사람이 신수덕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 황제의 족쇄보다는 저 황제의 족쇄가 더 마음에 들었나 보군.”

이탈리아인들을 향해 던지는 냉소는 숲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허망하게 흩어졌다.

아예 시내 한복판에서 난동을 피워볼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아마 시선은 엄청나게 끌겠지.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패배로 직행한다.

그런 식으로 난동을 부리다 패배하면, 자신을 패배시킨 적의 위신만 높여줄 뿐이다.

패배하더라도, 벨리사리우스에게 확실히 엿을 먹이고 패배해야 하는데.

일단 추적을 끊어내고, 상대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에서 반격을 가해야 한다.

하지만 신수덕은 이미 진한 냄새를 맡았다. 토칸이나 주견하에 비해 나이를 먹긴 했어도 늙지는 않았다.

경험, 그리고 참으로 인간 같지 않은 끈기가 더해져 신수덕은 토칸을 산으로 숲으로 추격해 들어갔다.

토칸이 신수덕을 뿌리치기엔 너무 늦었다.

깊은 숲까지 스며들어온 추적자들의 기척을 느끼고 나서야, 토칸은 난동을 부리다 죽는 것 외의 선택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돌연, 추적자들이 멈췄다.

“짐의 부하나 북이탈리아 조직에도 이단은 있지만, 토칸은 그들로 잡기엔 위험하네.”

로마인 추적자들은 경배를, 이탈리아 독립운동 조직들은 놀라움과 감탄을 드러냈다.

벨리사리우스 황제가 직접 올 줄이야.

황제는 이미 한 번 몰래 이탈리아 안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 이번 잠행도 특별히 어렵진 않았다.

숲속에서, 황제는 날개와 가시면류관을 내보였다. 날개의 수없이 많은 눈이 일제히 어딘가를 바라봄은 물론이다.

푸르름이 지나쳐 어둡기까지 한 숲. 그 속에서 빛을 발하는 황제.

지금 누군가를 죽이려고 왔다는 사실만 잊어버린다면, 사람들은 신의 메시지가 이 숲에 전해졌다고 생각했겠지.

신수덕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런 신수덕을 향해 벨리사리우스 황제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끄덕였을 뿐이다.

거래. 무미건조하지만 그만큼 솔직한 관계.

두 사람은 이로써 불안 요소인 토칸을 제거한다. 공범이 되어 나눈 술잔에는 토칸의 피가 담길 것이다. 그 피를 마시는 것을 두 사람은 거래의 증표로 삼는다.

“어차피 죽을 놈인데 불필요한 희생을 늘릴 필요는 없지. 짐이 직접 토칸의 목숨을 취한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황제의 측근들이 경악하며 그를 말렸겠지만, 황제의 찬란한 모습 앞에서는 그런 걱정조차 마비되는 법이다.

신의 은총을 받은 황제가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

빛의 날개 앞에서 감히 패배를 입에 담아선 안 될 것 같다는 위압감.

오직 신수덕만이, 약간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황제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토칸의 최후를 눈에 담아두려는 생각도 있었고, 황제의 실전을 봐두는 것도 좋겠다는 판단이 섰으니까.

***

추격자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팽팽한 공기는 살의가 자신을 향해 집중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토칸의 두 손은, 아니 양팔은 이미 인간의 형상을 잃었다.

뱀처럼 구불거리며 수풀 사이를 촉수들이 기어간다. 누구라도 토칸이 만든 촉수들의 망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짓이겨질 것이다.

“……하.”

시야 끝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토칸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사람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어두운 숲을 태울 듯 빛나는 그 형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폐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황제가 자신의 계획을 눈치채고 먼저 손을 쓸 줄도 몰랐다.

벨리사리우스의 대답보다 먼저, 신수덕도 토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듯, 토칸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 속수무책으로 당할밖에.”

“짐에겐 변명할 말이 없네. 그대에겐 있는가?”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폐하를 시해하는 데 최선을 다할 뿐이죠.”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벨리사리우스가 돌진한다.

토칸이 한 걸음 물러서며 손을 뻗자 땅바닥에서 무수히 많은 촉수가 솟구쳐오른다. 그것들은 공중에서 방향을 반대로 꺾어 곧바로 벨리사리우스를 덮쳐온다.

그의 온몸을 뒤덮을 듯, 꿰뚫을 듯.

그러나 촉수들은 벨리사리우스의 몸에 닿기도 전에 타올랐다.

종이를 태운 재가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촉수들은 흩어졌다.

그쯤은 예상했다는 듯 토칸은 거대한 낫을 소환했다.

벨리사리우스의 검이 토칸의 낫과 부딪혔다. 철을 맞대는 굉음은 울리지 않는다. 낫과 검의 날이 닿은 부분이 살점이 타는 소리를 낼 뿐.

하지만 토칸의 낫은 형태를 잃지 않는다.

불타 없어지려는 것을 끊임없이 복구하며 벨리사리우스의 공격에 저항한다.

그의 주의를 흐트러뜨리기 위한 촉수들의 공격도 끝없이 이어진다.

신수덕은 벨리사리우스의 모습이 마치…… 뱀 구덩이에 빠진 독수리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날개와 발톱과 부리…… 아니, 황제는 날개와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전투를 치르고 있다.

전투에 ‘절대’는 없다. 로마인들이 그들의 젊은 황제를 신의 사자처럼 여기는 것과 달리, 신수덕은 여기서 벨리사리우스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벨리사리우스가 죽으면 다음 차례는 자신이지만.

무수히 태우고 무수히 베어낸다.

그때마다 토칸도 지지 않고 다시금 뱀 같은 촉수들을 재생하고, 낫의 형상을 복구한다.

두 사람의 싸움에 휘말린 나뭇가지와 이파리도 함께 찢겨 흩날리고, 또 불타오른다.

전투가 더 길어진다면 화재로 번질 것 같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의 불은 그런 불이 아니다. 그 추종자들의 믿음대로 정말 신의 징벌이라도 되는 듯한 불꽃이다.

이제 날붙이가 허공을 가르는 잔광만이 신수덕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결투.

상대가 누구인지조차 잊고,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다.

지금 이 숲은 죽고 죽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베여서가 아니라, 전투의 움직임에 스스로 몸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격렬함.

이대로 둘 중 누군가 아주 짧은 순간, 신경에 전달되는 뇌의 명령 하나가 아주 작은 오차를 만들어내는 그 순간 승패는 결정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벨리사리우스의 검이, 토칸의 목 앞에서 멈췄다.

신수덕은 처음에는 벨리사리우스가 당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토칸의 목을 떨굴 마지막 일격을 멈춘 것뿐이었다.

토칸의 몸이……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허망하다면 허망한 결과다.

재생능력의 한계.

스스로 신에게 맞서는 악신(惡神)이라 여겼던 남자는, 결국 신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잘난 듯 떠들었지만, 이것이 허망한 신의 말로다.

신을 단두대에 올리려 했지만, 올라간 것은 결국 자신이라는 신.

“하긴 실험체로서 완벽했다면 폐기되지도 않았겠지.”

토칸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고통스러운 생체실험의 나날, 어딘가의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던 날을 떠올린다.

“폐하께선 지나치게 자비로우시군요.”

“짐의 성미대로 한 것인데, 그대에게 굴욕은 아니었는지 모르겠군.”

아마 단숨에 태워버릴 수도 있었겠지. 이런 식으로 합을 맞춰준 건 그저…… 계략으로 몰아넣는 상대에게 베푼 마지막 예우였다.

토칸은 그 사실을 깨닫곤 웃었다.

“폐하의 마음대로 한 일이니 제가 거기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죠. 저는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폐하의 목을 베려 했을 뿐입니다.”

“목을 베어내는 게 더 자비롭진 않았겠나?”

“결과가 다르지 않은데 자비로운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만…… 마지막으로 생각에 잠길 시간은 주셔서 그건 좀 감사하군요.”

결투의 무대가 된 숲 곳곳에서 뱀들이 꿈틀대다가 증발한다.

토칸의 시야가 갑자기 추락한다. 다리가 없어져서 그대로 지면에 얼굴을 처박은 것이다.

이런. 하다못해 서서 죽을 수는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사치였던 건가.

-주견하.

칸발리크에서 그와 싸웠던 일을 떠올렸다.

먼 고려에 있는 그가 자신처럼 벨리사리우스라는 괴물과 직접 칼날을 맞부딪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려가 언젠가 로마와 충돌한다면, 그는…… 벨리사리우스를 당해낼 수 있을까.

직후 토칸의 머리가 무너져내렸기에, 그의 사고도 거기에서 끝났다.

신수덕은 벨리사리우스 옆에 와 섰다.

“그대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가.”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연적인 이단은 기본적으로 장수합니다만, 이런 인위적 실험체들은 몇 년 버티지 못하죠. 그래도 별다른 후속 조치 없이 홀로 세상을 떠돈 것 치고는 오래 버틴 경우입니다.”

답하면서, 신수덕은 문득 흥미로운 생각을 떠올렸다.

다이온의 카간은 어떨까. 눈앞의 아우구스투스는 또 어떨까. 그 주견하라는 놈은 또 어떻게 될까.

세상의 원리에 몸뚱어리 하나로 도전한 인간들은 알까.

원리의 조작에는 반드시 원리의 복원이라는 반동이 따른다는 것을.

그것이 원리다.

신수덕의 생각 따위는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벨리사리우스는 몸을 돌렸다. 이제 토칸의 시신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거래의 첫 단추를 끼웠군. 토칸 주멸을 구실로 일단 힘을 모았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일세.”

“황제께서 뜻하시는 대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선을 보내오는 황제에게, 신수덕은 역시나 뱀 같은 눈길로 웃어 보일 뿐이었다.

***

로마 황제와 교종의 회담은 평행선을 그리며 끝났다.

교종청 차원의 사과. 재발 방지 약속. 황제는 이 두 가지를 내세웠고, 교종은 난색을 드러냈다.

황제는 두 가지 조건 중 어느 것 하나 양보하지 않았다. 교종 역시 일방적으로 로마 제국의 요구만을 수용할 순 없다면서도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진 못했다.

“교종청은 이번 회담을 제안하며 무엇을 기대한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콘스탄티누폴리의 황실 대변인은 언론 앞에서 그렇게 비판의 서두를 뗐다.

“책임은 황실 측에 있으니, 황제께서 교종 앞에 무릎 꿇고 회개라도 하길 바란 걸까요? 하지만 우리 제국과 폐하께는 교종 앞에서 회개할 그 무엇도 없습니다.”

비판이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각지의 언론에 실린 직후, 시위가 일어났다.

교종청의 만행과 오만한 대처를 성토하는 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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