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단두대로 올려보내라(3)
“다이온 구성국들에 대한 ‘신용’ 때문에라도 미리안은 아슬란의 요구를 거절해야만 하지.”
하지만 파행 직전까지 갔던 회담은, 이후 미리안이 몇 가지 제안을 들고 오면서 간신히 정상 궤도로 복귀했다.
-망명 버마 왕족을 제3국, 이를테면 일본이나 잉카, 혹은 유럽 국가로 보내겠다.
-티베트는 영구 중립국으로 둔다. 고려식 개혁에 대한 지원도 중단하겠지만, 바라트의 혁명 시도도 중단해 달라.
-알티샤흐르의 티무르 황족을 동명으로 옮기겠다. 대신 알티샤흐르의 다이온 연방 가입을 인정해달라.
-볼로드가 진행하던 서남방 교역도 재개하겠다.
“그런 양보가 통했다면, 바라트와 아슬란 주석도 생각보다 유연한 대응을 보여 준 게 아닐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만 따지면 그렇겠네만, 첩보에 따르면 이면의 거래가 있는 모양일세.”
“이면의 거래라면……?”
“‘볼로드가 진행하던 서남방 교역’은 단순한 무역이 아니었다는 말이네. 바라트로부터 들어오는 열차에는 다이온에서 팔 상품이 아니라, 무기와 군인을 싣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무기와 군인을? 아무리 바라트와 고려가 밀월 관계라도 대체 그 정도의 군사 협력을 해야 할 이유가……?”
“열차는 다이온 내륙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고려의 항구로 간다는군. 그 항구에선 극북 방향으로 떠나는 선박으로 ‘화물들’을 옮겨 싣고.”
벨리사리우스의 말을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요르요스는 어떤 사태가 진행 중인지 이해했다.
“바라트가 아즈텍 내전의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는 걸 묵인한다는 말입니까!”
“구연방을 무너뜨리고 아즈텍 대륙의 패권을 거머쥘 기세였던 멕시카가 주춤하는 데에는 바로 이런 요소가 작용한 것 같네.”
게레센제, 울제이, 루우 테무르의 다툼이 있던 몇 개월간은 그런 지원이 끊겼지만, 미리안과 아슬란 사이에 협약이 맺어졌으니 지원이 재개될 것이다.
“풍군작전이 진행되는 동안엔 멕시카가 호데노쇼니 쪽 전선을 꽤 밀어낸 것 같네만, 다시 내전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겠지. 동쪽의 신연방 전선 쪽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폐하께선 내전에서 누가 이길지 아직 알 수 없다고 보십니까?”
벨리사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승자는 결국 멕시카 자주국이 될 걸세. 호데노쇼니나 아즈텍 신연방이 그들의 병기에 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이번에는 요르요스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고려 태사는 어쩌면 폐하와 같은 예측을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녀도 같은 예측을 했다면 바라트의 지원을 내버려 둬도 상관없다고 여겼겠지.”
“그리고…… 잔혹한 이야기입니다만 아즈텍 내전의 장기화는 고려에게도 강대국으로 자리 잡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고려에게도’란 말은, 당연히 로마 제국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를 전제한다.
“아즈텍 내전의 장기화가 세계 경제에는 분명 악영향을 끼치겠지. 하지만 초강대국 아즈텍이 추락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들의 운신 폭은 넓어졌네.”
고려는 극동에서 마음껏 다이온 연방을 주무를 수 있었고,
로마 제국은 이제 이탈리아를 노려본다.
“멕시카 지주국만 수렁에 빠진 게 아니라는 말이지.”
전쟁에는 상대가 있다.
즉 전쟁 당사자 중 누군가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는 말은 상대도 교착 상태에서 어쩌질 못한다는 말.
“이 내전에는 아즈텍 대륙의 세 집단만 얽힌 게 아니야. 바라트도 호데노쇼니를 지원하면서 국력 누출이 있고, 유럽에선 브리튼, 에스파냐, 칼마르, 신성 제국에 에이레나 프로이센에 이르기까지 신연방을 지원하느라 발이 묶였네.”
어떤 이들은 귀중한 실전 경험을 얻는다고도 하겠지만, 그런 경험은 공짜가 아니다. 사람이 죽고, 돈이 들어간다.
게다가 내전에 개입 중인 유럽 각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선 ‘대체 우리가 왜 희생해야 하느냐’는 불만이 높아간다.
북이탈리아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왜 우리가 프랑스인들의 제국을 위해 피 흘려야 하는가?
“실제로 이탈리아 독립운동 단체에는 최근 ‘징병 거부자’들의 가입이 늘었다더군. 엑스라샤펠의 프랑스인 궁정에도 불만이 많지만, 이런 단체들이 징병 거부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주는 모양이야.”
“싸운다 해도 프랑스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포 이탈리아인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겠다, 그런 기분일 테지요.”
“우리가 이용해야 할 감정은 바로 그 지점일세. 동포 ‘이탈리아인’의 자리에 슬쩍, ‘로마인’을 끼워 넣는 것.”
로마인 내셔널리즘.
“교종청의 막대한 종교적 영향력까지 배제하려면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네.”
이것이 로마 황제가 바라트에서 아즈텍 대륙에 걸친 정세를 면밀히 살펴본 이유이다.
극동에서 미리안과 조유관이 바라트와 일본, 아즈텍의 정세를 논하는 것처럼,
콘스탄티누폴리에선 벨리사리우스와 요르요스가 정세를 논하고 있었다.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 국제 정세에 어떻게 적응할지를 고민하며.
***
“왕이 소탈하다고 해서 왕의 사고에서 자유로우리라 기대해선 안 돼.”
벨리사리우스와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토칸이 부하들에게 한 말이었다.
“대장……?”
물론 갑자기 적대감을 담아 뇌까리는 그의 말이 당장 이해되지는 않았기에, 부하들은 의아한 얼굴로 토칸을 바라봤다.
“신민을 염려하고 어쩌고 잘난 듯이 떠들어대지만, 벨리사리우스도 똑같다는 말이다. 시레문과 그 동생들이나 딸과 다를 바 없어.”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토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부하들에게 어떤 식으로 답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토칸이 품은 생각을 여과 없이 이야기해준다면 그들은 분명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지금껏 그들이 ‘토칸과 공유한다고 믿었던 이상’에 맞춰 이야기해줘야 한다.
“황제가 우리를 연민해 망명을 받아줬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카간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야.”
부하들의 얼굴이 굳는다.
“벨리사리우스 황제가 우리의 몽골 귀국이나, 자유 공화국의 부활을 돕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지금까지 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라는 태도더군.”
부하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망설이다가 한 명이 다시 묻는다.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대장.”
“……떠나야지. 하지만 떠나기 전에, 로마의 군주에게 교훈 하나는 알려주고 떠나야겠어.”
***
이탈리아 국경을 넘으며, 토칸은 생각에 잠겼다.
대단한 사고라고 할 것도 아니다. 그가 할 생각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저 자신에게 다짐을 들려주듯, 반복하는 생각.
왜 토칸은 벨리사리우스의 앞을 가로막아야만 하는가, 그 이유를 되새기는 생각.
벨리사리우스의 이탈리아 개입은 분명 유럽의 지배 질서를 혼돈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아마도 여러 고귀하신 왕가가 몰락하겠지. 그 정도로 엄청난 혼돈이 대륙을 부수리라.
프랑스 공화국의 이상을 배신하고 황제가 된 보나파르트부터.
하지만 하나의 왕가가 몰락한다고 해서 반드시 ‘왕가가 없는 체제’가 들어서진 않는다.
왕가는 왕가를 패퇴시키긴 해도, ‘왕가 없는 세상’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제국은 정복을 통해 자신이 패배자의 통치자가 되든지, 아니면 제후를 봉하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적당히 조약을 맺고 상대방의 체제가 유지되도록 배려해준다.
이탈리아의 운명도 이와 같다.
보나파르트가 물러난 자리에 류리크-팔레올로고스가 들어서서 그들의 군주가 될 것이다.
질서는 잠깐의 혼돈을 거쳐 다른 질서로 대체된다.
신성 제국과 로마 제국의 균형으로 이루어지던 질서가 로마 제국의 압도적 우위로 이루어지는 질서로 바뀔 뿐.
국경선이 이탈리아의 중부에서 알프스까지 올라오는 정도의 변화.
그런 변화는 본질적인 변화라고 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나쁘다.
“황제수권법.”
그걸로 입헌군주제라는 가식마저 끝장났다.
벨리사리우스는 이제 몽골 카간이 쿠릴타이의 눈치를 보는 것만큼도 자국 의회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최소한 보나파르트 황실도 ‘자유 제국’이라는 허상이나마 내세우는데, 벨리사리우스에겐 그것도 없다.
미리안이라는 독재자가 황제를 견제하고 제국최고회의의 동의를 얻으려 동분서주하는 고려보다도 못하다.
“신의 은총을 받는 황제의 통치. 신의 통치라고 착각하는 민중의 박수를 받으며 벨리사리우스는 정말 신이라도 된 양 통치하겠지.”
그러니 벨리사리우스가 몰고 올 혼돈이 얼마나 크든, 그것은 과정에 불과하기에 의미가 없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리라.
-전쟁이 벌어진다면 신성 제국만 피해를 입겠는가? 신성 제국은 강대국이다. 당연히 로마 제국도 상응하는 피해를 입지 않겠는가?
그렇지.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이 있다.
이기긴 했는데 상처가 너무 심해 승리의 의미가 퇴색하고 말았다는 교훈. 그래서 승리는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도 중요하다는 교훈.
그러나 피로스의 승리를 입에 담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
감히 피로스의 앞을 막아선 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피로스의 승리를 거둔 승리자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가.
패배자의 시체가 있을 뿐이다.
승자는 상처투성이어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패배자는 승자에게 많은 상처를 입혔어도 죽고 말았다.
이것은 절대로 뒤집을 수 없을 크나큰 격차다.
상처는 결국 낫는다. 나을 수 없는 상처라면 끌어안고 살아가는 데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벨리사리우스의 승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바꾸리라. 누구도 감히 그가 만들어낸 보다 악랄하고 굳건한 질서를 흔들 순 없으리라.
절대로 그가 승리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는 ‘자신을 실험체로 삼았지’. 하지만 벨리사리우스가 앞으로도 그럴까?”
토칸은 믿지 않았다. 벨리사리우스의 소탈함도, 책임감도, 이상도.
“벨리사리우스는 겉으로는 모든 인간의 이단화니 뭐니 떠들고 있다. 그게 뭐, 진심일 수도 있지.”
그러나 본인조차 깨닫지 못하는 진심도 있다.
벨리사리우스 황제는 국가를 더 큰 이상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고 한다. 황제수권법 또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다.
“당신이 놓는 게 아니야. 권력이 놓아주질 않는 거다, 벨리사리우스.”
인간다운 감정은 진즉에 초탈했다고 자부하겠지. 하지만 토칸의 눈에는 분명 절대권력을 향한 황제의 집착이 보였다.
“신이라 자처하는 우스꽝스러운 인간, 혹은 인간 같은 습관이 있는 우스꽝스러운 신, 둘 중 하나가 되고 말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