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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49화 (449/541)

신을 단두대로 올려보내라(2)

“자신도 안 믿는 말은 말게, 토칸. 신수덕은 숨이 꺼지기 직전까지 고려로 돌아갈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걸세.”

토칸은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은 벨리사리우스도 볼 수 있음을 확인했다.

“……고려로 돌아갔겠습니까, 설마?”

“짐은 그가 언젠가는 고려로 돌아가리라 생각하지만, 시기상조라고도 생각하네. 하지만 신수덕의 계산은 보통 사람의 발상을 뛰어넘는 부분이 있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자살 같은 행동일지라도 신수덕은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일 걸세.”

“신수덕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곧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거나, 고려가 다시 한번 뒤집혔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둘 중 하나겠군요.”

토칸의 말을 들은 벨리사리우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절대 경박한 성격은 아니지만, 토칸은 황제가 이런 식으로 침묵하는 건 처음 보았다.

분노일까.

계획이 어그러진다는 못마땅함일까.

아니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겠다는 흥미로움일까.

다 아니라면 지금 황제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드는 자신이 재미있어 보인다는 걸까.

“욕심일 수 있네만 짐은 고려의 상황이 안정되길 바라네.”

그 말은 신수덕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같다.

“고려와 바라트 간 정상회담의 성과는 그리 대단치 않았지. 하지만 공산권과 비공산권의 지도자, 도저히 한자리에 모일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인물이 환담하는 사진만으로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네.”

“요컨대 동방에서 그런 ‘상징적 행위’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고려의 역할은 크다는 말씀이시군요.”

“어쨌든 두 강국이 ‘충돌은 피해야만 한다’는 원론적인 의견에 합의한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상당하네.”

토칸은 도발하듯, 말을 툭 던져본다.

“폐하께서도 세계정세의 ‘혼란’을 바라시는 줄로 알았습니다만.”

옆에 앉아 있던 요르요스가 말없이 눈을 부릅뜬다. 그런 반응은 예상했으니 위축될 토칸이 아니다. 요르요스는 무시하고 벨리사리우스의 얼굴을 쏘아보듯, 정면으로 응시한다.

황제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짐이 과연 어디까지 진실을 말해주어야 할까.”

“가능한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만, 어떤 말씀을 하셔도 해석은 저의 몫이겠죠.”

“……짐이 이탈리아를 노리는 것은 굳이 속일 필요도 없겠지.”

동기를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교종청에 의한 형제들의 죽음은 아마 구실에 불과하겠지. 설령 복수심이 동기의 일부라 하더라도 벨리사리우스 개인의 야심은 분명하다.

“이탈리아를 노리려면 로마의 후방이 안정되어야 한다?”

“다이온과 바라트…… 아니 이제는 ‘세계혁명연합’이라 해야겠지. 두 세력의 평화가 깨진다면 공산권과 국경을 맞댄 우리는 어떻겠는가?”

“안 그래도 아라비아 사막 국경지대에 들어가는 방위비가 만만치 않으니 말이죠.”

“식민지를 포기할 수도 없고,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칼리프 체제를 반드시 파괴해야겠다는 선황의 의지를 원망할 수도 없지. 동쪽으로 길게 튀어나온 메소포타미아, 그 국경은 로마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일세.”

“하지만 같은 짐이라도 가볍길 바라시겠지요?”

“이탈리아 문제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선 지금 이상의 비용이 동방 국경이나 루스계 공국들과의 집단 안보에 나가서는 안 되네.”

고려에 패배해서 여기까지 온 자네에겐 안 된 말이지만, 이라며 벨리사리우스는 말을 이었다.

“짐이 원하는 혼란을 위해선 고려가 만든 다이온 체제가 더욱 굳건해져야 한다.”

혼란을 원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다른 한편으로 어딘가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아이러니하지만 이것은 이중전선을 방지한다는 전략적 사고이기도 하다.

“폐하께서 이탈리아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내 궁극적 목적은 전에 말한 바 있지 않나?”

“그 궁극적 목표와 이탈리아로의 확장이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인류의 비약.

그것이 아무리 봐도 보통의 영토확장 야욕으로 보이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설명은 여기까지 하지.”

답을 들을 순 없는 건가.

“그대는 분명 짐의 빈객이고, 여기에 망명해 있는 동안엔 짐의 명예를 걸고 대우를 약속해 줄 수 있네. 하지만 짐의 ‘계획’의 깊숙한 곳까지 내보일 수는 없지. 무엇보다도……”

자네 역시, 신수덕처럼 전혀 속을 내보이지 않아. 그런 단호한 말로 벨리사리우스는 대화를 끊었다.

딱히 화기애애하지 않았던 대화는 이걸로 끝이었다.

토칸은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 황제 앞에서 물러났다.

***

“이것저것 찔러봤지만, 신수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것 같군.”

벨리사리우스가 그렇게 의견을 말하자, 그때까지 침묵하던 요르요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마 그 두 사람도 서로를 믿지 않았을 테니까요.”

“같은 처지의 망명객끼리 속내를 좀 터놓았으리라는 건 지나치게 낭만적인 생각이었나…….”

“그들을 망명에 이르게 한 상황들, 그 입장 차이가 일정 이상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했을 겁니다.”

“신수덕의 움직임은 계속 추적하게. 토칸 앞에서는 그가 이런저런 나라에는 가지 않았으리라 예측했지만, 당연히 예측이 틀렸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겠지.”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이라면 갑자기 바라트로 향할 수도 있습니다.”

“안 할 것이다, 라고 예측하는 일을 해내고 마는 인간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네.”

고려와 바라트의 협력 관계를 생각해보면, 고려인 사업가로 위장해서 바라트에 입국할 수도.

“모두가 서로에게 감춘 속내가 있다는 건 알지만 그게 뭔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재미있지만 좀 답답하군.”

“사람 마음속까지 읽어낼 수 있다면 세상일에 힘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리고……”

토칸은, 어떻게? 라고 요르요스는 물었다.

“감시는 계속하되, 행동 자체는 막지 말게. 아니, 오히려 이쪽의 행보가 그의 눈과 귀에 마음껏 들어가도록 해두게.”

요르요스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진다.

“괜찮겠습니까. 토칸의 위험성을 생각하면……”

“답답함은 짐만 느끼는 게 아닐 테지. 토칸도 짐의 속내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할 것이야. 구체적으로 뭘 생각하고 꾸미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짐작할 수는 있는 ‘정보’가 계속 주어진다.”

벨리사리우스의 입가에 씩, 웃음이 떠오른다.

“억측이 만들어지기엔 최적의 환경이 아닌가.”

“토칸의 실수를 유도하시겠다는 말씀이신지.”

“그가 단단히 착각하고 일을 벌이면 우리야 힘들이지 않고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할 수 있지.”

“그렇다면 부디…… ‘지나치게 위험해졌을 때’는 처분할 수 있는 허락을.”

벨리사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짐이 직접 처분한다. 일반인은 물론이거니와 이단에게도 위험한 남자야.”

토칸에 대해서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황제는 사고를 전환했다.

아까 토칸에게도 이야기했던 고려와 바라트의 정상회담.

가시적인 성과는 없다. 둘 사이에 어떤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져 관계가 크게 진전한 건 아니다.

기껏해야 세력권의 재확인.

반혁명의 방지.

양국 간 육로 교역의 재개. 특히 대원철도주식회사가 주도하는 바라트-다이온 철도 대사업.

“바라트 쪽에서 단순히 반혁명을 방지해달라고 한 게 아니라, 버마의 망명 왕조와 그 추종자들을 넘겨서 확실한 안전을 보장해달라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

“대단히 난감한 요청이군요. 진심으로 했답니까?”

“공산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와 달라서 그게 진심인지 아니면 다른 요구를 내놓기 전에 먼저 높게 부르는 가격인지 알 수가 없네.”

외교 무대에서 서로 허세를 부리며 신경전을 벌이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러면서 서로의 강점과 약점, 진정으로 원하는 바와 조율 가능성을 따져보며 의견 차이를 좁혀 나간다.

이러한 협상 과정은 역사와 함께 쌓여 외교관들만의 독자적인 관습이 되었다.

밖에서 보기엔 말을 빙빙 돌리고 일관성이 없으며, 속임수가 난무하는 것만 같지만 실제로는 그 관습에 따라 무척 솔직한 이야기가 오가는 분야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관습을 ‘귀족들의 허례허식’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들은 구시대적 방식의 외교는 집어치우자며 허례허식을 걷어치운,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로 외교에 임했다.

기본적으로 그들이 외국을 바라보는 관점은 ‘혁명의 적’, ‘혁명 전략상 잠시 손잡은 상대’. 이렇게 둘 중 하나다.

자기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혁명으로 모조리 단두대에 올려버리겠다며 욕설을 퍼붓는다. 우호적인 태도로 잘 달래놓아도 ‘언젠가 당신네 나라에도 혁명을……’ 따위의 태도를 취한다.

바라트의 쇄국정책은 자의이기도 하지만 타의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도 최근엔 자신감이 붙은 건지, 아니면 아슬란 주석의 노선이 변한 건지 상당히 태도가 부드러워지지 않았습니까.”

“그게 변화의 신호였으면 좋겠지만, 막상 본격적인 협상 자리에 들어가니 아니었던 모양이네.”

-대예로 망명한 버마의 왕족들을 바라트로 보내달라.

아슬란이 대뜸 던진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고려 태사 미리안은 한참 눈만 깜박거렸다고 한다.

-이념에 무관하게 다이온의 날개 안으로 피신한 사람들이다. 다이온은 망명객의 안전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바라트로 보내달라는 건 어떤 의도인가?

-버마가 아닌 바라트에서 보호할 것이다.

-버마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혁명군에 체포된 왕족 및 구체제 인사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의 안전이 확인되지 않으면 우리는 망명객의 의사를 거스르면서까지 바라트로 보낼 수는 없다.

-바라트로 보내지 않겠다는 말은 대예가 반혁명을 지원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엄연히 다이온의 구성국인 대예에 군사행동이라도 나서겠다는 건가? 고려도 몽골도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도 반혁명 반동 세력을 지원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대충 이런 식으로 대화가 오가는 진행되는 바람에, 미리안과 아슬란의 정상회담은 파행 직전까지 몰렸던 모양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조여 오는 것 같군요.”

“그렇지. 짐이라면 인도양에 함대를 보내 무력시위라도 했을 걸세. 아니 애초에 그런 무모한 정상회담을 시도하진 않았겠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요구다. 손님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고대나 중세만의 규칙이 아니다. 인류가 두 발 딛고 여행을 시작한 이래 가장 작은 촌락부터 제국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신의 위신을 걸고 지켜 온 규칙이다.

고려, 그리고 다이온더러 위신을 내팽개치라는 요구.

무력으로 승리를 거두고 그 무력에 의해 주변국을 다이온 체제에 편입한 나라지만, 그 무력으로 지켜준다는 최소한의 위신이 있기에 다이온이라는 틀이 유지된다.

국제 외교는 힘 있는 자가 정의가 되는 게 아니라, 힘 있는 자에게 이권을 보장해주면 힘을 써 주리라는 최소한의 정의로 움직인다.

이 둘을 혼동하거나 어설프게 ‘힘의 논리가 현실’이라는 식으로 유치한 판단을 내리면 국제 외교는 반드시 대가를 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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