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11)
언론은 신나서 떠들어댄다. 황제 폐하의 신성하심이 식민지인들의 테러를 막아냈다고.
모든 신문 기사에 그런 말이 붙은 건 아니지만, ‘고려의 황제 루우 테무르 못지않은’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다분히 부러움을 품은 서술이다…….”
사람들은 은근히 고려에서, 몽골에서 일어난 일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또 부러워했던 것인가.
신은 우리 곁에 있는 것 같지 않다. 경제 대공황,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내전, 불안해져만 가는 식민지 정세는 로마 제국마저 내전으로 몰아넣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내전은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토록 불안한 시대에, 정치인들이든 사회 상류층이든 누구 하나 정신적 기둥이 되어 주지 못했다.
그 점은 에반겔로스도 반성하고 있다. 그는 정당도 정국도 장악하지 못했고, 탁월한 아이디어로 획기적인 정책을 제안하지도 못했다. 그의 동료들과 정적들 모두가 기대했듯이, ‘얌전히 다음 수상 취임 전까지 시간을 때우는’ 역할만 충실히 수행해왔다.
“시민들은 숭배할 대상이 필요했다. 확실히 그들 곁에 있고, 그들을 지켜주며, 명확한 미래상을 제시해 줄 무언가가.”
벨리사리우스 황제의 등장은 시민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물론 로마 시민들이 갑자기 신을 버리고 벨리사리우스를 새로운 신으로 숭배하려 드는 건 아니다. 벨리사리우스 황제는 ‘신이 시민들 곁에 있다는 증거’로 자리 잡았다.
그 점에서 벨리사리우스는 무척 지혜로웠다.
“자신이 새로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원래 숭배받던 신의 후광을 등에 업는 게 훨씬 낫지.”
사도들, 성인들처럼.
천사 같은 외양을 연출한 것도 그런 계산 속에서 한 행동일 터이다.
벨리사리우스는 단순히 고려 황제를 흉내 내는 선에 머무르고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을 종교의 영역에 교묘하게 융합시킨다.
“……내게 없는, 권위. 카리스마.”
그것을 이제 막 즉위한 젊은 황제는 지니고 있다.
“……황제의 그런 면모를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이 위기를 돌파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에벤겔로스는 자신을 돌아보며 질문을 던진다.
-자신에게 황제를 이용할 수 있을 만한 수완이 있는가?
에반겔로스에게 지혜가 있다면, 자신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면이 그러하다고 할 것이다.
“나는 폐하를 이용할 수 없다. 충성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거지.”
아마 기껏해야, 황제의 이름을 빌려 정책 몇 개를 원활히 처리하는 정도가 한계일 터.
그나마도 ‘굳이 에반게로스가 아니어도 되잖은가?’라는 의문에 부딪히면, 수상의 임기를 무사히 마친다는 에반겔로스의 목표는 좌절된다.
-폐하께서 지금 거둔 성과를 내 자리를 안정시키는 데 활용할 수는…….
어렴풋이 떠올랐던 아이디어가 구체화하여 간다.
“……황제께 권력을 반환한다면?”
에반겔로스가 이런 발상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로마의 법이 황제의 권력을 상세히 규정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군주가 ‘관습’을 존중해 그 자리를 인정받는 것과 달리, 로마 제국은 명확한 법으로 군주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나라도 군주를 헌법으로 규정하기 시작했지만, 그 역시 로마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로마법이 황제를 법으로 규정하기까지, 그 과정을 살펴보려면 반드시 두 사람을 언급해야 한다.
첫째는 초대 아우구스투스인 옥타비아누스.
둘째는 대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다.
초대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버지,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공화국 체제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이유로 암살당했다.
이 일을 교훈 삼아 초대 아우구스투스는 ‘공화국이라는 체제 속에서 절대권력자’를 기획했다.
그 결과 집정관의 여러 권리, 최고신관, 최고사령관 등 공화국의 법에 규정된 여러 권리를 한꺼번에 받는 식으로, ‘명확히 군주라고 규정되지 않은’ 군주가 탄생했다.
세습이 ‘당연하게’ 여겨진 다른 군주국과 달리, 로마에서는 ‘공화국의 상속법에 따라’ 여러 권리가 후계자에게로 상속되는 형식을 취했다.
즉, 초대 아우구스투스는 어디까지나 ‘특별한 권리를 인정받은 공화국 시민’이지, 군주의 자리를 신설하고 즉위한 게 아니었다.
한족이 황제라는 새로운 개념의 군주를 만들어낸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공식적으로는 공화국 시민. 때문에 로마의 주변 민족들도 군주의 칭호로 그저 사람 이름일 뿐인 ‘카이사르’나 최고사령관이라는 뜻에 불과한 ‘임페라토르’를 가져다 쓸 수밖에 없었다.
보나파르트 황실 전의 신성 제국에서 쓴 ‘카이저’라는 호칭은 카이사르에서 온 것이고, 보나파르트 이후 ‘앙프뢰르’는 ‘임페라토르’에서 온 것 아니던가.
초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500년 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엔 그런 임페라토르가 ‘공화국 시민 중 일인자’가 아니라 ‘군주’로서 이미 확고해진 뒤였다.
그렇기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군주로서의 임페라토르가 어떻게 초월적인 권력과 권위를 지니는지 법으로 다시 한번 설명해야 했다. 교종의 권위, 혹은 교회의 권위를 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신앙과 관습도 존중하지만, 법적 근거를 다시 요구하는 것. 그것이 로마인과 다른 민족을 구분 짓는 중요한 기준이니까.
관습과 신앙, 영토나 위세만으로는 로마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프랑크 야만인의 왕조, 투르크인의 왕조는 로마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야만인들일지라도 로마의 ‘법’을 받아들인다면 로마인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공화국 이전, 로마가 왕국이던 시절의 거의 전설상으로나 남아 있는 법까지 박박 긁어 올려 집대성했다.
그것이 이른바 『로마법대전』이다.
이에 따라 로마의 황제는 먼 옛날 로마의 왕이 그러했듯이, 인민들에게 주권을 위임받았기에 군림할 수 있다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 권력을 다시 두 의회와 수상이 ‘위임받았다’. 따라서 위임받은 권력을 다시 돌려준다는 형식이면 문제가 없겠지.”
애초에 로마 제국에서 수상을 의미하는 단어인 ‘메가스 로고테티스(Megas Logothetis)’는 원래 황제의 ‘대(大)비서관’이라는 뜻 아니었던가.
“비서의 우두머리가 다시 비서로 돌아갈 뿐이다.”
에반겔로스는 펜대를 굴리기 시작했다. 황제를 알현하고 입으로 전할 것도 있지만, 그 전에 문서로 확실히 정리를 해둬야 한다.
자신의 이 발상이 로마 역사에 어떤 전환점으로 남을지,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에반겔로스는 신나게 펜을 휘둘렀다.
***
이렇게까지 일이 잘 풀려도 좋은 것인가?
가슴에 차오르는 이 감정은 분명 기쁨이다. 자신은 이제 막 황제가 되었고, 원하는 바를 얻기까진 수년에 걸쳐 정계에 공작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알아서 권력을 내밀어 올 줄이야.
그러나 기쁨에 따라야 할 웃음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위엄을 지키려고 억누르는 것도 아니다.
기쁨에 앞서, 수상이란 작자와 그를 수상으로 앉힌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이 커서일까.
“유럽의 정세는 확실히 안정되었고, 대공황이 찾아오긴 했어도 로마의 국력은 가히 새로운 중흥기를 맞이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지.”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느끼기엔 무척이나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수도 콘스탄티누폴리가 함락의 위기까지 몰렸던 세계대전에 비하면 확실히 그렇다.
“평화로운 시기니까 ‘입헌군주제와 민주주의를 가장 잘 수호할 자’를 수상으로 선출할 필요를 못 느낀 건가. 그냥 이리저리 적당히 정권교체를 해도 되겠거니 해서 멍청하고 자존심만 높은 놈을 수상으로 만들었군.”
벅차오르던 감정은 어느새 식어버리고, 대신 경멸감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체제는 평화롭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밤낮으로 체제를 수호할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을.”
벨리사리우스 황제의 한탄 비슷한 읊조림에, 부관 요르요스는 황공하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짐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지 않았나. 체제가 무엇이고 왜 지켜져야 하는지 이해도 못 한 인간이, 법조문 몇 개로 이렇게 손쉽게 체제를 변조시키다니…….”
팔랑팔랑, 벨리사리우스의 손아귀에서 에반겔로스가 보낸 서류 뭉치가 흔들린다.
수상의 권력을 다시 황제에게로. 그런 중요한 내용을 담은 법 초안이었고, 벨리사리우스의 계획에 있어 아주 중요한 물건이었지만, 정작 황제는 아무 가치도 못 느낀다는 듯 아무렇게나 흔들고 있다.
“폐하.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면, 폐하께 권력을 돌려드려야 할만한 상황이 되었고, 또 폐하께서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하신 분이기에 이렇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요르요스의 손끝 방향에는 신문이 놓여 있었다.
“‘폐하의 위엄 앞에 사그라든 식민지 불순분자의 수작질’. 언론은 이른바 ‘비폭력 저항’을 이렇게 부르는 모양입니다. 이렇듯 식민지 안정에 누구도 부정 못 할 업적을 드러내셨으니 폐하께서 직접 나라를 이끄시길 바라는 이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진압군의 회의감도, 벨리사리우스가 드러낸 모습과 그에 따른 이교도의 발작적 공격에 많이 사그라들었다.
로마군은 이제 무자비한 진압에 임하면서도 그런 행위가 곧 ‘신의 뜻’이라 인식하기 시작했다. 주저 없이 쏘고, 찌르고, 불태운다.
“이례적인 개종 증가세. 식민지에서의 ‘로마 학교’ 건설. 그리스어 학습자의 증가. 황제 폐하께선 적극적으로 로마화하려는 주민들에게 각종 혜택을 베풀 것을 의회에 촉구하시다. ……이런 기사도 있군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할 수 있는 한 오래 ‘자유세계’의 일원이라는 위치를 버려서는 안 되네. 식민지 정책으로 무자비한 수단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관용 정책’을 버리진 않았다는 식으로 비칠 필요가 있지.”
황자 살해 사건, 교종청과의 갈등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사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황제로서 국내에서의 의무를 다했기에’ 벨리사리우스는 여러 방면에서 승리를 거두는 중이었다.
자유세계에는 평화와 외교적 해법을 중시하는 군주라는 평판이 퍼져나간다.
교종청은 오히려 뻔뻔한 대처를 한다는 평을 받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입장이 곤란해진다.
벨리사리우스가 드러낸 천사와도 같은 모습은 교종청이 주장하는 황자들의 추문마저도 불식해버릴 만큼 강렬했다.
마침 신성 제국도 이번 기회에 교종청의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칠’ 심산이었기에, 이 방향에서 벨리사리우스는 압도적 우위를 점했다.
국내, 식민지에서 거둔 성과는 앞서 벨리사리우스와 요르요스가 나눈 대화처럼 시민, 군, 정계 모두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폐하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렇게 했을 지경이라는 것은, 곧 폐하께서 그렇게 하셔야만 할 상황이 무르익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벨리사리우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황궁에서 그런 대화가 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제국의 상원과 하원은 ‘로마 인민의 주권 위임 재조정에 관한 법률’,
훗날, ‘황제수권법’이라 불리게 될 법률을 통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