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단두대로 올려보내라(1)
“하직 인사도 없이 떠나다니 서운하군.”
토칸은 웬만해선 누군가와의 대면을 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보통은 자신이 면목 없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말끝조차 흐리지 않았다.
상대가 권력자라면 더더욱.
하지만 오늘만큼은 토칸도 벨리사리우스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다 알고 있는데 던지는 저 말.
토칸 너도 신수덕이 이렇게 훌쩍 떠나리라는 건 알고 있지 않았냐는 듯한 눈길.
벨리사리우스는 지난 몇 달 새 사뭇 달라졌다. 마치 그들이 있는 이 방 안의 공기가 전부 벨리사리우스의 안구로 변해 토칸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 정도의 압박감을 뿜어낸다.
지금이라도 신수덕의 잘린 목을 바닥에 굴리며 ‘이제 네 차례’라고 말할 것만 같다.
그러나 로마 황제가 죽음을 들먹이며 협박하더라도, 권력자의 위엄에 몸을 굽히는 건 토칸의 성미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토칸에게는 죽음과도 같다.
몸의 죽음, 혹은 정신의 죽음. 두 가지 죽음 중 하나를 택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토칸은 손쉽게 능청스러운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지구를 반 바퀴나 돈 것으로는 부족해 또 어떤 망명지를 찾아갔는지.”
“망명자는 고향을 잃은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자네도 동병상련을 느끼나?”
“글쎄요. 같은 망명객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고향을 대하는 태도에서 신수덕과 저는 판이해서…….”
토칸은 딱히 몽골이라는 나라나 땅에 대한 애정은 없다. 그가 굳이 애정을 품는다면 망명지까지 따라온 부하들, 그가 지켜야 했으나 그러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신수덕은 그 반대다. 그도 전우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은 있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한 감정은 철저히 메말라 있다.
그보다는 허동주가 내세운 이상에 경도된 나머지 고려라는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개념’에 애정을 품는다.
그렇기에 토칸은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상실감을 크게 느끼진 않았다. 굳이 돌아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할 일은 있으니까.
사람들을 상대로.
군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든,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군주와 그 졸개들이든.
하지만 신수덕은 아니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고려라는 땅, 고려라는 국가, 고려라는 민족에 있었다.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토칸은 신수덕의 말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고려로 복귀한다는 야망을 읽을 수 있었다.
고려 내 천손민족협회 동조자들이 일으킨 쿠데타든, 혹은 허동주의 이상에 공감하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난 결과로 복귀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사내는 가는 곳마다 피를 뿌려댄다는 점에서는 독보적이지.”
벨리사리우스의 관점에선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로마에 오기 전에 그는 아즈텍 연방에 있었지. 거기서 ‘철혈의 꽃’…… 지금의 멕시카 자주국 정부를 구성하는 집단과 함께 있었고.”
“저도 그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청하면 입을 다물어버리더군요.”
파핫, 하고 벨리사리우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자세히 이야기해서 뭐 하겠나? 철혈의 꽃에서 무슨 기여를 했고, 마침내 아즈텍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유럽으로 왔노라고 자랑이라도 해야 했겠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토칸은 웃음기 서린 벨리사리우스의 말에 숨은 진의를 파악하려고 머리를 굴린다.
이렇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다가 돌연, 자신의 처분을 명령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때는 토칸도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그도 나름 강력하다 자부하는 이단. 벨리사리우스와의 승부는 가늠할 수 없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발악은 해볼 수 있겠지.
변수가 있다면, 아까부터 같은 방 안에서 말없이 앉아만 있는 벨리사리우스의 최측근 요르요스.
저 남자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얼마만큼 강한지, 꽤 오래 로마 제국에 머물렀던 토칸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과묵한 정도로만 따지면 부관으로는 최적의 인물이다.
필요한 말만 해주는 사람. 괜한 수다로 듣는 이의 정신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사람. 저런 사람의 진지한 도움을 받는다면 자잘한 일은 신경 쓰지 않고 큰 줄기만 잡아나가도 웬만한 일은 걱정이 없다.
게다가 저런 사람이 보통은 강하다.
벨리사리우스는 토칸의 잡념이 쓸데없는 것이라 말하듯,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 동작은 방금 본인이 던진 말에 대한 답이다.
“신수덕은 그럴 성격도 아니거니와 그 일은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지.”
“폐하께선 아즈텍 내전에 신수덕이 깊이 관여했으리라 여기십니까?”
새삼스러운 질문을 받는다는 듯 벨리사리우스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저 보라색 눈동자 역시 지금 토칸의 진의를 훑고 있다.
“우리도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다네. 신수덕이 입 꾹 닫고 한마디도 하지 않더라도, 아즈텍 내전이 흘러가는 걸 보면 그의 개입은 생각보다 명확하지 않은가.”
고려, 동명역 전투에서 처음 선보였던 신병기 기갑사가, 아즈텍 내전의 전장에도 출현했다.
몽골 내전에서도 나타났다지만 이건 서로 국경을 맞댄 국가다 보니 꼭 신수덕이 아니어도 어떤 식으로든 유출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멕시카 자주국이라 자처하는 자들에게 흘러간 건…… 그 집단 안에 스며들어 간 고려인이 딱 한 사람 있다는 점에서 신수덕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더 경악할만한 일은 파멸인을 전장에 병기로 내보냈다는 걸세.”
구 연방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파멸인의 공세.
자국군의 시체마저도 재활용한 잔혹한…… 그러나 매우 효율이 좋은 공격.
“파멸인의 특성상 원시적인 근접 공격밖에 기대할 수 없지만, 백병전 같은 상황에서 죽은 자로 만든 파멸인은 병사 여럿을 도륙 낼 수 있네.”
그렇기에 동쪽의 신연방과 북쪽의 인민공화국은 포격을 비롯한 원거리 화기로 대응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애초에 멕시카 측에선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병사들을 돌진시키고, 또 그런 돌진에 전선 일부나마 뚫리고 마는 게 전쟁이다.
“성공적으로 적의 접근을 저지한다 해도, 시체가 전장에 남아있는 이상 언제 파멸인화할지 모르기에 전진할 수가 없지. 적이 치워주기를 기다리든지, 아니면 시체조차 남지 않을 지경이 되도록 포격을 퍼붓든지 해야 하네.”
전자는 시간을 낭비하고, 후자는 포격에 들어가는 비용을 낭비한다.
“또한 이런 방식의 전쟁이 계속되면 멕시카 자주국의 적들은 이겨도 전진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전선을 물려야만 하네. 무척 부조리한 전쟁이지.”
신수덕이 정말 파멸인 관련 기술을 멕시카 자주국에 넘겼다면 그는 전쟁 자체의 양상을 바꾼 셈이다. 그렇게 벨리사리우스는 덧붙였다.
“더 무서운 점은 아즈텍 내전에서 상당히 많은 파멸인이 생성되었음에도 ‘칸발리크 사태’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세. 혁세주의 출현이 없었단 말이야. 우연일까, 아니면 신수덕은 뭔가를 더 알고 있는 걸까.”
벨리사리우스는 입 밖으로 내놓진 않았지만, 분명 신수덕의 머리에 위험한 지식이 들었으리라 확신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점은 토칸도 동의하는 바였다.
“국제정세를 무대로 삼는 이들 중에 위험하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마는, 신수덕은 특히 위험한 사내네. 구체적으로는,”
말을 끌면서, 벨리사리우스는 보랏빛 눈동자를 빛냈다.
“자신의 망명지를 실험실로 삼는다는 점 때문에 말일세.”
“……로마 제국 어딘가에도, 신수덕이 뭔가 수작을 부렸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신수덕은 아즈텍 내전 발발 직전에 이미 멕시카 자주국의 영토를 떠났고, 발발 직후 동부 신연방 영토에서 유럽행 배에 올랐지. 행보를 보면 그쪽에서 할 일은 다 끝나고, 밖에서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것 아니겠나.”
“이번에 로마 제국을 떠난 것도 로마 밖에서 자신이 벌인 일의 ‘결과를 지켜보기 위함’이다……?”
“짐은 그렇게 보네만.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몸의 근육이 긴장으로 경직된다.
분명 토칸은 로마 제국에 와서 가만히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신성 제국의 수도 엑스라샤펠에서 여러 가지 일을 꾸몄다. 언제라도 ‘발동’할 수 있도록.
벨리사리우스의 말은 그가 토칸의 행보를 쭉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그런 일들이 신수덕과 함께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 말이다.
너는 신수덕이 로마 제국에 남기고 간 ‘눈’이 아니냐고.
그러나 변명하듯 부정하고 싶진 않다.
“글쎄요. 방금 말씀드렸습니다만 저와 신수덕은 성향이 꽤 달라서.”
“하긴 자네가 뿌리는 피의 종류는 조금 다르지.”
무슨 의미일까. 신수덕과 결탁해 로마 제국에 해가 되는 일을 한 것은 아니라 믿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말로 자신을 갖고 놀 뿐인가.
“그가 하는 실험은 자네를 염두에 둔 실험이 아니니까. 신수덕 쪽에서 보기엔 자네의 이단 능력이 아무리 특이하다 해도 그다지 주목할만한 성질의 것은 아닐 걸세.”
“신수덕의 지식은 고려에서 연구된 것이고, 저는 몽골의 연구 성과이기 때문이죠.”
“비단 그것만은 아닐세. 말했지 않은가. 신수덕의 영향을 받은 아즈텍에서는 ‘혁세주가 출현하지 않았다’고.”
뭔가 대답하려다, 토칸은 입을 다물었다.
벨리사리우스의 말은 마치…… 혁세주가 출현한 사태, 즉 칸발리크 사태에 토칸이 관련되어 있다고 확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
혁세주가 나타나는 쪽과 나타나지 않는 쪽, 양측의 성질은 다르다고.
고려와 몽골은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서 칸발리크 사태가 알타이 자유 공화국, 그 배후의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소행이라 알렸다.
토칸은 그 범 알타이 인민동맹 소속이었다.
그러니 토칸이 칸발리크 사태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토칸은 덜컥 인정하진 않았다. ‘같은 집단에 소속되었을 뿐 그 사건과는 무관하다’라는, 참으로 궁색하기 짝이 없는 입장을 유지한다.
“어쩌면 신수덕의 실험은 아즈텍에서 이미 다 마쳤을지도 모르지. 우리는 진즉에 신수덕을 의심해 이런저런 감시를 해왔지만 별다른 점은 발견하지 못했네.”
즉 토칸 역시 감시망에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안심되기보다는 아쉽더군. 뭐라도 했다면 우리도 귀중한 정보를 얻었을 텐데, 생각 이상으로 조용히 있다가 떠났어.”
그야 그럴 수밖에. 벨리사리우스가 이렇게 신수덕을 경계하는 것처럼, 신수덕도 떠나기 직전에 벨리사리우스를 극도로 경계했었다.
“어디로 갔는지 알면 신수덕이 대체 무슨 생각을 품었는지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망명지 후보는 좁혀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디로 갔겠는가? 무타파? 에티오피아? 아니면 우리가 봉쇄한 아라비아? 아라비아가 과연 이교도 망명자를 받아줄지는 의문이군.”
“모든 야심을 버리고 어디 평화로운 섬 휴양지나 봉래 같은 곳에 갔을 수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