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군연합(10)
안세규는 말없이 팔짱을 꼈다. 변호사 연기에 너무 심취할 필요는 없으니까.
“폭발하는 민족주의, 그에 따른 팽창주의. 합하께서는 폭발을 막으려면 ‘억누르기만 하실 수는’ 없으셨겠죠.”
왜냐하면, 허동주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으니까.
끝까지 저항하는 천손민족협회 잔당을 죽이고, 군 내부에서 그에 동조하는 자들을 숙청해도 충분치 않았으니까.
애초에 천손민족협회는 어떻게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가?
대중의 지지 없이 가능한 일이었던가?
대중이 마음속에 조금도 고려 민족 제일주의를, 고려 민족의 판도 팽창과 세계 패권을 품지 않았더라면 천손민족협회의 출범이 가능했을까?
“고려인들은 이미 마음속에 ‘작은 허동주’를 하나씩은 키우고 있습니다.”
내전이 일어나자 ‘거기까지 동조해 줄 수는 없다’며 돌아섰을 뿐.
그 내전도 허동주의 이른 죽음 덕에 기적적으로 빨리 끝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아즈텍 대륙의 내전처럼 계속 피를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천손민족협회는 섬멸된 게 아니다. 이름을 바꾸고, 전향해서 여전히 미리안 정권의 하수인들로 살아있다.
미리안이 절대적인 권력을 틀어쥐었다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잔재를 끌어안고 정치를 해야 한다.
“……확장을 완전히 틀어막을 순 없었소. 국민의 열망을 외면하고 탄압하기만 했다면 태사도 여기까지 올 수는 없었겠지.”
씁쓸한 현실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일을 주도해 온 것처럼 보이는 황제도, 주견하도 결국 ‘사람들’의 열망이 만들어낸 존재일 뿐이다.
주견하는 그 열망을 읽고 편승했으며, 안세규 자신은 열망을 거스르는 길을 택했다.
안세규가 인정하자 차파르도 마주 끄덕였다.
“총재께서 연합정권의 내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이유였지요.”
“하지만 이제 달라졌소. 사람들이 충분히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않았소.”
고려의 황제가 몽골의 카간을 겸한다.
고려가 온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체제의 선두에 선다.
“이 이상은 안 된다, 그게 태사의 확고한 뜻이오.”
“여기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은 억누르겠다…… 태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던가요?”
“그렇소.”
풍군작전이 끝나고 얼마 후, 동명으로 돌아온 미리안은 안세규를 만나 협력을 약속했다.
궁극적으로 공화국을 건국해야 한다는 고려국민당의 이상 자체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이온 구성국이 하나로 병합되지 않고 각자 개혁을 시행하도록 한다는 목적은 우리의 공통 관심사다.
그 공통의 관심사를 기반으로 두 당의 수장은 ‘현상 유지’에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안세규의 얼굴을 살피던 차파르가, 뭔가 읽어냈는지 씩 웃었다.
“이번 선거에서 질 것을 예상하고 계시는군요?”
“어떤 정당이든 선거에는 최선을 다하는 법이오.”
부정하지 않는다. 원론적인 대답. 그러나 차파르는 안세규에게서 뭔가 기대할 수는 없겠다는 걸 느꼈다.
저게 안세규의 비굴한 본모습이든, 훗날을 기약하며 일단 바람을 피하는 것이든, 당장은.
그러나 도발하듯 던져본다.
“외부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다이온 ‘내부’에서 다른 협력자를 구하면 일말의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안세규의 눈이 번뜩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안세규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은 아니오.”
그 한마디에 차파르는 안세규의 진의를 읽었다. 그는 ‘이번’ 1933년의 총선거에서는 힘을 빼지 않을 생각이다. 당을 결집하며 ‘고려의 이익이라는 대의’를 함께하는 협력적 야당으로 또 4년을 버틸 셈이겠지.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차파르는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마자 고려국민당 중앙당사를 빠져나왔다.
***
-미숙하다.
안세규는 차파르를 그렇게 평했다.
-보험을 들 생각이었겠지.
미리안이 약속을 깨거나,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은, 물론 저들 처지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고려에서도 아예 ‘각국의 독립 보장을 정책 기조로 삼는 정당’이 집권하면, 태사의 약속보다 확실할 테니까.
그러나 시점이 좋지 않았다.
-돌려 말했지만, 알아들었을지.
태사를 향한 비판 아닌 비판.
그게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 하면, 바로 주견하의 감찰국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능성은 여러 가지다. 윤곽을 드러내기 전까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지.
첫째는 주견하가 본인의 야심을 드러냈을 가능성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 의도라면 이런 행위는 반기를 든 것에 가까운데, 주견하의 미리안에 대한 충성심을 생각하면…… 글쎄.
세규는 첫 번째 가능성은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둘째는 사람들의 반응을 떠보려는 주견하의 함정일 가능성이다. 미리안의 정책이 ‘미완성’이라 생각하고 불만을 품는 무리가 나오기 전에,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무리를 색출하려는 밑 작업 말이다.
-이 경우엔 태사도 묵인한다고 봐야 하나.
당연히 주견하에게 낚여서 태사의 정책에 불만을 드러내는 자가 있다면 불행한 미래를 맞이하겠지. 미승휴 시대처럼 잔혹하진 않다고 해도 여러 가지 사회적 불이익이 있을 것이다.
세규도 이 점을 계산해 당원들을 자제시키는 한편, 태사의 이번 성공에 굳이 쓸데없는 염려를 덧붙이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 ‘태사가 제국주의적 야심으로 타국을 침략하느니’ 어쩌느니 헛소리를 했다가는 그나마 남은 당의 역량도 날아가게 생겼으니까.
셋째는 태사도 주견하도 의도하지 않은, 감찰국 내에서의 움직임.
이것도 가능성이 크진 않지만 무시할 순 없다.
-살아남은 천손민족협회 대부분을 끌어안은 게 주견하의 감찰국이지 않은가.
감찰국 내부에서 이번 풍군작전의 승리로 고무되어, 그 습성을 슬슬 드러내려는 것일 수도 있다.
-주견하의 조직 장악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그러나 사고방식에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영향은 쌍방향적이다. 주견하가 그들을 감화시키려 든다면 그들도 주견하에게 천손민족협회의 이상을 조금씩 물들이지 않았겠는가.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에서 허동주가 차지하던 자리를 주견하로 대체하고, 이 체제 속에서 순응하다 끝내 주도권을 잡아챌 심산일지도 모르지.
여하튼, 두 번째와 세 번째 가능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주견하 또는 감찰국은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고, 도전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차파르가 자신을 찾아온 것은 주견하의 눈에 ‘미리안 정권을 위협할 음모’로 비치지 않았을까.
몽골 제국입헌당과 고려국민당이 손을 잡고 미리안 태사를 견제한다면, 당장 큰 위협은 아니더라도 주견하의 성미에 맞는 일은 아니다.
-믿을만한 집단도 아니다. 확실히 거절 의사를 드러내길 잘했지.
몇 번 제휴해 봤던 해외 정치 세력들보다 자신과 고려민국 임시정부 출신들이 더 오래 살아남았다. 도움이 된 적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한계를 드러냈다.
당당히 고려의 정당 중 하나로 자리를 차지한 이 시점에 남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정권을 잡을 길을 모색해야겠지.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이 바라트의 노선에서 떠났듯이, 안세규와 고려국민당도 노선을 바꿔가며 고려의 정세에 적응해 간다.
-감찰국 내 천손민족협회도 고려의 몽골, 나아가 다이온 병합 시도를 방해하는 세력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맞서긴 해야겠지만, 풍군작전의 성공으로 한창 기세가 오른 지금은 아니다.
차파르의 방문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면 세규도 두 팔 벌려 환영했겠지만, 적절하지 않은 시점에 온 손님은 그저 불청객일 뿐이다.
-그런 시기도 읽지 못하고, 뒤에서 음모를 꾸미기만 하면 다라고 믿는가.
아니면 풍군 작전의 성공이 이들에게 쓸데없는 자신감을 심어준 걸지도 모르지.
-혁명가들은 정권을 혁명하듯 운영하려고 하는 게 문제다.
어떤 혁명가든 혁명 이후의 세상을 꿈꾸며 혁명 운동에 뛰어든다. 물론 혁명 그 자체의 열기에 매료된 인간도 없진 않지만.
그러나 일단 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나면, 방법이 혁명 이전이나 혁명 당시와는 달라져야 한다.
-이 점을 착각하는 혁명가가 많지.
군주, 자본가, 귀족, 그 밖에 모든 권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맞서 싸우던 습관을 버리질 못한다,
투쟁에는 적합한 습관일지 몰라도, 투쟁 이상의 무언가로 나아가질 못한다.
-끝내 자신들이 지키고 싶었던 노동자들도, 같은 당의 동지들도 적으로 규정하고 때려잡기 시작하지.
그 지경에 이르면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처럼 되는 거다.
어느 순간 노선을 전환하여,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안세규는, 고려국민당은 어떤 식으로 전환해 풍군작전 이후의 세상, 고려와 몽골이 동군연합이 된 세상에 적응할 것인가.
세규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선거에서 질 것을 예상했다’라는 차파르의 지적은 옳았다.
다가올 총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고 안세규가 태사로 선출될 방법은 없다.
-패배는 각오해야 한다.
풍군 작전의 성공은 고려의 다른 정당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위치에 제국입헌당을 올려놓았다.
-국민의 머릿속에는 그 영향이 얼마나 갈까.
국민은 제국입헌당을 좋아해서 뽑는 게 아니다. 미리안을 좋아하고, 미리안의 업적에 열광하고, 그녀가 세운 황제를 숭배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 미리안이 버티는 한 제국입헌당의 승리는 너무도 확고하다.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1933년 총선거…… 이건 대처할 방안이 없다.
그다음, 1937년 6월의 총선거. 4년 뒤에도 미리안은 젊고, 큰 실책 없이 나라를 운영하는 한 무난하게 승리하겠지. 그때도 미리안의 나이는 불과 20대 후반이다.
-허나 그 시점이라면…….
자신이 손에 감춘 패를 드러내기에 적절하겠지.
-미승휴에 의한 황족 살해의 증거들. 허동주의 미리안 황제 옹립 계획.
어떤 이는 안세규가 감춘 패를 보면 ‘왜 당장 공개하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걸 드러낼 때는 지금이 아니다.
지금 드러내봤자, 한창 기세가 오른 미리안의 코웃음 한 번으로 부정될 증거들이다.
사람들은 ‘미리안의 업적을 시샘한 안세규의 더러운 수작’ 정도로만 여기고 무시하겠지.
그러면 애써 감춘 최강의 패가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1937년이든 1941년이든 다시는 쓸 수 없게 된다. 철 지난 농담, 안세규가 지어낸 낭설 취급을 받겠지.
아니, 패가 쓸모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다. 안세규와 고려국민당에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져 버린 국민들이 지지를 거둬버리면 아예 제국최고회의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주견하, 너는 나에게 교훈을 주었다.”
정치에서도 ‘적의 공세종말점’을 기다리라는 교훈.
게레센제와 울제이의 기세를 최고조에 이르게 했다가, 더는 전진할 여력이 남지 않았을 때 단번에 추락시켜버린 풍군 작전의 교훈 말이다.
그러나 주견하는 알까?
훌륭한 전략과 전술은 반드시 그걸 학습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