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46화 (446/541)

동군연합(11)

주견하를 배운다.

주견하처럼, 미리안의 ‘공세종말점’을 기다린다. 미리안의 기세가 지금과 같지 않을 때를 기다린다. 사람들이 지금 열광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익숙해지길 기다린다.

-그 공세 종말점이 바로 1937년의 총선거가 될 것이다.

바로 그때, 승부수를 띄운다.

“남은 건 패배의 여파를 어떻게 4년 동안 견디는가, 인데…….”

각오는 했지만, 패배의 결과는 알기 어렵다.

지지층이 패배를 위기로 여기고 다음번에는 더 잘해보자며 결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대를 걸었던 지지층이 이탈할 수도 있다.

“선거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의석수를 확보하는 데 목표를 둬야겠지.”

그래야 다독이며 나아갈 수 있다.

세규는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눈앞의 선거에 집중하기로 했다.

***

견하와 재연의 동기이자, 감찰국의 청년과 조직에 들어온 원동인은 요즘 희열에 휩싸여 있었다.

조직 속에서 뭔가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기쁜데, 감찰국장 주견하의 최측근 중 하나인 한재연이 직접 불러서 일을 맡겼다.

“황궁 앞에서 작은 집회를 열 거야. 태사 합하께서 정말 큰 일을 이루셨다며 축하를 드리는 집회지.”

처음에는 새삼 무슨 소리인가 싶어 동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집회는 풍군작전의 성공 직후부터 이미 열리고 있지 않던가.

제국입헌당 내의 일파가 미리안에게 충성을 드러내려 조직한 집회도 있고, 자발적으로 모여든 이들도 있다.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 중에는 세계대전을 기억하며 한족에게 그 원한을 갚아주었다며 태사 합하께 감사하다는 노인들, 내전을 겪었던 참전 군인들이 많았다.

“젊은 사람들의 참여는 그분들에 비해서 좀 적다는 거지. 그래서 대학생들도 체면치레 정도는 했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인데.”

남자마저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청초한 분위기가, 이 한재연이라는 사람의 주변을 맴돈다. 주견하와는 다른 카리스마에 동인은 그저 끄덕일 따름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야. 몇 가지 준비를 해 줬으면 해서.”

“어떤 일인데……?”

“주변 친구들한테도 홍보 좀 해주고…… 깃발이나 전단지 같은 것 좀 주문해주고 하는 일이지.”

그러면서 재연은 도안을 슬쩍 내밀었다. 고개를 내려 도안을 살펴보는 동인에게 재연은 말을 덧붙였다.

“작은 일이지만, 이번 일을 시작으로 깃발, 전단지, 그 외 집회에 필요한 소품 제작 및 확보 일을 좀 맡아줬으면 좋겠어.”

재연의 말대로 어려운 일은 전혀 아니었다. 원래 대학교 주변에는 인쇄소가 많다. 각종 학교 행사의 홍보, 교재나 논문의 인쇄에 이르기까지 대학교는 종이와 잉크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니까.

깃발도 마찬가지다. 대학생들이 출신 학교를 밝히며 시위에 나설 때도 필요하지만, 학과별 행사를 위해 학과 상징물, 학과 내 소모임의 상징물로도 깃발이 필요하다.

그러니 전혀 이상해보일 일은 아니다.

동인은 재연이 부탁을 거두기라도 할 새라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재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능력과는 별개로 이 친구가 의욕이 넘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당장 ‘큰일’을 맡기면 능력 이상의 뭔가를 하려다 엎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작은 일이라도 ‘앞으로 계속 맡기겠다’고 하면 일을 망칠 위험도 줄이고 그 의욕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

“부탁할게.”

***

도안을 들여다보던 수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도했어?”

장난스럽게 묻는 재연을 향해, 눈살을 더 찌푸려 보였다.

“세 발 까마귀라도 그릴까 봐 걱정했던 거 아냐?”

세 발 까마귀의 유래는 원래 옛 고구려 왕조의 상징 문양이다. 그러나 지금 고려에서 세 발 까마귀는 그저 옛 왕조의 유물이 아니었다.

허동주와 천손민족협회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아무리 내가 대담하다고 해도 당장 역적 취급받을 문양을 들고나올 리는 없잖아.”

“……요즘 과격해졌으니까.”

그래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도무지 예측이 안 된다고, 수영은 생각했다.

“뭐 언젠간 쓸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재연과 수영의 시선이 동시에 도안으로 향했다.

깃발의 도안. 전단지의 도안.

하얀 바탕에 금빛으로 지도가 들어갔을 뿐인 간단한 도안이었다.

지도는 고려뿐만 아니라 몽골과 고려의 극북 지역, 알티샤흐르부터 티베트를 제외한 역외사국과 한족 지역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지역이나 구성국의 경계선을 표현하지 않은, 금색으로 균일한 지도. 간단하지만 이 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겼어.”

다이온은 나뉠 수 없이 통합된 하나라는 의미.

태사 미리안이 우리나라의 강역을 얼마나 넓혔는지 보라는 의미.

“사람들의 머릿속에 ‘고려’의 지도는 일반적으로 고려 본토, 산동 식민지, 극북, 이렇게 그려질 거야.”

그나마도 본토 외 지역은 보통 지도의 한구석에 부록처럼 그려질 뿐이라, 사람들의 인식 속에선 ‘고려이면서도 해외’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우리는 그 의식을 조금, 건드려보는 거지.”

이것이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하고.

“집회를 촬영한 사진, 영상물, 이런 것들을 통해 ‘다이온 강역기(旗)’는 사람들의 인식 속으로 서서히 파고들 거야.”

“우리의 국토는 이런 모양이다, 그런 국토를 우리 고려 민족이 지배한다, 이런 의식 말이지.”

“지금은 비어 있는 지도지만 얼마간 사람들에게 충분히 익숙해지면 변형을 가해야지. 이를테면 지도 가운데에 ‘대고려(大高麗)’라고 박아넣는다든가.”

“이 국토를 지배하는 건 당연히 우리 고려 민족인데, 각 민족의 자치가 ‘고려 민족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생각이구나.”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당장 지도만으로는 누구도 트집을 잡을 수 없다.

이 지도와 집회는 겉으로 보기엔 ‘태사의 업적을 칭송’하지 않는가.

그러나 아주 ‘부드러운’ 방식으로, 이 국토를 지배하는 고려 민족 모습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당연한 상식’으로 새겨질 것이다.

“느긋하게 기다려보자고. 사람 몸에도 약효가 돌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나라에도 그래야 하지 않겠어?”

***

“괘씸한 짓들을 하는군.”

차파르가 안세규에게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은 견하가 대뜸 내뱉은 감상이었다.

“뭐 내가 그쪽 입장이었어도 비슷한 일을 했겠지만.”

상황을 돌파하려면 무슨 짓이든 못 하겠는가.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봐줄 수 있다는 건 전혀 다른 일이지.”

“그럼, 어쩌실 거예요? 곧바로 대응을?”

“지나 너라면 어떤 식으로 대응하겠어?”

“저라면 몽골 제국입헌당 지도부를 제거하고 두 제국입헌당을 일원화하는 절차를 밟겠어요.”

견하는 씩 웃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그래.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일이고, 지금 대답에는 맹점이 있어. 뭘까?”

기특한 학생의 발표라도 듣는 심정으로 견하는 되물었다. 지나는 막힘없이 대답한다.

“우리가 그럴 권한이 없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당원증이 우리 고려의 제국입헌당에서 발행한 것, 정도겠죠?”

원래 똑똑한 아이였지만 지난 4년간 견하 곁에서 일하며 그 두뇌를 더 빛내게 되었다.

확실히 언젠가는, 자신을 대신해 감찰국을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내무성 장관까지 올라간다면 정치경찰실도 맡길 생각을…… 견하는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맞아. 두 당의 관계는 참 애매하지. 그간 공식적으로는 게레센제의 눈치를 보느라 두 당이 이름만 비슷한 별개의 당이라고 해왔지만, 이제 그런 눈치를 볼 필요는 없어.”

“그런데 눈치를 보느라 저쪽 당 지도부의 ‘독립적 지위’를 묵인해줬죠.”

“실제로 원래는 다른 당이었으니까. 몽골 좌익들이 자국 정계에서 활동하기 편하라고 이름만 빌려준 거지.”

태사는 이번 제2차 동아시아 평화회의에서 몽골과 고려가 대등한 주권 국가임을 재확인했다. 자연히 두 당의 지도부도 대등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선언이다.

“합치려고 하면 원래 같은 당인데 새삼 뭘 합치냐는 식으로 나올 수도 있어. 또 지금 우리에겐 그럴 권한도 없으니 ‘고려 태사께서 승인하신 대등한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는가’라는 반발에 부딪힐 수도 있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견하는 질문을 던졌다. 지나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권한이 있는 자리에 오를 때까지 기다리자…… 는 건 맞는 답이 아니죠?”

견하가 뭐라 덧붙이기도 전에 지나는 말을 이었다.

“몽골 제국입헌당이 최소한 고려 제국입헌당에 머리 숙이고 들어오도록…… 상황을 몰아가야겠죠?”

“그러려면?”

“차파르가 ‘감히 고려의 야당 총재를 방문한’ 걸 문제 삼기만 해도 상황 조성은 충분하지 않을까요, 선배?”

“합하께서 묵인하실 수도 있지.”

“그럼…… ‘구체적으로 차파르가 어떤 수작을 부렸는가’를 캐내야겠네요.”

그제야 만족한 듯, 견하는 천천히 끄덕였다.

“몽골 제국입헌당 지도부의 머리를 날려버리지 않고서는 수습이 안 될 추문이어야 해.”

지나도 마주 끄덕였다.

“바로 착수할게요.”

***

오랜만에 황제와 태사, 그리고 두 사람의 측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바라트에서 긍정적인 답신이야. 장소도 정해졌어. 저쪽의 수도 델리에서 아슬란 주석을 만날 거야.”

리안은 황제에 대한 보고를 겸해 그렇게 측근들 앞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견하가 이의를 제기한다.

“하필이면 공산권 우두머리 국가의 수도라…… 찜찜한데요.”

“저들도 ‘공산국가는 국빈 보호도 제대로 못 하냐’는 식으로 체면 구기고 싶진 않겠지. 경호는 크게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고 봐.”

“아니 저는 경호가 아니라…… 이 경우 합하께서 비 공산권 정부 수반으로는 최초로 공산권에 방문하시는 게 아니냐는 거죠.”

유럽의 열강들은 좋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서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 나라들은 고려가 바라트를 세계 외교무대로 끄집어낸 걸 그다지 반기지는 않았다.

공산국가와의 접촉은 필연적으로 국내 좌익의 준동을 야기하니까.

“주의는 해야겠지. 하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운 우리로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유럽 국가들도 이해해 줘야 해.”

“단순히 우호 협력 정도가 아니라 다이온을 관통해서 아즈텍 대륙 북쪽의 ‘호데노쇼니 인민공화국’을 지원한다는 것도 오해의 여지가 있어요.”

대체 아즈텍 대륙에까지 공산국가를 늘려서 뭘 어쩌겠느냐는 식의 의혹이 던져질지도 모른다.

호데노쇼니 인민공화국이 멕시카 자주국과 치열하게 싸우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유럽의 지원을 받는 신 아즈텍 연방과 싸우지 않는 건 아니니까.

“자칫 아즈텍 대륙에서 유럽의 역량을 소진시키려는 수작이 아니냐는 오해를 살 수도 있겠군.”

그것도 이번 정상회담에서 신경 써야겠다며 끄덕인 다음, 리안은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저쪽에서는 정상회담 장소로 버마를 골랐어. 경호 측면에서든 모양새로든 방금 막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바라트의 세력권에 편입된 곳에서 정상회담을 할 수는 없었지. 그래서 우리는 대예를 제안했는데, 이번에는 저쪽에서 ‘한창 경계심이 높아졌을 곳에 주석이 어떻게 가느냐’는 거야. 그래서 내가 ‘연장자인 아슬란 주석을 예우한다’는 의미로 델리에 가기로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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