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군연합(3)
태사부에는 분명 주견하보다 급이 높은 이들이 있다. 당장 나제홍 실장도 태사의 직속부하이자 주견하의 직속상관이다.
그런 이들의 이름을 굳이 빌리지 않고, 주견하 본인이 대표로 나서서 미리안의 칭호를 높일 것을 황제께 상주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이것이 어떻게 비칠 것인가.
-주견하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태사부 내에서도 드높다는 소문이 나겠지. 국내든, 국외든.
상소를 읽던 루우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상소는 형식에 불과하다. 진심은 친구와 직접 대화를 해봐야 알 수 있으니까.
“옛날 같았으면 합하 다음에는 전하, 그렇게 높이다가 황위를 찬탈할 셈이냐는 비난에 시달렸을 거야.”
루우의 말에 견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민망할 정도로 고사를 인용해가며 리안을 추켜세운 상소문이었다.
그러나 리안의 행적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그녀가 세운 공로 자체에 거짓은 없었다.
“하긴 역대 한족 왕조 중에는 그런 식으로 교체된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신하로 공을 세운다. 그냥 공을 세우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를 재건하는, 마땅히 군주의 역할이어야 했을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권위마저도 군주를 뛰어넘는다.
그런 자는 신하로만 머무는 게 아니라, 일종의 작은 군주가 된다. 자신의 궁궐을 짓고 부하가 아닌 ‘신하’들을 거느리게 된다. 그들은 이제 상사에게 자신을 칭할 때 ‘신(臣)’이라 한다.
무엇보다도 작위를 ‘세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제후라고 한다.
그러다 마침내, 이 제후가 상위 군주의 조정마저 완전히 대체함으로써 이른바 ‘선양’이라 불리는 찬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대나 중세도 아니고, 바로 얼마 전에 보르지긴 왕공의 특혜까지 폐지한 마당에 타이시를 공이나 왕에 봉할 수 있을 리 없지.”
“물론 누나네 가문도 계보를 이리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방계 황족 정도는 있을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 자기 종묘를 세울 수는 없겠지.”
루우의 말대로 보르지긴 황족의 특혜가 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 고려는 왜 루우가 황제가 되어야 하는지 헌법에 명시해 두었다.
리안이 최고권력자일 수 있는 건 군주라는 ‘최종적 권위’만큼은 절대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전히 ‘신하’인 몸으로 최고의 호칭을 받도록 하자.
“‘합하’라. 요청 자체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어. 국민들도 이 정도의 보상은 태사에게 당연하다고 수긍하겠지. 이미 여러 장군, 원수들도 ‘각하’라 불리는데 태사가 그들과 같을 수는 없다는 명분도 적절해.”
다만, 하면서 황제는 의문을 덧붙였다.
“태사의 승인은 받은 거야?”
“애초에 이런 일이 당사자의 지시로 이루어지면 민망하지 않겠어?”
하긴 그렇다.
옛적 찬탈자 중에 본인이 나서서 찬탈하겠노라 선언한 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부하들이 알아서 주군의 의중을 읽고 더 높은 자리로 ‘추대’했다. 주군은 그 추대를 딱히 거부하지 않았고.
“그렇지만 이번엔 정말 태사의 승인이 없었겠지. 네 독단이잖아, 주견하?”
견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아주 살짝, 옅어졌다.
“그래. 독단이야.”
“그렇다면 진짜 목적은 태사의 권위를 높이는 데 있는 게 아니군.”
루우는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던 고개를 이번엔 왼쪽으로 기울였다.
“시험해 볼 셈이지? 독단으로 어디까지 가능한지. 이만큼의 독단은 어떤 반응을 끌어내는지.”
“그리고 이 정도의 제안에도 반발하는 무리가 있는지, 없는지.”
루우의 말에 견하는 그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 마당에 네 상소에 대놓고 반발할 사람은 딱 하나, 태사뿐이겠지.”
루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사마저도 시험하려 드는가, 주견하.”
아주 잠깐의 정적이 황제와 감찰국장 사이를 흘렀다.
루우는 생각한다.
태사부 아래 정치경찰실 아래 감찰국장. 원래대로라면 감히 자신을 쳐다볼 수도 없었을 견하의 위치. 그러나 이 청년의 머리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고려의 국력 덕분에 언젠가는 게레센제와 울제이를 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먼 미래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 미래라는 변수 앞에 또 카간 자리가 얼마나 멀어졌을지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시간을 이 주견하가 기적적으로 줄여냈다.
만약 수십 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한다면…… 과연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룰 수 있었을까.
-만약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면…….
루우가 알고자 하는 것, 알아내서 방지하고자 하는 모든 사태는 또 얼마나 위험하게 흘러갔을 것인가.
물론 이는 월권이라고도 볼 수 있고, 직권남용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견하의 행동을 묵인해왔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아니, 묵인 정도가 아니었다.
루우 역시 견하를 은근히 자극하고, 등을 밀었다.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드러난 그녀의 모든 행동은 그러했다.
여기서도 견하의 대답을, 한계를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그의 야망을 목도하고서도 침묵할 것인가?
-만약 언젠가 미리안과 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긴다면…….
주견하로 미리안을 대체할 수 있지 않나.
이런 계산을 해내고 마는 자신이 싫다. 분명 자신은 처음 고려민국 임시정부에 몸을 맡길 때만 해도 순전히 전사에 더 가까웠다고 기억한다. 그러던 게 어느새 이렇게 정치적인 저울질을 하고 있다.
얼마나 친하든, 얼마나 소중하든, 사람을 서슴없이 저울 위에 올리며.
“누나를 시험할 생각은 없어.”
“태사가 반대하면 물러서겠다는 말이야?”
“반대한다면 설득은 시도해봐야지. 설득해도 안 된다면 물러나고. 그래도 일단은 ‘누나 외의 다른 누군가’가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정도는 파악해 낸 뒤일 테니까,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설득할 생각이군?”
그리고 주견하가 설득을 시도해보겠다는 건, 설득해낼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나가 그렇게까지 반대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데. 기껏해야 호칭 문제야. 거기에 따르는 약간의 권위 상승을 문제 삼진 않을 거라고 봐.”
반발도 거의 없을 거라고 예상한다. 왕호를 받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합하’라는 호칭 하나. 그것도 원래 재상에 오른 자가 당연히 받았던 것이다.
선대 태사 미승휴가 자신의 지위가 황제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이고, 또 원수 계급으로서 듣던 호칭이 익숙해 ‘각하’를 고집했을 뿐이다.
“만약 누나가 반대할 거였다면 내가 태사부 사람들의 서명을 받으러 돌아다닐 때 말렸겠지.”
그건 미리안 몰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아직 미리안과 정면 대립할 생각은 없는 건가.
루우는 약간 안도했다. 지금 견하와 리안이 대립한다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은 없었다.
정치적으로든,
아니면…… 감정적으로든.
루우는 견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끄덕였다.
“다른 ‘각하들’과 태사 사이의 서열을 분명히 한다는 취지는 그럴싸해. 견하 네가 뒤에 감춰둔 의도만으로는 상소를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하며 루우는 말을 이었다.
“짐이 상소를 받아들이고, 제국최고회의에 문제를 논의토록 조칙을 내리고, 그래서 결국 제국최고회의도 찬성하고 태사도 받아들인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야.”
이번에는 견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짐은 이제 고려와 몽골, 두 나라의 군주라고. 두 나라의 정부와 의회가 짐을 섬겨. 짐 아래에서 두 나라는 동등하지.”
고려어로는 태사(太師)라고 읽는 재상의 자리. 몽골어로는 타이시(太師)라 읽는 그 자리.
두 자리는 고려 황제와 몽골 카간이 동등한 것만큼 동등하다.
이제 아예 두 군주의 자리가 하나가 되었으니, 두 태사, 혹은 두 타이시는 동렬의 신하로서 마주할 일이 더욱 많아졌다.
“시반 타이시가 미리안 태사의 괴뢰나 다름없다고 해도, 겉으로 드러난 형식은 그렇지 않아. 그리고 형식은 형식이기에 존중받아야 해.”
“나도 형식의 중요함은 알아. 몽골인의 감정이 달린 문제지. 다이온 연방의 원활한 통치에는 몽골인의 협력이 없어선 안 되고.”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은 몽골인을 ‘관리자 계급’으로 상정하고 있지만, 그런 상태가 ‘고려인의 하수인’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한족의 주인’이라는 점에 몽골인들이 끌리도록 해야 했다.
그러려면 매사가 고려 측의 의사대로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몽골 측에 동의를 구하는 형식을 취해야만 한다.
“……이번 동아시아 평화회의에서 두 태사의 회담이 있을 거야. 그 자리에서 구체적인 부분이 결정되겠지.”
루우는 그렇게 말하는 견하의 눈을 살피듯 들여다봤다.
지금 그는 둘러대고 있다.
주견하는 결정적인 곳에서 ‘남이 알아서 하겠거니’하고 내팽개치는 남자가 아니다.
“미리안의 절대권력을 확보하는 데 4년이나 되는 시간을 쓴 네가?”
짐을 속이려 들지 마, 라는 태도로 루우는 고개를 저었다. 직접 말로 하지 않아도, 그 고갯짓만으로도 견하는 충분히 루우의 말을 알아들었다.
견하는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대답했다.
“몽골 제국입헌당은 분명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려 들 거야. 누나는 그들이 일정한 역량을 입증하면 큰 양보를 할 테고.”
“미리안 태사는 연방을 정말 ‘연방’으로 두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너는 아니지, 라는 말은 삼켰다. 자신이 바라는 미래상과 리안의 결정 사이에서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으려는 견하를 괴롭히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루우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누나가 결국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따라야지. 하지만 몽골 제국입헌당이 함부로 ‘선’을 넘지는 못하게, 확실히 경고해 둘 생각이야.”
“‘선’이라면, 어떤?”
“이를테면, 누나의 ‘독립 보장’을 믿지 못해서 고려를 내부에서 흔들려는 수작이라든지 말이야.”
애초에 견하가 현 몽골 제국입헌당의 전신, 몽골의 범좌익 운동과 접촉할 수 있었던 건 고려 내 좌익의 협력 덕분이었다. 즉 몽골 제국입헌당은 분명 고려 내에 끈이 있다.
그것은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일 가능성이 크지만…… 몽골 제국입헌당 쪽에서 ‘새로운 경로’를 개척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예를 들자면 풍군 작전이 벌어지는 동안은 조용했던 안세규라든가.
“당장 이번 총선은 어렵더라도 다음 총선거에서, 혹은 그다음 총선거에서 고려 제국입헌당이 의석수를 잃게 하려고 고려국민당과 협력을 시작한다든가.”
고려의 제국입헌당이 힘을 잃을수록, 몽골의 제국입헌당은 점차 독립해가리라.
“고려국민당, 사회민주당, 공산당은 몽골 제국입헌당을 통제할 힘이 없거든.”
“몽골 제국입헌당 쪽에서 본다면 효과적인 작전이긴 하네. 하지만 그건,”
“내가 참아줄 수 없는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