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8)
견하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생각해낸 바를 입에 담았다.
“고려 정부, 혹은 제국최고회의, 또는 제국입헌당이 몽골 제국입헌당을 지도한다는……?”
리안은 견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마르코 폴로와의 대화, 그가 보여준 모든 것은 결코 잊히지 않는 강렬한 꿈처럼 리안의 뇌리에 남았다.
리안은 고려와 몽골이 말 그대로 ‘동군연합’ 체제로 남길 바란다.
하나의 황제이자 카간을 받들되, 행정 입법 사법을 각자 갖춘 독립된 상태로.
하지만 견하의 머릿속에 있는 「화림계획」이 지향하는 바는 분명하다. 연방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겠다는 말은 곧, 두 정부를 통합하겠다는 말.
견하는 몽골 제국입헌당의 ‘지도’를 입에 올리면서, 언젠가 두 당을 하나로 만들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제국최고회의와 쿠릴타이도 하나로 만들고, 나아가 황제와 카간뿐만 아니라 두 나라의 태사도……
……하나로.
동군연합이 아니라 완전히 통합된 국가로 나아갈 계산을 하고 있지 않을까.
1936년, 환상 같은 그 비극.
견하는 그 방향으로 달리고 있지 않은가.
막아야 한다.
발버둥에 불과할지라도 발버둥 쳐야 한다.
확실한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지도하진 않을 거야. 그 정도의 내정간섭은 할 수 없지. 일단은 몽골 제국입헌당과, 개혁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적절한’ 정치인들이 알아서 정부를 구성하는 걸 지켜볼 거야. 지침은 이번에 열 ‘제2차 동아시아 평화회의’를 통해 전해도 충분하겠지.”
사실상 다이온의 의결 기구나 다름없는 ‘동아시아 평화회의’.
1차 회의는 개봉에서 열렸지만, 2차 회의는 칸발리크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미 역외사국에 그렇게 전달되었다.
1차 회의에서 다이온 구성국뿐만 아니라 역외사국에도 ‘개혁’을 주문했고, 2차 회의에선 그 개혁의 성과를 검토하기로 했었다.
즉 동아시아 평화회의는 이미 고려가 다른 나라를 ‘감독’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충분히 갖췄다.
고려가 다이온을 주도하는 흐름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아시아 평화회의’를 통하게 함으로써, 아예 고려를 중심으로 다이온 전체가 통합되는 일은 예방할 수 있다.
리안의 「대타협 계획」도 그런 길을 지향한다.
그래야 허동주, 천손민족협회가 원하던 고려 민족의 군사적 폭주를 억누를 수 있다. 그들이 그렸던 것과는 다른 나라를 만들 수 있다.
견하가 그 1936년을 피하게끔 할 수 있다.
견하는 리안의 답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갖추고, 시반을 만나 협의해보겠다며 집무실을 나섰다.
***
“흠.”
짧은 콧소리. 혹은 신음.
견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정면에서 누나의 뜻을 꺾을 순 없겠지.”
누군가 지금 견하의 눈을 봤다면 한마디 했을 것이다. 잠깐 어디 들어가서 수면이라도 취하라고.
하지만 기강이 꽉 잡힌 경호원들은 견하를 감히 흘끔거리지도 않고, 오로지 정면에 시선을 주었다.
누구라도 지금 견하의 눈빛을 봤다면,
푸른 빛이 돈다는 착각이 들 만큼 서늘하다고 했을 것이다.
“나도 게레센제와 싸우면서 깨달은 게 있으니까. 한동안은 누나의 뜻대로 할까.”
아마 뭔가 추진한다 해도, 기껏해야 리안의 호칭을 ‘각하’에서 ‘합하’로 올리는 것 정도라고, 자신에게 다짐한다.
그러나 견하 본인도 자신의 야망이 용암 같은 분출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미처 깨닫지 못했다.
***
로마 황제의 대관식은 늘 찬탄을 자아냈지만, 벨리사리우스의 대관식은 특히 더 그러했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총대주교로부터 관을 받는 그 순간,
장엄 그 자체인 황제의 예복조차 초라해 보일 만큼, 찬란한 날개가 벨리사리우스의 등에서 치솟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놀라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내 하늘하늘한 비단처럼 바닥에 늘어뜨려 졌다.
이단의 능력이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무척이나 성스러워 보였다.
“……황제께선 천사이시다.”
누군가 그렇게 작게 중얼거린 말이, 군중 사이에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퍼져나갔다.
“신이, 주께서 우리에게 이 황제를 보내셨도다…….”
콘스탄티누폴리 총대주교도, 의식에 따른 일정한 말을 암송해야 할 관료와 의원들도 잠시 넋이 나갔다.
곧 그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대관식을 이어나갔지만, 지위와 권세,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이런 생각을 품었다.
신의 뜻은 임페리움(帝國)의 영광에 있다고.
***
벨리사리우스는 어떤 권위를 지녔든 입헌군주정의 황제였다. 그렇기에 그가 정치권에서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은 의례 정도였다.
아직 정책에 직접 뜻을 반영할 순간은 오지 않았다.
세계는, 특히 유럽은 그의 다음 행보에 주목했다.
그는 그 이름대로 북이탈리아를 향한 야심을 드러낼 것인가?
교종청은 아직도 사과는커녕 진상 조사에 임하지도 않았다. 답변을 회피하고 시간만 끌며 매일같이 스스로 위신을 깎아 먹는 중이었다.
교종청을 향해 뭔가 날 선 발언을 할까?
그렇게 서방과 동방 교회의 대립이 다시 격화하고, 신성 제국의 국경에 다시금 긴장이 흐르게 될까?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벨리사리우스는 동쪽으로, 또 남쪽으로 향했다.
로마 제국이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후 얻은 식민지로.
카르타고로, 알렉산드리아로, 예루살렘을 지나 팔미라를 거쳐 크테시폰까지.
황제의 첫 공식 일정은 이처럼 수도를 떠나 식민지의 주요 도시를 순방하는 것이었다.
-최근 식민지 저항 운동을 가라앉히려는 노력을 우선하는 게 아닌가.
형제들의 죽음보다도 먼저 나라의 일을 걱정하는 그 태도는 칭송받을 만했다.
다만 사람들은 그 순방 과정에서 벨리사리우스가 보인 모습에 의아함을 표했다.
대관식 때도 보여준 그 찬란한 날개를, 순방 내내 현지 주민들 앞에서 펼치고 다닌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대관식 때와 달리 여러 겹의 날개에 촘촘히 박힌 눈을 모조리 뜬 채였다는 것.
그게 대체 무슨 의도인지 모두가 알게 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
“불에 탄 시체군.”
신수덕은 짤막하게 그런 감상을 말했다. 그는 이 시체나 저 시체나, 어떻게 죽었는지 말고는 딱히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다 똑같은 시체는 아닙니다. 이걸 보시죠.”
토칸이 시체 하나를 들어 올렸다. 덩치가 꽤 있는 시체였지만 토칸은 그것을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신수덕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사람의 형체가 아니죠.”
“불 때문에 일그러진 것도 아니군.”
“불에 타서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파멸인으로 변화하던 흔적입니다.”
“……유사한 시신이 최근에도 있지 않았나.”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벨리사리오스 황자, 아니 이제는 벨리사리우스 황제라 불리는 남자의 사설 연구소. 그의 형제와 ‘베드로의 검’이라 불리는 집단이 연구소를 습격했다가 그대로 섬멸당했다.
어찌어찌 그 사건의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은, 곧 시신들이 두 종류로 구분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모두 불에 탄 시체긴 했다.
하지만 불에 탄 ‘사람’의 시체와 함께, ‘파멸인’으로 변해가던 중 불에 탄 시체 무리가 있었다.
“어쩌면 불에 타던 중에 파멸인으로 변하다 목숨이 끊어진 걸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죠. 중요한 건 ‘파멸인이 되어가다’ 죽은 거예요.”
“누구는 파멸인이 되고, 또 누구는 그렇게 되지 않고…… 기준이 따로 있나?”
자료는 참으로 친절하게도 그 단서를 알려줬다. 황자들의 시체는 모두 사람으로 죽은 것이었다. 파멸인이 되어가다 죽은 시체는 오로지 ‘베드로의 검’ 측에서만 나왔다.
“‘신앙’이군.”
“얼마나 신을 믿느냐, 군요.”
칸발리크에서 혁세주교 관련 공작을 했던 토칸은 이 현상의 원리를 거의 정확하게 추측해낼 수 있었다.
신앙심 깊은 혁세주교인이 ‘피’를 받아 파멸인으로 변하듯, 베드로의 검에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신과 영혼을 믿는다는 것, 영혼과 구원을 갈망한다는 것은 사람의 원리마저 흐트러뜨릴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혁세주교의 방식으로는 피가 필요하지. 그게 아니라면 파멸인의 고기를 직접 먹이거나. 그런데 이들은 그런 조건을 충족하진 못했어.”
“이단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부정한 존재로 볼만큼 신앙이 깊은 자들이었죠.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요?”
“아니, 이단이면서 신앙심 깊은 자는 얼마든지 있다. ‘없는 것’을 갈망하는 인간은 어디든 있어. 다른 요인이 더 작용했다고 봐야겠지.”
그때 신수덕은 그렇게, 다른 요인에 대한 이야기는 더 꺼내지 않은 채로 대화를 마쳤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 로마 제국 식민지의 어느 마을에서 신수덕은 평소와는 달리 동요하고 있었다. 마치 전에 마치지 않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기라도 할 것처럼.
특이한 일도 다 있다고, 토칸은 생각했다. 신수덕은 동요 같은 인간적인 감정은 절대로 못 느끼는 작자인 줄 알았는데.
“……로마 황제는 어차피 교종청의 진지한 대응을 바라지 않아. 교종청에서 조사단을 보내봤자 파멸인이 되다 만 시체를 보여줄 순 없을 테니.”
“시체를 보여줬다간, 누가 그 사건의 ‘진범’인지 들통날 테니 말이죠?”
신수덕은 그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눈알만 굴려 토칸을 바라봤다. 노려보는 듯한 시선이었지만 토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들 모두, 벨리사리우스가 형들을, 베드로의 검 요원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안다. 시체와 연구소에 남은 흔적들을 통해 그 정도 유추는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어쩌면…… 벨리사리우스가 의도적으로 신수덕과 토칸에게 관련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도 있다.
일종의 경고겠지. 너희가 무엇을 하는지 다 안다. 나는 너희도 이렇게 만들 수 있다.
여기서도 도망쳐야 할 때가 오고 있나.
“벨리사리우스는 식민지 주민들을 도발했다.”
“그 몰골을 하고 돌아다니는 게 일부러 자기를 공격해보라고 그러는 거라고요?”
“날개를 못 접어서 내놓고 다니는 건 아니지 않나.”
“굳이 도시에서 벗어나 이런 시골 마을을 찾는 게 공격을 유도하는 거였다…….”
대도시에선 어차피 공격받지 못한다. 황제의 경호 인력이 저격에 폭탄 테러까지 대비해 철저히 주변을 치워놓을 테니까. 그러니까 도시는 ‘황제가 이런 모습으로 근처에 있다’라고 알리는 역할만 한다.
소문이 충분히 퍼지면 벨리사리우스는 몰래 근처 마을로 향한다.
“이교도 지배자가 신을 흉내 낸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게, 이들 식민지 주민들에게 얼마나 모욕적인지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