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군연합(6)
“그래. 우리 상관이신 주견하 감찰국장의 지시에 따라, 모든 직원과 관계자가 제국입헌당에 가입하면서 받은 당원증이지. 우리는 그렇게 해서 ‘상당한 무리를 이룬’, ‘젊은 피’가 되었어.”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하고 묻듯 재연은 눈을 빛냈다.
“당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당내에서 미리안 태사의 친위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그리고 주견하 본인의 영향력을 증대하기 위해 우리는 제국입헌당에 들어왔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합법적으로’ 제국입헌당원이 되었지.”
태사에게 반항할 필요는 없어, 라며 재연은 말을 이었다.
“우리가 ‘당론’이 되면 돼. 우리가 곧 당의 젊은 목소리고, 전국에 퍼진 정치경찰실, 감찰국의 망을 이용해 ‘여론’이 되면 돼. 이미 그러기 위한 밑바탕은 다른 누구도 아닌 주견하 본인이 마련해 줬으니까.”
대학별 토론의 장에서 감찰국 청년과가 주도하는 학생운동이 점차 주도권을 빼앗아 오고 있다.
감찰국 소년과가 펼친 그물은 고등학교와 중학교로 뻗어 있다.
풍군작전의 대성공에 고려 국민은 도취했다.
“가장 평화주의적인 지식인도 고려의 군사력을 통한 평화에 자기 신념을 의심할 수밖에 없어. ‘내가 틀렸나? 이런 방식으로도 평화는 가능한가? 고려 민족이 주도하는 세계라는 이상이 옳았던 건가?’하고 말이야.”
아마 미리안은 이 정도 선에서 폭주를 억누를 계산이겠지. 하지만 계산은 재연도 할 수 있었다.
그도 4년 동안 놀고만 있진 않았다. 그도 사선을 넘나들며 경험을 쌓았다. 4년 전에도 영리했지만 지금은 더욱 영리해졌다.
“천손민족협회의 이름을 달 필요는 없어. 우리는 제국입헌당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다시 시작할 거야.”
재연의 손가락 끝이 누군가의 사진이 첨부된 서류에 닿았다.
제1대학교 동기.
원동인.
그가 맡을 일을 떠올리며, 재연은 수영을 향해 다시 한번 웃어 보였다.
***
“다들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화를 억누르려 했지만, 목소리에 노기가 서리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억누르려다 보니 오히려 목 안을 꽉 채운 노성이 되고 만다.
“독립을 보장하고 합병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여러분의 잡스러운 탐욕까지 지켜준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정도로 거친 어휘를 쏟아낼 만큼, 리안은 격노했다.
한때 울제이 앞에서도 서슴없이 ‘너’라 부르며, 어디 감히 번국의 왕이 제국의 재상을 능멸하려 드느냐고 일갈했던 리안이다.
평화회의가 열리는 곳이라 해서, 다른 나라의 대표단들이라 해서 리안이 격노를 감춰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분노를 감추는 정치가이지만, 이는 다시 말해 필요하다면 거리낌 없이 분노를 드러낼 줄 아는 정치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리안은 이쯤은 거친 어휘로 자신이 격노했음을 동아시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의회 만들고 입헌군주제라고 이름 붙이면 끝입니까? 다당제는 어디 갔습니까? 선거의 원칙들은요? 아직도 18세기입니까? 이것들 보세요. 20세기가 시작한 지 30년이 넘었어요.”
탁자를 세게 내려지는 것도 아니다. 문을 두드리듯 가볍게 두드렸을 뿐인데, 이상할 정도로 소리가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선거 결과만 그럴싸하게 만들어서 지금까지처럼 통치하려고들 했습니까? 이런 제도를 들고 와서 ‘각국은 국민의 뜻에 따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연방 내에서 자치를 누릴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하면, 제가 아 그렇습니까, 할 줄 알았어요?”
리안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냉소는 그 어떤 칼날보다도 날카롭게 각국 대표단의 뒷덜미를 서늘하게 했다.
“차라리 그냥 전제군주제를 들고 오지 그랬어요? 어차피 우리는 민주주의고 선거고 뭐고 할 생각 없고, 구색 갖춰봤자 절차만 번거로워지니 그냥 우리 마음이나 솔직하게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게 낫지 않아요?”
나을 리가 없다. 리안이 비아냥거리는 내용대로 여기에 들고 왔다면, 리안은 정말 진지하게 군사적 침략을 검토했을 테니까.
“무슨 생각이었던 겁니까? 제1차 동아시아 평화회의에서 다이온이 지켜주기로 했으니 아 우리가 할 일 다 했다, 이대로 개혁 안 하고 버티고 있어도 고려가 뭘 어쩌겠어? 우리가 무너지고 공산권이 확장하는 걸 두고만 보겠어? 이런 생각이었나요?”
그런 안일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면 정말 유감이다.
“우리는 여러분 나라의 왕실에 정말로 입조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우리 폐하께선 보르지긴 황족을 대상으로 그렇게 하셨죠.”
왕실에 입조를 요구한다. 이 말은 탕구트, 대예, 보우슈엥의 왕들을 칸발리크로 소환하겠다는 말이다. 당장은 다이온 연방의 ‘구성국’이면서 형식상으로만 ‘봉국’으로 대우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철회해버리겠다는 압박이다.
키타이와 낭키아스를 해체한 것처럼. 여러 왕공의 울루스를 해체한 것처럼.
“왕실을 치워버리고 개혁 의지가 있는 정치인들만으로 정부를 꾸리게 하면 ‘합병하지 않겠다’라는 우리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한 셈이죠. 우리의 유일한 군주이신 폐하만을 섬기는 ‘동군연합’ 형식으로 묶는 게 거기서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왕과 그 주변의 귀족들이 중세적 특권을 놓을 생각이 없다면, 다이온 연방은 체제의 안정을 위해 그들을 강제 철거할 수밖에 없다.
왕이 없어도 나라는 남으니까. 왕이 곧 국가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겐 턱이 떨릴 만큼 충격적인 말이겠지만, 리안은 그딴 건 신경 써주지 않는다.
루우는 이미 게레센제 시절부터 ‘다이온의 보호자’를 자처해왔다. 같은 논리로 저 나라들의 왕에게서 영지를 몰수하고, 왕을 대신해 ‘보호자’로 군림하는 게 가능하다.
동군연합의 논리는 대예, 보우슈엥, 탕구트로도 확장되는 셈이다.
리안이 이렇게 역정을 내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다이온 연방 가입을 추진하며 알티샤흐르가 보인 개혁 성과에 비해, 지난 1년간 역외사국이 보인 성과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알티샤흐르 대표단 앞에서 부끄러웠다.
알티샤흐르 대표단과의 사전 교섭에서 그렇게 으름장을 놓았는데, 실상을 보니 역외사국이 구색만 갖춘 입헌군주정들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둘째는 기강을 잡기 위함이다.
풍군작전 전까지, 그러니까 볼로드의 몰락 전까지 리안의 ‘개혁 주문’은 다이온 연방 내에서 권력 투쟁의 한 방편으로 쓰이고 있었을 뿐이다.
리안이 지적한 대로 역외사국은 다이온 주도 세력 간 다툼을 지켜보며, 다이온의 따스한 품속에서 개혁을 계속 미뤄왔다.
그러니 리안이 이 자리에서 격노를 드러내며 ‘이제 누가 유일한 승자인지’를 분명히 보여줄 수밖에.
“우리가 당신네들이 ‘불순분자’라고 부르는 개혁 세력, 자유주의 세력들 파악 못 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우리나라에는 그런 세력이 없습니다’, 라는 변명을 늘어놓는다면 거짓말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게레센제가 치렀고, 울제이가 치렀고, 볼로드가 치렀고, 황정회가 치렀다.
같은 일을 훨씬 약한 당신네한테 못할 이유가 없다.
당신들을 ‘대체할 세력’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그들을 지원할 수도 있다. 혹여나 그들을 탄압할 생각일랑 접어둬라.
리안의 눈길이 티베트 대표단으로 향하자, 그들 역시 살짝 몸을 떨었다.
“티베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이온과 바라트 사이에서 중립 완충지대로 남을 수 있는 건 ‘그럴 만큼 토대가 튼튼한 나라뿐’이라는 걸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몽골 대표단. 즉 몽골 제국입헌당 정부에서 보낸 대표단이 내놓은 개혁안이 발표됐다.
토지개혁.
소작을 비롯한 ‘농토의 대리 경작’을 금지하고, 농민에게 최소한의 토지를 보장하며, 해당 토지의 매매를 금지한다는 식의 개혁안이었다.
이것을 4개 한족 관리 특구는 물론, 새로 ‘도’로 재편된 한족 지역에서도 시행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한족의 ‘반항심리’를 분쇄할 수 있습니다.”
농촌지역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어르신’들, 지주 혹은 토호라 불리는 이들의 재산을 완전히 해체한다.
물론 이들 중에는 친려파나 친몽파도 있겠지만, 그들을 내버려 두는 이익보다는 해체하는 이익이 더 크다는 게 몽골 정부의 판단이었다.
“지금까지는 지역 유력자를 통해 한족 민중과 간접적으로 접촉해왔습니다. 이는 키타이 정권이든 낭키아스 정권이든 마찬가지였죠. 편리하긴 했어도 한족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반항의 정서를 제거하는 작업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직접 토지개혁을 시행해 한족 민중의 마음을 얻는다는 겁니까?”
“한족 독립운동가들은 공산주의 이념을 흉내 내 ‘당신들이 가난하고 핍박받는 모든 원인은 이민족 통치자에게 있다’고 선동해왔지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몽골 대표단은 자신들의 뻔뻔함에 감탄했다.
모든 독립운동 세력은, 압제에 저항하는 세력은 어느 정도는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최소한 지금 압제자의 통치보다는 나은 미래를 약속해야 하므로.
그다지 노선의 차이가 큰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한족 독립운동의 좌익 세력과 몽골의 좌익 세력이 지향하는 바는 같다.
다만 몽골의 좌익이 집권 과정에서 바라트와 결별하고 한족 동지들을 희생양으로 삼았을 뿐.
그런 씁쓸함을 삼키면서 몽골 대표단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몇몇 지주들은 자신들의 수익을 은행에 예금하지 않고 ‘현금화’했다고들 합니다만,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집에 재산이 남아 있을지, 아니면 몰래 독립운동 세력에 지원해주었을지는.”
“강도를 당했다면서 실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넘겨주는’ 연극을 꾸며낸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예. 때마침 집에 많은 현금이나 귀금속을 보관 중이었는데, 사람은 다치게 하지 않고 정확히 금고만 털어서 가는 ‘기묘한 강도들’에 대한 소문이 있습니다. 피해자가 사건 발생 후 ‘한참이 지나서야’ 신고하는데, 강도들의 인상착의나 무장 상태에 대한 진술도 오락가락한다는 보고가 있었죠.”
“토지개혁은 그런 지주층의 자산을 해체한다?”
“물론 독립운동과 연이 없는 지주층도 있겠습니다만, 그 자식 세대는 또 다릅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친려파, 친몽파인게 부끄러워서 집을 나와 독립운동에 투신한 청년들 이야기는 이제 질릴 정도로 흔하지요.”
그런 이들이 나이를 먹고 조부나 부친의 재산을 상속받는다면?
“잠재적 위협도 분쇄한다…….”
“토지 분배의 결과 한족 민중이 ‘독립의 필요성’에 딱히 절박하지 않게 되면, 한족 독립운동은 그 힘의 근원을 잃어버립니다. 반대로 몇몇 친려, 친몽파 지주들이 희생되는 대신 다이온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자영 농가가 대거 형성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과정은 2차 숙청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리안이 제거하고자 한 ‘기회주의자’들.
근본적으로 다이온 대개혁에 찬성하지 않는 인간들.
이들의 경제력을 토지개혁과 함께 제거한다…… 는 게 몽골 정부의 생각이었다.
또한, 이는 몽골 제국입헌당이 계획한 ‘자신들의 쓸모를 드러내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밀린 과제는 그것대로 신속히 수행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몽골 정부에서 제안한 토지개혁을 다이온 전역에 적극적으로 시행한다는, 새로운 과제 역시 해나가야 합니다.”
리안의 어조는 권장이었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3차 동아시아 평화회의 때는 오늘 이것보다는 나아야 할 것이라는 엄포였다.
“제가 고려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확실히 알게 된 바는, 혁명이 두렵다면 혁명이 필요한 원인 그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겁니다. 개혁은 혁명의 가장 큰 방패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리고 곱게만 보이는 용모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 말은 내전부터 풍군작전에 이르기까지 격류를 헤쳐 나온 정치가의 말이었다. 말의 무게가 회의장을 무겁게 내리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