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군연합(9)
“두 사람과 선대 주석의 분투로 어쨌든 바라트는 살아남아 아대륙을 통일했습니다만, 그 경험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아슬란 주석의 정신에 남아 있다는 분석이 다수입니다.”
“그게 바로 ‘포위당했다는 위기감’이군요.”
바라트인들에게 외세라는 단어는 곧장 침략자를 연상시킨다는 말이다.
“건국 이래 맺은 외교 관계가 침략을 방어하는 것밖에 없었으니 저들이 일종의 피해망상을 품고 외국을 대한다는 걸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저들의 눈에 자본가란 사상에 반대하는 자 정도가 아니라 ‘매국노’의 의미에 가깝겠군.”
리안은 바라트가 고려의 중재를 통해 국제 외교 무대에 복귀했던 일을 떠올렸다.
고려는 유럽처럼 바라트를 침략한 일이 없었기에 중재자로 삼기에 적절해 보였던 건가.
혹은 외교 정책의 전환이 ‘이제는 세계로 나서도 된다’는 자신감의 표현인 것은 아닐까.
리안의 의문에 조유관은 끄덕였다.
“외세와 제후왕, 모두를 물리쳐 아대륙을 통일한 후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은 갈림길에 섰습니다.”
이대로 아대륙을 자본가들의 공격에서 방어하며 쇄국정책을 유지할 것인가.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 세계 각지에 혁명을 퍼트릴 것인가.
“아대륙 통일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선대 주석이 죽자, 후계자로 대두된 총서기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두 사람 사이에 경쟁이 시작됐죠.”
바라트만의 공산주의. 총서기는 바라트의 내실을 다지는 게 먼저라며 이 주장을 내세웠다.
세계혁명의 확산.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아슬란은 여러 나라에서 연속적으로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바라트가 내실을 다질 시간도 없을 거라며 이렇게 주장했다.
“두 사람의 권력 투쟁 결과는…… 합하께서도 아시는 것처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현 주석 아슬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선대 주석이 살아있던 시절에도 바라트는 서진하고 있었지만, 아슬란이 주석이 된 후 본격적으로 착수했지요.”
페르시아 정복.
이슬람 제국 붕괴 후 샤들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자들, 아라비아와는 다른 독자적인 종교 국가를 건설하려는 자들이 뒤엉켜 페르시아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서유럽은 로마 제국의 견제로 인해 이 지역에는 간섭하지 못했고, 로마 제국 역시 아라비아 문제에 집중하는 한편 페르시아는 계속 혼란 상태로 있길 바랐다.
그 틈을 파고들면서 바라트의 ‘혁명이 확산’된 것이다.
“물론 세계 연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원정입니다만, 바라트가 아니라 무굴 황제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도 페르시아를 향한 보복은 이루어졌을 겁니다.”
페르시아는 역사적으로 쭉 아대륙의 안보 위협이었다. 무굴 황실의 몰락에 결정타를 가한 것도 페르시아의 델리 기습 침공이었으니까.
옛 왕조들의 역사가 알려준 교훈은 그대로 바라트의 혁명관과 결합하여 혁명의 군대를 서쪽으로 진군시켰다.
“그 결과 카불, 사마르칸트, 호레즘, 후라산, 페르시아, 이렇게 다섯 위성국이 탄생했군요.”
“태평천국은 바라트가 뭔가 하기도 전에, 고려와 몽골을 비롯한 각국에 분할되었기 때문에 서쪽으로 방향을 정했을 겁니다.”
“이번에 동쪽으로 방향을 튼 건 페르시아 정복처럼 자국 안전 보장의 목적도 있지만, 역시 ‘자신감의 표출’이겠죠?”
“버마에서의 혁명은 바라트의 국제적 위상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가늠하는 무대이기도 했을 겁니다. 혁명은 성공했고 고려, 다이온은 이를 승인했으며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의 주요 구성국은 이의를 제기할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죠.”
게다가, 하면서 조유관은 잠깐 말을 망설였다가, 보고를 이어나갔다.
“곧 공산권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연방 체제의 창설을 선포한다고 합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세계혁명연합’이라는 이름이라는 보고입니다.”
바라트도 ‘연방’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바라트가 무굴의 제후국들을 병합하고 각각 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한 역사의 흔적일 뿐이었다.
술탄과 마하라자에서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지배자가 바뀌었지만, 그 인민공화국 주석 역시 델리 공화국 주석의 추천이나 동의를 받은 자였다.
물론 여기서 동의나 추천은 ‘임명’을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바라트 외부의 공화국들도 영향권으로만 두진 않고 통합하겠다는 건가.”
“어쩌면 우리의 ‘다이온 연방’에 자극받은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리안은 눈을 감았다. 어렵다. 바라트와의 외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렵다.
상대가 외교무대의 상식을 뒤엎는 공산주의자들인 탓도 있겠지만, 고려의 몸집이 너무 커져서 기민하게 움직이기 어려운 탓도 있다.
조유관은 방금 ‘자극’이라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아마 바라트가 느끼는 감정은 ‘공포’에 더 가깝겠지.
방금 전까지 들려준 역사 이야기가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온 이슬람권을 하나로 묶어 세계를 불태웠던 신 이슬람 제국.
옛 대원의 강역을 하나로 묶은 강국의 출현은 얼마나 흡사한지.
다이온이 얼마나 우호적인 목소리로 접근하든 경계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경계하지 말라고 하면서 알티샤흐르의 다이온 가입에 양해를 구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버마보다 동쪽으로 혁명을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상기시켜야 한다…… 이걸 해내야 한다니.”
“망명한 버마 왕족이나 우익 세력이 반혁명을 시도하지 못하게 억제한다고 확언해주시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이 아닐까 합니다. 여기에 더해…….”
조언하는 외무장관의 어조에는 피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알티샤흐르에는 무굴의 티무르 황실도 망명해 있기에, 이들의 반혁명 시도 역시 막아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황제 폐하께서도 티무르 황실의 먼 친척이시기에…… 저들의 경계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렇지. 루우는 지금 황금 가문 보르지긴의 수장이고, 무굴 티무르 황실은 넓게 보자면 황금 가문의 일파이기도 하다. 원래 보르지긴은 모계 혈통에 의한 계승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티무르는 그 권리를 실력으로 쟁취했다.
“우리가 황제의 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무굴 제국 복구를 지원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발상을 할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저들에겐 군주든 귀족이든 자본가든 ‘적’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여지를 드러낸 건 극히 최근의 일이고요.”
“하긴 식민지를 확대하겠다는 의지로 바다를 돌아오는 적들도 겪어봤는데, 국경을 맞댄 나라가 쳐들어올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죠.”
이해가 되기도 하면서도, 리안은 조유관처럼 목소리에 피로가 묻어나는 걸 감출 수 없었다.
“예상 가능한 바라트 측의 행동에 모든 대응을 강구해봅시다. 정상회담은 동남 국경뿐만 아니라 다이온 전체의 안정을 위해 꼭 성사되어야 합니다.”
***
“위험한 접촉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생각보다 쌀쌀맞은 응대에 차파르는 적잖이 당황했다.
안세규는 적대 세력의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라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차파르는 어디까지나 카라코룸 행정장관으로 부임하기 전에 인사차…… 라는 구실로 왔기 때문에 이 정도의 대우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차파르는 이내 안세규가 한 말을 곱씹어본다.
위험하다?
그의 뇌는 안세규의 말이 의미하는 바에 순식간에 도달한다.
“제가 고려국민당 당수와 접촉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군요.”
“좋게 보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소. 나는 더 이상 외무장관도 아니고, 고려국민당과 제국입헌당의 연합정권은 깨졌소. 고려국민당은 그저 야당일 뿐이오. 그런데 당신은 어쨌든 ‘외국’의 여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와서 태사가 아니라 굳이 나를 만난다? 그게 어떤 의미일 것 같소?”
비밀이라는 건 비밀을 눈치챈 사람도 그대로 두는 게 낫다는 판단에 비밀 취급을 하니까 비밀이다. 그러니까 새어나가지 않는 비밀이란 없다.
오늘 이 만남도, 당장은 아니라 해도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새어 나간다.
“‘외국’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씀하시니 조금 섭섭하군요. 우리는 다이온 연방이라는 큰 틀에서 하나가 된 줄 알았는데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오. 그쪽도 마찬가지지 않소?”
다이온이라는 이름을 이용하고는 있지만, 몽골의 독립성을 지키고 싶어 하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차파르는 굳이 그 물음에 대답하진 않았다.
“‘외국’의 여당 간부가 고려의 ‘야당’ 당수와 만났다……. 어떤 이들은 그 ‘외국 정치인’이 고려의 여당, 즉 태사와의 교섭에서 만족하지 못했기에 야당을 찾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곤 천연덕스럽게 한쪽 눈썹을 치켰다. ‘어떤 이의 생각’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곧 차파르의 의도였다.
안세규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태사는 동아시아 평화회의에서 지나치게 연방 구성국들의 독립을 보장해줬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인데?”
안세규의 말대로, 일각에선 그런 비판이 나온다.
물론 신문이나 라디오 등에서 대놓고 그런 비판을 쏟아내진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다이온 연방의 창설부터 장악, 동군연합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4년 사이에 초인적인 성과를 보여준 태사다.
그런 사람에게 성과가 시원찮다는 비판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언론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그런 이야기를 해도 뭇매를 맞을 터.
비판은 어디까지나 ‘태사 합하께서 좀 더 나아가셔도 됐을 텐데 왜 자제하셨을까?’ 정도의, 아쉬움이라는 형태로 퍼지고 있었다.
그나마도 소수 의견이다. 아직까지는.
차파르는 의외라는 듯 눈을 좀 더 커다랗게 떴다.
“그런 의견도 있는 모양이군요?”
“태사가 당신들이 원하는 ‘독립 보장’을 위해 얼마만큼의 손해를 감수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요?”
미리안을 변호하는 모양새가 됐지만, 안세규는 차파르의 진의를 캐기 위해 약간 연기를 해보기로 한다.
“카라코룸도 양보하고 칸발리크에 당신들을 우뚝 세워 줬소. 카간께서 칸발리크에는 잘 계시지 않고, 권한도 이전 시대에 비하면 자제하고 계시니 당신들 세상이지. 당신네 우려대로 ‘합병파’가 없었을 것 같소? 낭키아스나 키타이, 역외사국이면 몰라도 몽골은 고려의 직할령으로 통합하자는 의견이 상당했소.”
그걸 미리안이 억누르고 있는 걸 정말 모르는가, 안세규는 차파르를 타박한다.
차파르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오른다.
“마치 태사께서 우리를 위해 그런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는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지만, 저희도 알 건 압니다. 태사께서는 그렇게까지 이타적인 분은 아니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