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군연합(4)
미리안을 다이온 연방의 ‘구성국 중 하나의 수장’으로 머물게 하는 건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미리안의 고려 내 입지를 위협한다면 더는 내버려 둘 수 없다.
사실 견하는 몽골 제국입헌당을 ‘동군연합을 위한 수단’ 정도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다. 견하의 마음속에서 몽골 제국입헌당은 풍군작전의 완료와 함께 쓸모를 다했다.
지금 시점에서 굳이 쓸모를 찾자면, 다이온 연방의 완전한 통합 전 과도기를 맡을 자들, 정도일까.
그런 자들이 감히 리안의 절대성을 위협한다?
“저들이 고려의 권력을 해체하려 들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해줘야겠지.”
섬뜩한 말을 뱉어놓고, 견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저들이 그렇게까지 어리석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말이야.”
“요컨대, 너는 저쪽에서 ‘선’만 지키면 태사의 의견을 따르겠다?”
“내 희망만 고집할 순 없잖아.”
루우는 끄덕이면서, 동군연합의 군주, 황제이자 카간인 자신의 역할을 통감한다.
실권은 거의 없지만, 그렇기에 영향력은 막대하다. 규정되지 않았고 규정될 수도 없는 ‘권위’는 막연한 상상력이 더해져 가없는 위광으로 사람들의 머리 위를 떠돈다.
강력한 권력에 책임이 따르듯, 그러한 권위에도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법이다.
권위를 누리기만 하면서 구중궁궐 깊은 곳에 처박혀 있으려는 자에겐 군주의 자격이 없다.
신하가 유능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떠맡기려고만 하는 군주에겐 자격이 없다.
지금 권위가 최고조에 이른 군주에게도 역시, 갈등을 조정하고 상황을 안정시킬 의무가 있다.
“상소를 받아들일게. 그러고 나면 일단 제국최고회의와 동아시아 평화회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자.”
어전에서 물러나는 견하의 모습을 보며 루우는 마음속에서 도저히 가시지 않는 또 하나의 불안을 되새겼다.
사실상 살아남은 거의 모든 황족을 살해한 미승휴. 자기 가문의 혈통을 왕국 고구려 시대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날조해 황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던 시도. 여기에 편승해 미리안을 정말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이 실권을 쥐려 했던 허동주.
갈등을 피하려고 덮고 넘어갔지만, 이 사실을 아는 안세규도 억누르고는 있지만, 언젠가 이 불안 요소가 터져 나오지는 않을까…… 루우는 견하에게서 그런 불안을 느꼈다.
-미리안이 얼마나 절대적인 권위를 세우든 짐은 상관없다.
그러나 이번 ‘합하’ 호칭 문제는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이런 일이 계속 누적되면 불만을 품는 무리는 분명히 나올 터.
-황제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황제를 위해 분노하는 인간들이 튀어나올 수 있다.
어디에서, 어떤 시점에 황제가 개입해 그 모든 갈등을 조율하고 봉합할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했다는 감회에 젖을 새도 없이, 루우의 머리를 두 옥좌의 무게가 짓누르기 시작했다.
***
다이온 연방의 구성국 대표들이 속속, 칸발리크로 모여들었다.
키타이와 낭키아스라는 두 주요 구성국이 사라지고, 고려의 군주가 몽골의 군주를 겸하는 격변 직후에 열린 제2차 동아시아 평화회의.
이미 다이온 연방의 품으로 들어온 보우슈엥과 대예, 탕구트뿐만 아니라, 중립 완충지대로 남은 티베트도 그간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풍군작전의 전개 과정에 경악하면서도, 그 결과 완전히 다이온의 주도권을 잡은 고려와 어떻게 하면 사이를 더욱 돈독히 할지 고민했다.
이 흐름에는 새로 알티샤흐르가 참여해, 이번 회의에서는 ‘역외사국’이 아니라 ‘역외오국’이라는 용어가 쓰이게 되었다.
북으로는 몽골, 동으로는 탕구트, 남으로는 티베트와 국경을 맞댄 나라, 알티샤흐르.
서쪽을 제외한 세 방향이 다이온 연방, 혹은 연방과 우호적인 중립국으로 둘러싸였다. 이런 지정학적 상황에서 알티샤흐르 홀로 외로운 중립을 지켜나갈 방법은 없었다.
거리가 있다곤 하지만, 남쪽에서 슬금슬금 바라트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활동 범위를 넓혀오는 시대엔 더더욱.
티베트와 그 동쪽으로는 다이온과 바라트가 서로의 영역을 정했지만, 서쪽 중앙아시아 방면에서는 아니었다.
한때는 이곳에도 나름 지역 패권을 잡았던 칸의 후예들이 있었지만, 이합집산을 거듭하다 공산화의 물결에 차례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본래 무굴 제국의 영역이었던 카불을 넘어서서, 후라산, 사마르칸트, 호레즘에 이르기까지 공산 혁명은 확산해 왔다.
이제 혁명의 물결은 그보다 북쪽에 있는 카자흐, 그리고 그 동쪽 알티샤흐르까지 닿고 있다.
“알티샤흐르 자체의 생산성은 그리 높다고 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몽골 서남쪽 국경과 닿아 있다는 점에서 다이온의 안보에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지요. 또한, 돌아가신 선대 카간의 대륙 철도망 계획에도 중요한 교통의 요지입니다.”
알티샤흐르에서 보낸 외교관은, 미리안 앞에서 그렇게 열심히 자기 나라의 ‘유용성’을 입증하려 했다.
그 증거로 알티샤흐르 외교관은 ‘선대 카간’이라는 표현을 게레센제나 울제이가 아니라, 시레문을 지칭할 때 사용하고 있다.
다이온에서 게레센제나 울제이를 찬탈자로 규정하고, 그들의 정통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파악해서 여기 온 듯했다.
당연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사실 같지만,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의 외교적 결례는 드물지 않았다. 그런 결례를 최대한 피하려 했다는 사실은 이 나라가 비록 국력은 보잘것없더라도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노력을 기울이는지 보여준다.
“알티샤흐르의 중요성은 우리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리안은 알티샤흐르 외교관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듯, 조심스러운 어조로 대답하며 몸을 기울였다.
“어떤 시대든 알티샤흐르 지역을 부강하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교통로’로서의 입지였죠.”
타클라마칸 사막이 나라의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맥과 사막의 틈새에 오래된 도시들이 줄지어 늘어선 이유는 그곳이 바로 먼 옛날의 ‘비단길’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든 당나라든 한족 왕조들은 이곳을 장악해 비단길 무역의 혜택을 받으려 했고, 이곳을 통해 중앙아시아에 진출하려 했다.
반대로 유목민이든 이슬람 제국이든 한족 왕조의 야망을 좌절시킬 땐 이곳을 틀어막았다.
“비록 해상무역의 번성, 중앙아시아의 정치적 혼란과 함께 대륙을 관통하는 육상 무역로는 쇠락했습니다만…… 시레문 카간께서 펼친 정책은 다시금 우리 알티샤흐르에 희망이 되었습니다.”
리안은 호오, 하는 감탄사를 속으로 삼켰다. 알티샤흐르는 단순히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러 여기 온 게 아니다.
시레문 시기 진행되다가 몽골 내전 이후 부진했던 대륙 철도 사업을 다시 시작해 달라는 것.
그리하여 유럽까지 연결되는 대륙 철도 무역의 혜택을 다시 누리겠다는 원대한 국가부흥책을 여기 들고 온 것이다.
-약소국이지만 대단한 나라군.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서 번영을 바란다. 국민의 개혁 요구 앞에서 미적거리다가 혁명의 기운이 올라오자 그제야 고려에 보호를 요청한 나라들과는 달랐다.
“다이온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티샤흐르를 받아들이려면 단순히 지정학적 유용성만으론 안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라고 묻듯 리안은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알티샤흐르의 외교관은 알아들었다는 걸 강조하려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이번 2차 동아시아 평화회의는 지난 회의 때 각국에 촉구한 ‘개혁’의 성과를 점검하는 자리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1차 평회회의에 참석하진 못했지만, 지난 한 해 동안 근대적 입헌군주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분투해왔습니다.”
알티샤흐르의 샤는 상당히 깨어있는 자인가. 아니면 귀족들의 정신이 빛나고 있는 건가.
이들 역시 여러 몽골 울루스 중 하나, 차가타이 울루스의 후예이면서, 동시에 비단길을 잇던 상인들의 후예다. 보다 유연한 자세로, 적극적으로 개혁에 임할 수 있었던 건 그런 문화적 풍토도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실제 개혁 성과가 저 말에 얼마나 상응하는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미소를 지으며 알티샤흐르의 외교관을 돌려보낸 뒤, 리안은 다음 손님이 들어오기 전까지 잠깐 휴식을 취했다.
본격적인 평화회의의 개최까진 아직 시간이 있었다. 다른 모든 외교무대와 마찬가지로, 본 공연이 있기 전 이렇게 미리 만나 ‘사전 조율’을 하려는 사람들로 칸발리크는 지금 복잡하다.
풍군작전의 승자이자 다이온의 지배 세력이 된 고려. 그런 고려 정부의 수반이기에 미리안은 1차 평화회의 때보다 더욱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리안 밑의 실무진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그런데도 알티샤흐르의 외교관이 리안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실무진보다는 ‘더 큰 권한’이 필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알티샤흐르의 위상과는 별개로, 그들이 다이온에 들어오면 탕구트와 티베트 문제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자연스레 바라트와의 관계 문제로도 이어진다.
-바라트의 호데노쇼니 인민공화국 지원.
-죽은 볼로드, 바라트 주석 아슬란의 합작이었지.
대륙을 동북 방향으로 길게 관통해, 몰래 아즈텍 대륙 북부의 호데노쇼니 인민공화국에 물자와 인력을 지원했다.
그 지원이 풍군작전 이래 중단되었다가, 작전 이후 다시금 이어지고 있다.
불과 몇 개월이었지만, 그 단절이 호데노쇼니 인민공화국에 얼마나 치명적으로 작용했을지는 미지수다.
-그간 아즈텍 내전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알티샤흐르, 티베트, 바라트…… 문제는 점점 복잡해져만 간다. 늘 느끼는 거지만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찾아오는 건 휴식이 아니라 그 문제의 뒷수습이다.
정점에 우뚝 서서 빛나는 자를 바라보며 모두가 머리를 숙이지만, 숙인 머릿속에는 계산이 이어진다. 정점에 선 자는 그 계산을 배려하고 각자의 입장을 조율해야 한다.
-알티샤흐르도 풍군작전에 반응한 것이겠지.
알티샤흐르가 티베트처럼 넓은 국경을 바라트와 공유한 건 아니지만, 알티샤흐르는 공산권인 사마르칸트, 카불과도 국경을 맞대고 있다.
즉 티베트를 중립 완충지대로 두었듯이 될 수 있으면 알티샤흐르도 바라트와의 완충지대로 두는 게 좋겠지만…… 여기서 알티샤흐르의 손을 뿌리치면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는 알티샤흐르 내부의 동요. 개혁에는 반드시 일종의 ‘성장통’이 따르고, 그 성장통을 거부하는 반발 세력이 나타난다. 여기서 개혁가는 선택해야 한다. 반발 세력을 피떡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어떤 대가를 주어서 달래야 할 것이다.
아마 개혁을 참고 견디는 대신 다이온의 품에 들어가 각종 군사적,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으리라 약속했겠지. 그런데 고려가 알티샤흐르의 손을 쳐내버린다?
알티샤흐르의 현 정권은 개혁에 반발한 반동 세력, 혁명을 바라는 좌익 세력 사이에 짓눌려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자리에 바라트가 파고들면 사태는 더 복잡해진다.
둘째, 다이온의 보호를 바라는 다른 나라들의 동요. 이들은 눈앞에서 보호를 청하는 나라가 외면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다이온 체제에 기댈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한족 특구인지 뭔지 때문에 영토를 내어주다시피 하면서 다이온의 뜻을 따르는 건, 오로지 불순분자들의 혁명을 막아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개혁을 그만두고 철저한 압제로 정책을 전환하는 게 낫지 않은가.
결국 알티샤흐르의 손을 놓을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