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군연합(12)
이미 그렇게 결정되었으니 더 이상의 우려를 덧붙이는 건 소용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리안이 아슬란을 만나 정상회담을 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다.
“호데노쇼니 인민공화국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효윤이 네가 이번에 극북방위군 사령부에 좀 다녀와야겠어. 원철 책임자들이랑 같이.”
“네? 극북이요?”
“단단히 챙겨입고 가. 기존 고려령 극북뿐만 아니라 몽골령 극북까지 시찰하고 와야 하니까.”
극북방위군 시찰, 대원철도주식회사…… 두 단어를 늘어놓은 것만으로도 상황이 썩 좋지 않게 돌아간다는 느낌이 난다.
“역시 아즈텍 대륙 정세에 뭔가 문제가……?”
“당장은 교착 상태야. 별다른 변화는 없어. 바라트가 다이온을 관통해서 호데노쇼니를 지원하는 것도 볼로드가 살아있던 시절처럼 다시 이루어질 거고.”
우리는 이번에 바라트에 ‘양해’를 많이 구해야 하거든, 하고 리안은 말을 이어나갔다.
“알티샤흐르, 티베트는 양해를 구하고, 버마는 안심시키고. 그러는 와중에 ‘아, 호데노쇼니로 통하는 열차는 끊기로 했어요’라고 하면 그대로 협상 결렬이지.”
“하지만 바라트가 아즈텍 대륙의 공산주의자들을 돕다 보면 우리 쪽으로 불똥이 튈 수가 있으니까, 그걸 대비하시겠다는 거죠?”
효윤의 물음에 리안은 잠시 대답이 없다가, 한결 낮은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끝내 멕시카 자주국이 내전의 승자가 될 거라고 봐.”
다시 말해 호데노쇼니 인민공화국이나 동쪽의 신 연방은 패망하리라 예상한다는 뜻이다.
이번엔 견하가 말을 받았다.
“호데노쇼니가 얼마나 많은 지원을 받든, 기본적으로 그들 영토는 북극에 가까운 지방이죠. 인구도 적고 산업에도 한계가 있어요. 그러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결국은 무너진다고 보시는 거군요.”
“맞아. 동쪽의 신연방도 마찬가지야. 말만 구연방의 계승자지 실상은 유럽 대륙이 세운 괴뢰정권이나 다를 바 없어. 그런 세력이 군과 시민의 단결을 제대로 끌어낸다는 보장도 없고, 유럽이 언제까지나 거기다 돈을 퍼붓고 있을 수만도 없지.”
이미 로마 제국에서는, 그 벨리사리오스 황자가 황위에 올랐다. 그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정세를 흔든다면 아즈텍 내전에 개입한 유럽 국가들은 발을 빼야만 한다.
본토의 위험을 방치하면서까지 매달릴 사업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멕시카 자주국이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전략을 마련해야겠지.”
멕시카 자주국은 내전의 승자가 된 후, 자신들을 방해하던 ‘외세’에 어떻게든 원한을 갚으려 들 것이다.
멕시카 자주국이 내전의 수습, 국토 재건에 집중하려고 외세의 개입은 없던 일 취급하고 넘어갈 가능성도 물론 적진 않다.
그러나 그 말은 보복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것과 완전히 의미가 같은 말이다.
“건국 이래 지금까지 아즈텍 대륙의 세력과의 전쟁은 상정된 적이 거의 없어. 호사가들 사이에서나 ‘만약에’라며 이야기가 오갔지, 아즈텍 대륙의 정권은 기본적으로 우리와 우호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전쟁을 상상해야 할 때가 왔다고, 리안은 말한다.
“하지만 북극을 관통해서 우리의 극북 지역을 타격하는 건 제한적이지 않을까요? 기껏해야 항공기를 이용한 작전이 전부일 것 같은데.”
사람이 활동하기에 너무도 가혹한 기후. 그로 인한 기반 시설의 미비는 육군의 활동을 불가능에 가깝게 만든다. 해군도 마찬가지다. 쇄빙선이 없으면 통과조차 어려운 얼음의 바다. 곳곳에 떠다니는 빙산 틈에서 제대로 된 작전은 어렵다.
“태평양이 주요 전장이 될 것 같은데요. 실제로 일본 쪽에서도 그 점을 염려해서 해상방위동맹이라는 걸 결성한 거고.”
“물론 태평양 쪽으로 몰려올 아즈텍 해군의 침공도 생각해야겠지. 그게 정석적인 전략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 ‘멕시카 자주국’이라는 집단은 정석적인 전략으로만 대응해서는 안 돼.”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황제 루우가, 느릿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파멸인을 병기로 삼았으니까.”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두가 황제를 보며 침묵했다.
멕시카 자주국이 병기로서의 파멸인을, 북극해를 관통해 침공하도록 조종하는 모습을 각자 상상해본다.
“……북극해 쪽을 향한 해안 요새가 필요하겠군요.”
“그런 해안 요새들을 뒷받침하고, 또 요새들끼리 긴밀하게 이어서 하나의 방어 체계로 작동시키려면 극북 지역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철도망이 확충되어야 해.”
새로운 해안포 설치. 낡은 해안포 철거. 해안포의 탄약 비축. 해안포를 관리할 병사들의 보급, 해안 요새들을 이어줄 통신 장비, 그걸 실어 나를 열차와 그 정비 시설, 또 그 모든 것들이 북극권이라는 극한 환경에서 제대로 작동하게 해줄 장비까지.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눈밭에 요새를 쌓아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대원철도주식회사가 움직이는 거군요. 효윤이는 그게 실제로 군과 손발이 맞을지 살펴보러 가는 거고.”
“임시로 ‘극북철도확충계획’이라는 이름을 붙였어. 하지만 실상은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야. 극지방에서의 전쟁은 누가 해본 적도 없으니 ‘상상해서’ 교리를 완성해 나가야 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이 모든 대비가 우스꽝스러운 설레발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류는 침략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침략자의 마음을 돌릴 외교적 해법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그 어떤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힘의 균형을 만들고 ‘쳐들어오면 당신도 죽는다’는 경고를 보내도, 침략자는 끝내 침략하고 만다.
요컨대 ‘침략을 피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았을까’라는 건 아무 의미 없이 허공에 흩어지는, 소음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최선은 ‘침략당했을 때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그들이 하는 것처럼.
“극북은 그렇게 됐고…… 견하는 일본공화국에 좀 다녀왔으면 하는데.”
견하는 ‘일본에요?’라고 되묻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는 일관되게 고려와 다이온, 그 주변국 사이에서 빚어지는 안보 문제를 다루고 있었으니까.
“조유관 장관이 이미 분투 중이야. 까다로운데다 속내를 쉽게 터놓지 않고, 또 그 속내를 알아주질 않으면 토라져 버리는 전형적인 일본식 외교 앞에서 분통이 터지기 직전이지.”
리안의 말에 견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서 힘을 보태줘야 한다.
그따위로 할 거면 당신네가 망하든 말든 우리는 바다 건너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겠다며 으름장을 놓을 인간이 한 명쯤 필요한 자리인가 보다.
“파멸인과의 전투 경험, 멕시카 자주국이 사용하는 기갑사를 상대한 경험도 활용하면 그쪽 흥미를 끌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와 봐. 협력을 바라기는 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는 도무지 생각도 못 했던 기묘한 발상을 하는 건지도.”
***
델리의 후텁지근한 공기를 가르며 리안은 비행기에서 내렸다.
두 달 뒤에 있을 총선거를 앞둔 고려는 아직 봄 날씨, 아니 춥기까지 한데 이곳 델리는 벌써 여름이 찾아온 것 같다.
수행원의 도움을 받아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그녀는 차에 올라 공항에서 델리의 황궁으로 향했다.
무굴 제국의 황궁. 이제는 바라트 연방의 주석궁으로 불리는 그곳으로.
푸른 풀밭 위에 장엄한 높이와 길이를 뽐내며 선 붉은 성곽을 보았을 때, 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오’라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동명이나 칸발리크의 황궁과도 다르고, 콘스탄티누폴리의 황궁과도 다르다.
이질적인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나라이기만 한 게 아니다.
지금껏 유사한 것을 본 적도 없는 문명이 리안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것이 앞으로 이어질 협상이 얼마나 어려울지 암시하는 것 같아, 마음 편히 감상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아니 이것도 어쩌면, 아슬란 주석의 기선제압일지도 모르지.
웅장한 궁궐의 성벽에 한 번 놀라보라, 라는.
그래서 아슬란 본인 앞에서도 기가 눌려, 그가 바라는 대로 협상 내내 끌려다니라고 주문이라도 걸듯.
리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얕보이는 건가…….”
주석궁의 뜰에 내려서고야 리안은 아슬란을 만날 수 있었다.
둥근 테 안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염소수염보다는 좀 더 풍성한 수염. 머리카락은 다듬은 것도 같고 흐트러진 것 같기도 한 오묘한 모양이다. 수염과 머리카락 모두 새하얬다.
유쾌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주석은 손을 내밀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만남이 되겠군요.”
몽골어를 할 줄 알기에 통역이 필요 없었던 칸발리크나 개봉과 달리, 여기서는 철저히 통역에 의존해야 했다.
한 박자 늦게 대답해야 하는 게 답답하다.
“‘좋은 의미’로 역사에 기록되길 바랍니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미소 짓는다. 그러나 리안은 이 웃음이 순전히 우호의 웃음이라는 착각은 하지 않는다.
이제 두 사람은 회담장으로 들어가, 이 회담이 결렬되면 넘쳐날 무수한 피와 살점을 언급하며 으르렁거려야 하니까.
젊을 때는 유럽으로 망명 겸 유학했던 사람답게, 유럽식으로 부드럽게 몸을 돌리며 손바닥으로 나아갈 길을 가리킨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슬란은 덕담처럼 들리는 말을 툭 던졌다.
“고려에서는 곧 선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려의 태사께서 선거에서 승리하신다면 다시 바라트를 찾아주셨으면 좋겠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하면서 리안은 아슬란이 뱉은 말의 의도를 파헤친다.
자신이 선거에서 혹여라도 져서 정권이 바뀌면, 그때도 바라트와 오늘 한 약속이 유지되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유지되지 못할 약속을 할 자리라면 여기서 더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없잖은가. 그런 야유가 들려오는 듯하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고려와 다이온은 바라트와의 대화를 이어나갈 겁니다. 바라트를 애써 외면하던 시대는 지나갔고, 바라트에서도 문을 닫아걸던 시대는 지나가지 않았나요?”
참 특이한 것을 본다는 듯한 눈길로 아슬란은 리안을 바라봤다. 이 나이대 아가씨가 이렇게 시대의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하는 경우는 드문데.
아슬란의 미소가 깊어졌다.
뒤이어 그의 입에서 나와, 통역을 거쳐 전달된 말은 리안의 눈동자를 동요로 떨리게 했다.
“다시 뵙는 날에는 고려의 선거, 고려의 민주주의에 대해 알려주셨으면 좋겠군요. 우리도 당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면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