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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34화 (434/541)

아우구스투스(10)

벨리사리우스가 교종청이 저지른 황족 암살 사건에 이성적으로 대처하자, 유럽의 여론은 상당히 우호적으로 반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인들은 ‘유럽 대륙에서 일어날 또 다른 세계대전’을 두려워하니까. 그런 전쟁을 황제의 이성적 대처로 막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는 영웅으로 여겨질 수밖에.

“식민지를 비롯한 국내 안정까지 황제가 주도해서 이뤄낸다면 그를 존경하는 여론은 더욱 커지겠지.”

“그렇다면 한동안 로마의 주변부는 조용하겠군요.”

“‘밖’을 조용하게 만드는 게 벨리사리우스의 의도라면, 당연히 이건 ‘안’의 일에 집중하겠다는 뜻이지.”

벨리사리우스는 로마 제국 ‘안’에서 무엇을 할까?

“벨리사리우스는 황제가 되는 선에서 멈출 인간이 아니죠.”

“옥좌에 오르려고 형제도 죽이는 인간은 많지만, 벨리사리우스는 그 핏값을 정확히 계산할 줄 아네. 형제의 피는 고작 옥좌 하나를 사기엔 지나친 비용이야.”

“옥좌 그 너머의 것을 노리겠군요, 그럼.”

로마 황제는 ‘시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위임받는다’라는 로마법의 전통, 그리고 ‘최고사령관’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닌 자리였다. 그 때문에 제국의 오랜 역사에서 황제 자리를 두고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군인은 곧 시민이었고, 따라서 군대의 지지를 받은 자는 시민의 지지를 받은 자였기에 황제를 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류리크-팔레올로고스 왕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루스계 공국에서 들어온 황위 계승자는 로마의 전제군주가 되기보다는, 다른 공국들의 느슨한 연맹체에서 맹주가 된 것과 같이 행동했다. 로마도 그 연맹의 구성원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그에 따라 로마 제국에는 상당한 수준의 ‘권력 분립’이 이루어졌다.

상하원 양원 제도의 정비, 각 의장의 권한 강화, 수상에 대한 권력 ‘양보’ 등의 개혁이 이때 시행되어, 마침내 로마 제국도 입헌군주정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벨리사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하는 과정은 고려의 왕서라가 황제로 즉위하는 과정을 본떴지.”

이제 그녀는 몽골의 루우 테무르 카간이라고도 불린다.

“이단의 신비한 힘을 대중에 실컷 드러내서 민심을 사로잡아가는 것도 똑같죠.”

“황제의 인기는 곧 권위로 연결되네. 지금 고려 황제를 칭하는 계집은 최고조의 권위를 누릴 테지. 벨리사리우스도 그렇게 될 테고.”

하지만 토칸도 지적했듯이, 벨리사리우스는 권위의 확보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귄위 너머, 권력을 잡으려 들겠지. 왜냐하면 벨리사리우스는 왕서라뿐만 아니라 미리안도 모델로 삼으려 하니까.”

미리안이 권력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가 최고 권력자로 돌아왔듯이.

“로마 황제는 양보했던 권력을 되찾으려 할 걸세.”

“입헌군주제를 폐기하고 친정(親政)이라도 할 셈일까요?”

“아마 그게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 싶군.”

벨리사리우스는 루우 테무르에 미리안을 합한 존재가 되려 한다. 이단의 능력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지극히 위험한 인간이다. 이런 자가 로마의 절대권력이 된다면…….

“정세는 격변할 걸세, 토칸.”

“제가 지금까지 몇 번의 격변을 겪어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번엔 다를 걸세. 우리의 ‘비장의 수’도 벨리사리우스 앞엔 통하지 않아. 이단으로도 그는 정점에 이르렀고, 신종에 대한 이해도 우리 이상일 걸세. 여기에 정치적인 힘까지 더한다면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나?”

무엇보다도, 벨리사리우스가 권력을 얻고 난 이후의 행보를 예측할 수 없다. 그의 최종 목적이 미친 이상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 대체 얼마나 더 미친 짓을 벌일지는 알 수 없다.

살인은 차라리 인간의 일이다.

벨리사리우스가 앞으로 벌일 일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리라.

그런 소름 돋는 예감이 두 사람의 뒷덜미를 잡아챈다.

“난 유럽을 떠나겠네, 토칸.”

“떠난다면 어디로……?”

“글쎄. 그것까지 말해줄 의리는 없지 않나. 한 가지, 자네도 유럽에 더 미련 두지 말고 어딘가로 떠나라는 충고 정도는 해주지.”

신수덕은 무심한 시선을 시체들과 폐허 위로 던졌다.

“시체들을 변이하게 만든 요인은 벨리사리우스 본인일지도 모르네.”

토칸도 어렴풋이 그런 추측을 했기에, 놀라지도 반문하지도 않고 침묵을 지켰다.

“이건 정치적 의도를 지닌 행동이면서, 동시에 벨리사리우스가 벌이는 또 하나의 실험일 수가 있어.”

“신앙을 자극해 저항 세력의 노선 전환을 유도하면서, 그 신앙을 이용한 실험도 한다……. 신앙이 어떻게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가, 를.”

“벨리사리우스는 그 데우스라는 신종을 이용해 뭔가를 손에 넣은 게 틀림없네. 내 추측으로는…… 그는 살아서 돌아다니는 신종의 씨앗, 혹은 파멸인이 된 게 아닌가 싶군.”

“어쩌면 우리가 지금껏 개념을 정의해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일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한 인간의 깊은 신앙심. 그것을 기폭제 삼아 파멸인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능력.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런 작용을 한다면, 인류 대부분은 벨리사리우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반대로 이 말은, 벨리사리우스가 마음만 먹으면 인류 대부분을 파멸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는 일단 로마를 떠나겠네. 자네는 어쩌겠는가, 토칸?”

토칸은 신수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당장은 안 떠납니다. 해 볼 일이 하나 남았거든요.”

***

로마 제국의 수상, 에반겔로스의 별명은 ‘얌전한 자’였다.

작년, 1932년에 처음 수상으로 선출된 그는 임기 중반에 맞이한 격렬한 변화에 매일같이 불안한 듯 눈알을 굴려댔다.

“누가 나더러 퇴진을 요구하면 어쩌지?”

먼 동쪽 나라, 내전에 뒤덮였던 몽골의 재상은 처형당했다고 들었다. 설마하니 로마 제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까 싶지만, 에반겔로스에게도 정치적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은 명백했다.

“대체 왜 하필 내 임기에 이런 일이…….”

수상의 임기는 4년.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 에반겔로스 전까지 6명의 수상이 더 있었지만 모두 별다른 일 없이 임기를 마쳤다. 식민지가 시끄러운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니, 에반겔로스도 큰 탈만 나지 않게 수습해 차기 수상에게 넘겨주면 될 일이었다.

“애초에 나는 그저 수상의 명예를 한번 누려보고 싶었던 것뿐이지, 꼭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단 말이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위기. 전임 수상과 여당은 그 위기를 둘러싸고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전임 수상은 임기를 마치긴 했지만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여당은 야당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 결과 각 정파 간 충돌을 방지하고 일단은 ‘무난한 현상 유지’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에반겔로스가 수상으로 선출된 것이다.

“그 작자들에게 결국 나는 시간을 때우는 용도의 수상, 징검다리 수상이겠지.”

풍파가 지나갈 때까지만 버텨주면 되는 사람. 그리고 적당히 무능하다고 비판을 가한 다음 물러나게 하면 되는 사람.

그때쯤 되면 대공황의 충격도 적당히 가라앉을 테니, 새로 선출한 수상이 사태를 마무리 지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되면 내 정치 생명은 끝장이다.”

‘얌전한 자’ 에반겔로스는 얼마든지 희생양으로 삼아도 된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에반겔로스가 갑자기 여당을 장악하거나, 정적을 탄압하는 등의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는 일종의 정파 간 ‘휴전’의 증거이자 딱히 큰 장점도 단점도 없었던, 과분했던 수상 자리를 스쳐 간 인물로 로마 정치사에 기록되리라.

“다들 그런 심산이겠지.”

하지만 에반겔로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딱히 큰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상이나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독특하게도 그는 부패나 추문과도 거리가 멀었다.

다만 한 가지, 미적지근한 태도 뒤에 숨겨놓은 자존심만은 강했다.

“나는 임기를 마치기 전에 물러나지도 않을 테고, 정계에 발끝 한 번 담가봤다가 떠난 아마추어 정치인으로 남지도 않을 것이야.”

불명예스럽게 임기를 마쳐 손가락질당하는 것. 그런 용도로 쓰이다 폐기당하는 것. 그것만큼은 에반겔로스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 사태를 무슨 수로 돌파하느냔 말이다…….”

고대나 중세의 내전에 따른 황실 멸문도 아니고, 황자가 일곱이나 떼죽음을 당했다. 그것도 외국인의 손에.

용의자는 베드로의 검인지 뭔지 하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교종청의 무력 집단.

“교종청이 무력으로 세속의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중세에 이미 끝난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에반겔로스는 당장 들어온 보고를 이해하는 것부터 힘겨워했다. 상식을 부정하고 새로이 알게 된 것을 상식의 영역에 다시 채워 넣는 건, 누가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교종청은 이 사건을 두고 황자들이 사악한 의식을 치르다가 일어난 사고라 주장했다. 베드로의 검은 의식을 중단시키러 들어갔다가 사고에 휘말렸다고.

에반겔로스는 수상으로서 당연히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해야 했으나, 사건의 심각함 때문에 한 번, 교종청의 그런 주장 앞에 당황해서 또 한 번 시간을 허비했다.

사람은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일어나면 얼어붙기 마련이니까.

하다못해 적의 기습침공이라면 적어도 수개월 전부터 외교 관계가 망가진다든가 하는 식의 징후가 포착된다.

그러나 있는 줄도 몰랐던 집단에 의해, 그 집단의 배후가 도저히 저지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이후 일어난 유스티니아노스 5세의 붕어야 상상해온 일이니, 에반겔로스는 수상으로서 할 일을 잘 처리해냈다. 하지만 그 아들 일곱이 먼저 떼죽음을 당하리라는 건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건의 대처에 있어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만으로 에반겔로스를 탓할 순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막내 황자, 아니 폐하께서 잘 대처해주셨다.”

황실을 대변할 사람이 벨리사리우스 한 명뿐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벨리사리우스의 탁월한 성명은 에반겔로스의 짐을 많이 덜어주었다.

원래는 벨리사리우스가 짊어져야 할 짐을 수상이 덜어주는 게 옳지만, 근래 피폐해진 에반겔로스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진 못했다.

문득, 에반겔로스의 안도는 어떤 아이디어로 발전했다.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신문 1면에는, 보기만 해도 저절로 숭배의 감정이 솟아오르는 황제 폐하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벨리사리우스의 대관식에서는 누군가 ‘신이 천사를 황제로 보내주었다’라고 찬탄했다는데, 실로 그 말이 옳았다.

벨리사리우스는 신이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에반겔로스를 위해서도 보내준 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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