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단두대로 올려보내라(4)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겠다고? 하!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험체를 만들 것인가.
그간 황자로서 ‘비밀리에’ 실험을 해야 하니, ‘부하들의 경외심을 사야 하니’ 본인이 직접 했겠지. 위험을 무릅쓰는 도박을 하는 자신의 대담함에 감탄해가면서.
그런데 이제 당신을 견제할 형제도, 당신이 올바른 아들이라 믿어주던 아버지도 없다. 당신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당신은 이제 멋대로 행동해도 된다. 위험을 굳이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황제니까.
황제는 그래도 되니까.
대체 얼마나 많은 ‘토칸’을, 내가 겪은 고통을 만들어낼지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군, 벨리사리우스.
당신 말대로 로마 제국도 황제수권법도 도구라면, 사람은 도구로 안 삼으랴?
네놈은 또 하나의 시레문일 뿐이다, 벨리사리우스.
미리안도 루우 테무르도 그 주견하라는 광대도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똑같은 부류다.
“모든 인류가 이단이 되는 데 성공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야. 당신의 목적은 다른 데 있어. 그러니 대답할 수 없었겠지. 도저히 허세를 걷어내질 못하니까.”
당신은 ‘이단이 된 신민을 다스리고’ 싶은 거다.
구성원이 모두 이단으로 바뀌었을 뿐, 국가, 제국이라는 체제는 바뀌지 않는다. 전사들의 나라에도 왕은 있고 학자들의 나라에도 왕은 있다.
중요한 건 왕을 없애는 것이지 왕의 신민 구성을 교체하는 게 아니다.
“모두가 옛 왕이나 영웅 같은 존재가 된다 해도 거기서 또 새로운 위계가 자리 잡아. 영웅들의 왕이 탄생하고, 왕 중의 왕이 서고야 만다.”
그거야말로 우스꽝스러운 광경이다. 벨리사리우스 황제가 백성을 거느리던 것이, 벨리사리우스 신이 천사를 거느리는 것이 된다. 어설프게 날개만 그려다 붙인 꼴.
“무언가를 바꿔보려다 그 무언가가 되고 마는 인간을, 나는 수도 없이 봐 왔어.”
그건 토칸의 손으로 죽여버린 알타이 자유 공화국 통령이라는 노인네도 예외가 아니었다.
“혁명은 혁명가가 혁명을 주도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완수되는 거야.”
그러나 바로 여기서 모순이 시작된다.
의문이 혁명가를 괴롭힌다.
지금 여기서 손을 떼도 처음 의도대로 혁명이 유지될까?
혁명을 주도해 온 자신이 없어져도 혁명이 계속 작동할까?
자신을 지도자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인간들이 혁명의 성과를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그런 불안에 도저히 손을 떼지 못한다. 혁명은 미완인 채로 혁명가에게 의존하는 불완전한 무언가로 남겨진다.
바로 거기서 불안과 권력욕은 혼재한다.
“더 웃긴 건 우려가 거짓이 아니라는 거야.”
혁명가가 손을 떼자마자 예상대로, 수십 년 공을 들였던 혁명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마찬가지 이유로 벨리사리우스도 자신이 손을 떼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손을 떼지 못할 것이다.
“국가와 황실이라는 체제에 의존한 순간 이미 끝난 거다. 거기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으면 차라리 수도승이 될 일이지.”
그러므로 답은 체제 자체를 완전히 분쇄하는 완전한 혼돈에 있다.
이탈리아를 둘러싼 모든 계획을 파괴한다.
긴장도 열망도 모조리 붕괴시킨다.
그리고,
“……로마 황제 벨리사리우스를 죽인다.”
***
수상 에반겔로스는 장식품처럼 황제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도 못하고 황제와 그의 군 복무 시절 부관인 요르요스라는 남자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폐하께서 이탈리아를 방문할 것이라는 소문은 제대로 토칸의 귀에 흘러 들어간 것 같습니다.”
“가서, 이탈리아 독립운동 단체와 직접 만나본다는 ‘의미심장한 소문’도 들어갔겠지?”
“물론입니다. 토칸의 입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행보는 폐하께서 ‘이탈리아에서 보내실 일정’을 분명 염두에 둔 것입니다.”
토칸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중요한가 보다. 에반겔로스는 막연히 그렇게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수상이니 말은 보태야겠다 싶어, 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폐, 폐하…….”
에반겔로스는 벨리사리우스가 경멸해 마지않는 종류의 인간이었지만, 황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에반겔로스를 황공하게 만들었다.
“짐의 재상이여, 의견을 듣겠소.”
“영광입니다, 폐하. 하온데 이번에 이탈리아 순방에 오르시면 ‘용서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의문이 고개를 들지 않을지……”
말을 뱉어놓고서도 에반겔로스는 ‘겨, 결코 폐하의 슬픔이 가볍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황급히 덧붙인다.
벨리사리우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슬픔을 간신히 이겨낸다는 듯한 그 미소는 격노보다도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 효과를 벨리사리우스는 잘 알고 있었다.
“용서하겠다는 결론부터 내려놓고 가는 게 아니오.”
용서고 자시고 간에 모두 내가 저지른 일이지만. 오히려 교종청에서 베드로의 검 양성에 들어간 비용을 콘스탄티누폴리에 청구해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폭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아 벨리사리우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참으로 무거운 책임과 권한이 황제수권법을 통해 짐에게 주어졌소. 그러니 사사로운 감정 이전에 국가가 준 권한으로 책임을 수행해야 하지 않겠소?”
언제까지고 교종청과, 서유럽과 이런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매듭은 풀어야 한다.
그런데 그 매듭을 풀 권한은 자신에게 있다.
“교종 성하를 짐이 직접 찾아뵙는 것, 그것이 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 여겼소. 답이 되었소이까, 에반겔로스?”
“예, 예…… 친히 답을 내려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 있던 요르요스가, 보충 설명을 덧붙인다.
“사실 황궁과 교종청 간 실무자들끼리의 협상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진상 조사단을 꾸리자는 이야기부터, 일단은 교종의 유감 표명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도저히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서 말입니다.”
“아, 그건…… 그럴 수 있겠군요. 우리가 폐하의 존엄이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하듯, 저쪽도 교종 성하의 존엄 훼손이 두려울 테죠. 이해합니다.”
“그렇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아랫사람들을 배려해 양측의 최고 책임자가 나서시기로 한 겁니다. 폐하께서 직접 겸양을 표하신다면 문제 될 게 없으니까요. 그리고 황제께서 직접 나서시는 정도는 되어야, 교종께서도 체면이 서실 테고 상황 수습에 진전이 있겠지요.”
에반겔로스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석연찮음이 떠나지 않는다.
토칸은 대체 뭐지? 왜 그에게 어떤 정보를 ‘흘릴’ 필요가 있는 거지?
“마냥 우호적인 분위기로 대화가 이루어지진 않을 겁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참극을 용서하신 것은 아니니까요.”
에반겔로스의 머릿속 의문을 읽고 답하기라도 하는 듯한 말. 이 제국의 ‘얌전한 수상’은 당황한 나머지 폐하의 뜻이 무조건 따르겠다는 듯, 요르요스가 얼마나 가까운 충복인지 믿는다는 듯 고개를 잔뜩 내밀고 경청했다.
경청하고 있다는 태도를 열심히 내보이며.
“요컨대, ‘교종청이 폐하의 방문을 계기로 어물쩍 이 사태를 넘기려 든다면 우리도 생각이 있다’고 위협할만한 수단을 갖춰야 합니다.”
“그대를 이 자리에 부른 것은 그 점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심상치 않은 말이 나왔다.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어 질문을 던지고야 만다.
“위협할만한 수단이라고 하신다면……?”
답은 요르요스의 입에서 나왔다.
“이탈리아 전역의 봉기, 그리고 봉기군을 향한 우리 로마 제국의 지원입니다.”
에반겔로스는 자기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말았다.
“저, 저, 전쟁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까? 신성 제국과? 교종청만 상대해도 될 문제를 신성 제국까지…… 두 제국 간 전면전으로 치달을 일로 확대할 필요가 대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떠들다, 벨리사리우스와 요르요스의 조용한 응시에 그만 에반겔로스는 ‘죄, 죄송합니다’라며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수상께서 당황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로마 제국의 안보를 책임지시는 분께 상의도 없이 황궁 독단으로 이런 계획을 꾸미게 되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아, 아니, 아닙니다. 감히 제가…….”
“하지만 지나치게 우려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위협 수단’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는 거니까요. 우리의 강경한 목소리에 힘을 보태줄 따름입니다. 게다가 말씀하신 대로 이 문제는 로마 황궁과 교종청만의 문제지 신성 제국까지 말려들게 할 문제는 아니니까요.”
에반겔로스의 당황은 ‘전쟁 가능성’에서도 기인하지만, 교종청과 신성 제국 간 특수한 관계에서도 비롯되었다.
교종청은 지금 상태를 ‘바티카누스 언덕의 포로’라 자조적으로 부른다. 교종청을 이루는 대성당 및 바티카누스 언덕 주변의 시가지 일부만이 교종청의 행정력이 실제로 미치는 범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성 제국은 중세 교종령이 보유한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훨씬 넓은 영토를 명목상으로는 인정해준다. 그러나 실질적인 행정은 신성 제국 정부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에반겔로스의 말은 ‘그것이 협박으로 성립하는가?’라는 의문이다.
실질적으로 북부 이탈리아의 통치권은 신성 제국에 있는데, 왜 바티카누스 언덕 하나만 간신히 유지하는 교종청을 이탈리아 봉기로 협박하는가?
“교종청은 보나파르트 황조의 성립과 동시에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배후였소. 그리고 짐은 비밀리에 그러한 운동을 지원하면서 주도권을 두고 교종청과 경쟁 관계에 있었지.”
“그, 그러신 줄은 꿈에도……”
아니, 로마 황제가 신성 제국의 배후에서 독립운동 공작을 벌였다는 것 자체로 큰 문제 아닌가. 그러나 에반겔로스는 감히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진 못한다.
“이탈리아인들이 봉기하고 로마가 이를 지원하겠다는 말은 곧 그 주도권을 짐이 가져오겠다는 뜻이오. 그러면 교종은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할 거요. 뿐만 아니라 신성 제국이 그간 교종청이 배후에서 무슨 짓을 꾸몄는지 알게 될 텐데, 입장이 참 곤란해지지 않겠소?”
아마 지금의 ‘바티카누스 언덕의 포로’ 신세보다 더한 가혹함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프랑스 왕이 아비뇽으로 교종을 납치하고 나폴레옹 1세가 교종의 손에서 제관을 낚아채 스스로 머리에 썼던 것보다 더.
그런가.
토칸이라는 사람은 이 공작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구나.
에반겔로스는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간신히, 마지막으로 이런 걱정을 벨리사리우스와 요르요스에게 전했다.
“정말로, 전쟁의 가능성은 없는 것이지요……?”
벨리사리우스는 참으로 황공하게도, 황제의 손으로 직접 에반겔로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는 짐의 재상으로 남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