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군연합(7)
동명역의 공기. 열차에서 내린 류성일에게는 낯설면서도 그리운 공기였다.
이 도시에는 각자의 굴을 판 정치 괴물들이 산다. 그런 면에서 류성일에겐 20여 년간 애증의 고장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간 카라코룸에 유배당해 있느라 느끼지 못했던 변화의 냄새가 났다. 낯섦은 바로 그 냄새에서 오는 것일 테지.
자기 사람들을 통해 계속 동명 정계의 정보를 받아왔지만, 이렇게 직접 냄새를 맡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 직접 눈으로 보고 들으면서 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
“대안이 없다, 는 게 당의 판단입니다.”
여유롭게 감상을 정리할 시간도 잠시뿐. 류성일은 바로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허리 근육을 긴장시켰다.
주견하.
풍군작전 중에도 몇 번 얼굴을 마주했지만, 동명역에서 보니 확실히 알겠다. 그는 4년 전 테러에 휘말려 부모를 잃고 넋 나간 얼굴로 총장실에 들어왔던 그 소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무엇의, 대안인지.”
간신히 말을 꺼내는 중에도 입안이 말라가는 듯하다.
“태사 합하께선 이번 총선거 이후로는 제국최고회의 의장을 겸하지 않으시기로 했습니다.”
‘합하’를 발음하는 청년의 혀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호칭에 불과하지만, 이 청년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의 ‘체계’를 만들었다.
그것을 제국과 사회에 적용하는 데에,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활용하는 데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류성일도 자연스레 견하가 만든 체계를 따르게 만드는 힘.
“합하…… 께서 물러나신다면 다른 누군가가 의장직을 대신해야겠군.”
“네. 합하께선 의장 자리는 야당에게 주어 다당제의 균형을 맞추는 방안도 검토하시긴 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유력한 의장 후보인 안세규는…….”
말끝을 흐린다. 흐린 말끝 너머의 내용은 알아서 생각하라는 뜻이다.
그나저나 선거에서 지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군, 하며 류성일은 흘끗 주견하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주견하는 류성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는 동안 정면만 바라보았다.
“내가 맡는 게 적절하단 말인가.”
물론 나제홍 같은 적절한 허수아비를 세워두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미승휴를 추억하는, 류성일과 동년배인 당의 원로들을 지나치게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여기선 적절히 타협하는 편이 낫다.
그리하여 류성일에게 제국최고회의 의장 자리를 내어주어 원로들을 안심시킨다는 방침이 세워졌다.
풍군작전이 대성공을 거둔 시점에 류성일이 동명에 돌아와봤자 미리안의 권력에 도전할 방법은 없다는 계산도 작용했다.
게다가,
“그럼 카라코룸 행정장관 자리는 어떻게 되는가.”
“이제 게레센제 시절처럼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으니까요. 임시 조치는 끝나고, 몽골과 고려는 연방 속에서 제대로 ‘국경에 따라’ 각자의 영토를 책임지겠죠.”
“몽골 정부에서 카라코룸 행정장관을 보낸다는 이야기로군.”
“네. 아직 카라코룸의 지역 자치를 시행하기엔 이르다는 판단도 있어서, 중앙정부에서 직접 장관을 임명하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몽골 측에 ‘합병하지 않는다’는 약속의 표지로 카라코룸을 돌려주어야 했다.
견하는 이미 누가 카라코룸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는지까지 알고 있다. 차파르가 새로운 카라코룸 행정장관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리안과 제국입헌당의 계산만 작용한 게 아니었다. 견하의 계산 역시 이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풍군작전에 협조적으로 나왔으니 류성일에게도 그만한 상을 주긴 해야겠지.
그래서 유배지에서 풀어주었다.
-향후 화림 계획을 진행할 때 카라코룸 행정장관으로 류성일이 남아 있으면, 불가피하게 그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면 새로운 공로에 대해서도 상을 줘야 한다.
차라리 지금 제국최고회의 의장을 내주는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게 낫다.
“그렇겠군. 이제 동군연합이 된 두 나라는 서로의 영토를 존중해주어야겠지. 게레센제 시절처럼 억지를 부려야만 할 시기도 아니고 말일세.”
부드럽게 수긍했지만, 류성일은 아무 대책 없이 제국최고회의 의장 자리가 주어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무엇일까.
이들은 자신을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어떻게 요리할 셈인 걸까.
카라코룸에 있던 시절은 오히려 휴가처럼 느껴지리라.
이 아수라장에서 훨씬 어린…… 젊은이들과 씨름해야 하는가.
늙은 몸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심스러우면서도, 류성일은 노회한 호승심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
류성일의 예상대로 리안은 ‘제국최고회의 의장 자리를 내어준 후’의 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 동아시아 평화회의는, 더 나은 체제를 찾을 때까지 연방 의회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기능을 맡겨두었습니다만, 오늘 여기서 분명히 하려 합니다.”
리안은 잠시 다른 대표단의 면면을 살폈다. 말이 좋아 의회지 실상은 고려 태사에게 1년여의 성과를 보고하고, 지시 사항을 받아 돌아가는 자리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나마 몽골이나, 연방 가입에 열성을 보이는 알티샤흐르가 이번 회의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을 따름이다. 이대로는 좋지 않다.
언제쯤 저들이 고려나 몽골 수준으로, 진정 ‘연방의 의회’에 참여할만한 구성원이 될는지.
한탄해봤자 당장 변하는 것은 없으니, 그저 시간을 들여 기다릴밖에.
생각을, 방금 꺼낸 이야기로 전환한다.
“우리 고려는 제국최고회의에 속한 외교조약 조인 및 군사행동 승인에 대한 권한을, 동아시아 평화회의로 이관하기로 했습니다.”
아마 리안이 발표하고 있는 이 순간, 류성일도 제국최고회의 의장에게서 어떤 권한이 제거되었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다. 리안은 제국최고회의 의장 자리를 내놓긴 하지만 자신을 방해할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힘을 실어줄 생각도 없었다.
고려 내에서는 권력 일부를 내려놓아 권력 구조를 개혁하고,
또 일부 권력을 ‘연방’으로 넘겨 연방 체제를 강화한다.
그 강화된 연방의 ‘책임’을 고려 태사가 지면서, 실질적으로 미리안의 권력 자체는 그다지 약화하지 않았다.
-연방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영역’이 많으니 그 틈을 루우가 파고들 여지가 많긴 하지만.
루우는 ‘연방의 수장’이기에 이 과정에서 일반적인 입헌군주 이상의 권력을 지니게 된다.
-뭐, 그것도 연방 체제가 제대로 자리 잡아 가는 과정에서 개선되겠지.
루우가 권력을 남용할 성격은 아니니, 크게 염려할 부분은 아니다.
“그렇다면…… 고려군은 ‘다이온 연방군’으로 재편된다는 뜻입니까?”
보우슈엥 대표단이 던진 질문이었다. 군사행동 승인 권한을 다이온의 평화회의가 쥐게 된다면, 그 군대는 이제 개별 구성국의 군대가 아니라 연방의 군대가 되는 것 아닌가.
리안은 긍정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제 고려군은 고려라는 이름을 떼어내고 연방군, 혹은 다이온군이라 불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의 국토를 확대하고 국경을 연장했습니다. 우리의 군대는 이제 과거의 한정된 영역에서 활동하는 게 아니라 확대된 국토를 무대로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다이온 연방의 결성, 그리고 ‘재편성’ 과정과 함께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금까지와는 다른 국제적 지위를 누리게 될 겁니다. 따라서 고려군은 연방군으로 거듭나 새로운 국제 환경에 어울리는 전략에 대응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리안은 다시금 반응을 살폈다.
마치 고려가 먼저 군사와 외교권을 연방에 양보하는 듯한 모양새. 그러나 실상은 각국에 ‘고려군을 중심으로 새로 만드는 군대에 너희 군대를 내놓으라’는 요구다.
당연히 안색들이 변한다. 공산혁명의 확산으로부터 지켜달라며 들어간 다이온 연방이, 실은 호랑이 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겠지.
하지만 후회한들 다른 방법은 없다. 역외사국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다이온과 바라트는 각자의 영역을 확정했다. 역외사국이 고려에 반발해 다이온을 떠날 수 있을 리도 없고, 떠날 수 있다고 해도 기다리는 건 바라트의 아가리뿐이다.
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어떤 명확한 요구도 하지 않은 채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
“정상회담을 제의하기 전에 이런 소식부터 들을 줄은 몰랐는데.”
동아시아 평화회의 일정을 끝마치고, 리안과 루우는 동명으로 돌아왔다.
루우가 다시 국민들을 향한 연설이며, 풍군작전에서 고생한 군부대 시찰 등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리안 역시 알티샤흐르 문제의 뒤처리에 들어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티샤흐르의 다이온 연방 가입에 따른 바라트의 반응을 살피는 문제였다.
리안은 귀국하자마자 자신과 바라트 주석 아슬란 간의 정상회담을 제의한다는 안을, 조유관을 불러 의논하려 했다. 그러나 외무장관 조유관에게도 보고할 일이 많이 있었다.
“……버마에 혁명정부가 들어섰다고.”
“결국…….”
바라트와 다이온 간 전쟁을 피하고자, 그사이에 자리 잡은 많은 나라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버마도 그중 하나였다.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치고, 몰락했을 것이다.
“왕실은?”
“라타나코신으로 망명한 모양입니다. 외무성에서는 대사관을 통해 그들의 망명을 받아들이되 혹여라도 반혁명을 지원하거나 해서 바라트를 자극하지 말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만…….”
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하들이 황송해할 한숨이었지만 조유관은 덤덤한 얼굴로 그저 바라보았다. 그도 이 일 때문에 요즘 정신이 없었으니까.
버마 선에서 자제하라고, 바라트에 요구해야 한다.
“정상회담이 성사될지는 둘째치고, 가서 논의할 일이 더 늘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