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군연합(8)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하려면, 먼저 그들이 안고 있는 증오와 피해망상의 근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중전선을 막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혹은 ‘포위당했다’는 위기감이 바라트 외교 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지요.”
인간의 행동은 과거의 경험에 묶인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정책은 역사적 경험에 묶인다.
조유관의 말에 리안은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의 역사를 떠올렸다.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이 막 수립되던 시기에 리안은 젖먹이에 불과했다.
게다가 바라트의 비밀주의는 그들이 어떻게 내전에서 승리하고 마침내 ‘힌두’ 혹은 ‘인도’라 불리는 아대륙의 주인이 되었는지 감춰버렸다.
20여 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숙청에서 빠져나온 ‘망명객들’, 내전의 패배자들과 외부에서의 관찰을 종합해 대략적인 역사의 윤곽을 잡았을 뿐이다.
그렇게 정리되지 않고, 아직도 몇몇 중요한 장면에서 의견이 분분한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의 역사를, 리안은 애써 되새겨 본다.
“무굴 제국을 혁명으로 무너뜨린 바라트 연방은, 당시엔 여러 군벌 중 하나로 취급받았죠.”
“델리가 수도라는 인식은 있었지만, 무굴 제국이 멸망하기 전에도 이미 해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각지에서 술탄이니 마하라자니 하는 자들이 세력을 이루었으니까요.”
뜻하지 않게 태사와 역사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만, 조유관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바라트의 역사를 통해 고려 제2 제국의 멸망을 회상했다.
그때 고려도 수도가 무너지고 황실이 없어졌으며, 크게 3대 세력으로 통합되기까지 후삼국시대나 다를 바 없는 시기를 보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지만, 태사의 백부도, 태사가 죽인 문하시중도, 가장 큰 야당도 그 군벌들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조유관은 바라트와의 교섭을 위해 그 역사를 조사하면서, 또 이렇게 태사 앞에서 다시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젊은 날을 겹쳐보았다.
“무굴은 제대로 통합되지도 않은 제국으로 서쪽으로는 이슬람, 동쪽으로는 태평천국과 싸웠으니…….”
리안의 한탄대로, 무굴은 몇 년이라도 버틴 게 기적이었다. 브리튼이나 에스파냐, 신성 제국이 식민지 일부 지역을 양보해가면서까지 지원하지 않았다면 더 일찍 무너졌을 것이다.
“무굴 제국의 희생이 유럽이나 우리 고려, 몽골에는 결과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긴 했습니다만, 무굴 제국 국민들에겐 자기들의 삶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괜한 참전이었죠.”
“순전히 무굴 황제의 권위를 되찾기 위한 전쟁이었으니까요.”
무굴 황실은 보르지긴 황실의 방계라고 할 수 있는 티무르 황실이다. 말하자면 무굴 황실과 다이온의 황제인 루우는 아주 먼 친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외부에서 군사적 정복으로 들어와 세운 나라는,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런 정복자 대부분은 가장 자신 있는 일, 즉 ‘군사적 승리’를 계속 거두어 권위를 높이려 했다.
그러나 정복 활동은 언젠가 한계에 부딪힌다. 한 번 승리를 거두고 나면, 앞으로 승리를 거두기가 더욱 버거워진다.
정복으로 국토가 늘어난다는 것은, 국가의 중심부에서 전장까지, 각지의 병력이 집결지에 모이기까지 거리가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에 따른 비용은 국가가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정복에 질려버린다. 사람들이 정복에 열광하는 궁극적 이유는 정복이 가져올 장밋빛 미래 때문이다. 부, 명예, 그에 따른 더 나은 삶.
풍요는 언제 손에 넣을지 알 수 없는데, 정복만을 계속하겠다는 지도자에게서 마음은 떠나버린다.
그런 지도자 주변에는 비슷비슷한 전쟁광들만 남는다.
전쟁만 할 수 있을 뿐, 그렇게 얻은 토지 위에서 아무것도 기르지 못하는 자들이.
“그래서 저는 허동주를 내버려 둘 수 없었죠.”
“예. 고려를 무한한 정복욕으로 불태울 인간을 주멸하셨죠. 온 나라가, 후대가 합하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업적이나 고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굴 제국은 그러지 못했어요.”
신성 제국의 나폴레옹 1세도 정복 활동을 그만두고 국내 자유주의자들과 타협, ‘자유주의적 제국’의 내실을 다지는 데 남은 생애를 바쳤다.
구 아즈텍 연방도 대서양 전쟁 이후 얻은 막대한 동해안 영토를 연방으로 끌어안는 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무굴 제국은 여전히 정복에 매달렸다.
아대륙의 남부를 두고 정복 전쟁을 거듭하며, 군사 지도자로서 황제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황제의 지휘부를 중심으로, 하나의 군대가 되어 작동하는 무굴 제국.
듣기에는 참 좋은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전쟁 기계가 아니다. 지치고 질린다.
게다가 모든 걸 쏟아부은 황제의 대원정이 승리가 아니라 패배라면? 패배하지 않았더라도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결과는 무굴 황실이 허망할 정도로 추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대륙 바깥에서 들어온 왕조는 토착 제후들의 눈치나 살피는 처지로 전락했다.
“무굴 황제는 세계대전을 황실의 권위를 재확립할 기회라고 판단했겠지요.”
“위기가 기회라는 말을 너무 믿는 인간들이 꼭 있지.”
자신의 역량을 똑바로 파악했다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기를 향해 고개를 처박으면서 저절로 기회가 되길 바란다면, 그냥 머저리일 뿐이다.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긴 합니다만, 학자들은 무굴 제국 정부가 참전을 결정한 건 국제정세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든, 그 나라 자체에는 좋지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무굴 제국이 참전을 결정하지 않았어도 결국 태평천국은 남서 방향으로 전선을 확대했으리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정남 방향으로 봉래까지 이어지는 선을 축으로 서태평양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게 태평천국의 대전략이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슬람 제국이야 유럽과 지중해 전선을 정리하고 나서야 동방의 불교 제국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겠지만, 어쨌든 그들도 태평천국과 무굴 제국의 전쟁에 말려들었다.
“황제가 제후들의 군대를 소집해 전장에 나가는 구시대적 방식의 동원…… 당연히 그 군대가 제대로 된 전투력을 갖추었을 리 없죠.”
차라리 무굴 황실이 몰락하기 전이었다면, 황제의 막대한 자금과 동원력으로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굴 제국은 이전 시대보다도 못한 졸전을 치렀고, 그렇게 대패를 거듭하며 군사력이 증발하자 혁명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의 혁명은 일단 성공했지만, 실상은 무굴 황제의 도읍인 델리 일대를 장악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곧바로 반혁명, 혹은 반동이라 불리는 제후왕들, 무굴 황실 지지 세력들과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이제 국경을 거리낌 없이 넘어 아대륙으로 들어오는 이슬람 제국와 태평천국의 군대에도 맞서 델리를 수호해야 했다.
“바라트가 건국 직후에 맞닥뜨린 이중전선이군. 아니, 삼중전선이라고 해야 할까요.”
“바라트 사람들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그런 복잡한 정세가 신생 사회주의 공화국을 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후왕 중에는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 아니 당시엔 델리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던 집단을 먼저 쳐야 할 적으로 본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슬람 제국이나 태평천국과도 손을 잡고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했다.
당연히 이에 반발한 소위 ‘애국적인’ 제후왕들은 델리를 향한 공세를 중단하고 그런 매국노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혼란을 틈타 다른 제후왕의 뒤를 노리는 제후왕들도 있었다.
그리고 신생 사회주의 공화국은 그 모든 자와 손을 잡거나 배신하길 반복하며 수도 델리를 지켜내고, 반격하고,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이슬람 제국이나 태평천국은 아대륙 내 여러 세력의 관계를 이용해 전쟁을 수월하게 풀어나간다고 생각했겠지요. 하나 이미 아대륙의 항쟁이라는 수렁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태평천국이나 이슬람 제국과 화친하려는 세력을 적당히 지원하다 빠지면, 곧장 반대파가 그들을 패배시킨다. 애써 얻은 승리가 물거품이 될 위험도 위험이거니와, 승리하고서도 그 효과가 눈에 띄지 않으면 국내의 불만이 치솟는다.
“적당히 화친을 맺어 줄 세력을 지원하는 데에도 돈과 군대가 들어간다. 답답해서 직접 점령하기로 하면 그 점령에는 더 많은 돈과 군대가 들어간다. 그렇다고 깔끔하게 물러나는 바람에 아대륙이 다시 적대적인 세력을 중심으로 숨을 돌리면 그쪽 전선에 군대가 계속 묶인다. 어느 쪽으로 보나 수렁이라고밖에 할 수 없군요.”
군대의 주둔과 점령지 관리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는, 리안도 한족 관리 특구를 통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다른 전선이 없는 상황인데도 제국최고회의와 예산을 두고 씨름하는 데 이렇게 힘이 드는데, 당시 태평천국과 이슬람 제국의 위정자들은 어땠겠는가.
이슬람 제국은 콘스탄티누폴리에서, 시칠리아에서, 프랑스 남부에서, 이베리아에서 더 진격하지 못하고 소모전의 늪에 빠졌다.
태평천국은 아즈텍 연방과 일본공화국에게 바다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이겼다고 생각한 고려와 몽골 전선에서도 한계에 부딪혔다.
“그렇게 두 나라가 무너지고, 델리 사회주의 공화국이라 불리던 나라는 국호를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으로 바꿀 만큼 아대륙의 패권을 확보했습니다. 하지만 내전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죠.”
이슬람 제국의 위협이 사라지자마자 브리튼, 에스파냐, 신성 제국이 각기 ‘조차지’라 부르던 아대륙 해안에 마련한 거점, 혹은 식민지를 되찾으려고 군대를 보낸 것이다.
이것이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이 맞닥뜨린 두 번째 이중전선이었다.
“세 열강은 대전 전보다 더 많은 이익을 아대륙에서 보길 바랐습니다. 세계대전으로 입은 피해를 아대륙에서 벌충할 생각이었겠죠.”
“공산주의자들과 타협한다는 생각은 못 떠올렸겠죠. 세계 최초의 공산 국가가 쇠락해가던 무굴 제국에서 탄생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자국 내 혁명가들을 자극했을지.”
바라트의 혁명이 공산주의 이론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몇몇 이론가들을 제외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론으로만 존재 가능성을 논하던 것이, 지상에 국가의 형태로 구현되었다는 것.
그것이 혁명가들에게 얼마만큼의 용기를 주었을 것인가.
군주의 특권과 구시대의 질서를 지켜야 하는 나라들에게 그 얼마나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인가.
그러니 세 유럽 국가에겐 무굴 제국과 같은 군주제 국가가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바라트도 어느 한 전선과는 타협하고 다른 한 전선에 집중한다는 전략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살아남으려면 열강의 모든 식민지를 아대륙에서 추방하는 것 말고는 길이 보이지 않았죠.”
“그 과정에서 대두한 인물이 둘. 공산당 총서기와 경쟁자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아슬란. 바로 지금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의 주석인 사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