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6)
“로마인들은 분노하고 있다. 나의 인내에 답답해하면서도, 이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어 나의 인내가 보답 받고 그들의 분노가 씻기길 바라지.”
하지만 그 바람은 배신당할 것이다. 아주 높은 확률로.
“그때 나도 분노를 드러낸다. 시민들과 함께 분노한다. 우리의 분노는 ‘정당한’ 분노가 된다.”
그 앞에는 두 가지 중요한 과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아버지 유스티니아노스 5세의 장례식.
다른 하나는 자신의 황제 즉위.
“나는 아우구스투스가 된다.”
형들은 죽는 순간까지 막냇동생이 황제 자리를 갈망해 이런 짓을 벌였다고 생각했을 테지. 하지만 황제 자리는 아무래도 좋았다. 벨리사리오스는 황제 자리에 대한 탐욕은 전혀 없었다.
진심으로.
그가 황제로의 길을 택한 건, 오로지 황제가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최적의 수단’이기 때문.
벨리사리오스에게 황제 자리는 잘 드는 칼 이상의 가치가 없었다.
이것이 그가 모범으로 삼은 루우와의 차이였다.
“다른 길이 있었다면 그 길을 골랐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고려에서의 일이 나에게 교훈을 주었다.”
지름길이 놓여 있는데, 다른 길을 모색하는 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교훈.
“게레센제는 너무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아보려 했다. 명백히 반역자인 울제이를 죽이기는커녕 중앙정부에 자리를 마련해 세력을 키울 기회를 주었지. 자신의 봉지인 낭키아스도 개혁으로 쇄신하기보다는 아들의 무사 안녕을 위한 피난처로 만들었다.”
울제이는 칸발리크 내에 길을 열어줄 자기편을 기르고, 낭키아스는 정치적 균형이 깨지자마자 바이다르를 인질로 잡아버렸다. 게레센제가 나름 조심스럽게 했다는 계산은 거기서부터 틀어졌다.
“온건한 척 균형을 맞추기로 했다면 그걸 끝까지 관철해야 할 것을, 필요에 따라 더러운 계략을 꾸미기도 서슴지 않았다. 게레센제 본인은 그걸 ‘균형’이나 ‘타협’의 연장 선상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공공연히 떠들지 못 할 짓을 자제했어야 한다. 본인이 세운 균형을 스스로 무너뜨린 꼴이었다.”
대원철도주식회사의 사업 확장에 정식으로 항의하기보다는 신원경제자원연구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물밑으로 음험한 계략을 꾸미길 택했다.
신수덕을 처치해 동아시아의 안정을 되찾으려는 동맹에 가담했으면서도, 뒤로는 신수덕과 거래해 그를 몰래 빼돌렸다.
그런 모든 결정을 게레센제는 ‘현실주의적’이라 자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레센제의 현실주의는 그의 ‘현실’을 무너뜨렸다.
“이것도 저것도 결정하지 못하기는 그의 아우 울제이도 마찬가지였다. 게레센제의 제안을 들었을 때 완강히 거부하고 독립 군주가 돼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잠깐 굴복하더라도 어쩌면…… 이라는 어설픈 기대감이 그를 망쳤지.”
결과적으로 울제이 역시 나름 선전하긴 했지만, 그의 운명은 다이온의 정치적 격변 속에 그대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 격변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일시적인 성공에 취해 고려의 계략에 놀아났다. 그러고서도 그에겐 기회가 있었다. 칸발리크를 굳게 지키면서 고려와 동서로 대결하는 구도를 억지로라도 붙잡고 늘어졌다면 일이 또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지. 하지만 그는 주제도 모르고 ‘고려까지 정복한 완전한 카간’이 될 전략을 택했다.”
울제이 본인이야 강하게 나가야 지닌 것만이라도 지킬 수 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벨리사리오스가 보기엔 자기 역량도 생각 않고 고려에 정면으로 도전하다가 그대로 몰락한 꼴이었다.
“그나마 제 형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대세가 정해졌음을 알고 고려에 무릎을 꿇은 것이지.”
거기까지 평가를 마친 벨리사리오스는 눈을 들어 부관을 바라봤다.
벨리사리오스가 조금 더 어렸다면 아마 요르요스에게 다소 지친 듯한 미소를 보였을 것이다. 부하와 상관이기 이전에 두 사람은 사지를 헤쳐 온 전우였다.
벨리사리오스보다 연장자인 요르요스는 그 정도 인간적인 면모는 이해해 줄 터였다.
그러나 벨리사리오스는 이제 어리지 않았다. 황제까지 앞으로 한 걸음. 초인이 되기로 한, 또 능히 그럴 수 있는 벨리사리오스는 약간의 틈도 보일 생각이 없었다.
“역사의 교훈은 두 가지 방향에서 얻어야 하네, 요르요스.”
세상을 관조하다 얻은 결론 같은 말이었다. 그 어조에 요르요스는 침묵을 깨고 물었다.
“어떤 방향입니까.”
“본받을 쪽과 본받지 말아야 할 쪽, 모두 살펴봐야 하지.”
본받을 쪽은 이번 사태로 다이온, 나아가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고려의 젊은 지도부. 본받지 말아야 할 쪽은 이것도 저것도 끝까지 고수하지 못하고 몰락한 두 가짜 카간.
어떤 아우구스투스(皇帝)가 되기로 마음먹었는지, 요르요스는 벨리사리오스의 말을 통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의 치세가 앞으로 어찌 될지도.
“가지.”
벨리사리오스는 대황궁에서 하기아 소피아로 이어지는 장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
황제, ‘벨리사리우스’의 손길은 북이탈리아로 향했다.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자신의 공식적인 이름을 그리스식 ‘벨리사리오스’가 아니라, 라틴어 벨리사리우스로 소개한 일은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로마 제국의 중심지가 그리스어권으로 넘어갔다고는 해도, 어쨌든 로마 제국은 고대부터 이어져 온 그 제국이 맞다. 그렇기에 중세 말까지만 해도 옛 공용어인 라틴어로 된 공문서를 그리스어 공문서와 함께 작성하기도 했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그런 관습은 거의 사라졌었다.
벨리사리우스라 자칭한 황제는 그런 관습을 현대에 되살린 것이다.
물론 황제 본인도 모어로 쓰는 그리스어를 당장 폐기하고 라틴어를 공용어로 삼는다든가, 모든 로마인에게 라틴어 사용을 권장한다든가 하는 정책을 내세우진 않았다.
그저 황제 자신의 이름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든 벨리사리우스라 칭할 뿐이었다.
새 황제 벨리사리우스의 의도는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도 여러 사람의 ‘추측’과 함께 퍼져나갔다.
“대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를 본받은 정책을 펼치겠다는 거 아니겠어?”
북이탈리아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여러 세력 사이에선 자연스레 그런 말이 오갔다.
“전에 이미 교종청의 중개로 로마 황자…… 현 황제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조직도 있다던데.”
“그렇다면 의도는 뻔하지 않나.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이용해서 로마 제국의 영역을 확장하겠다는 것 아닌가.”
모두가 로마 제국의 속내쯤은 짐작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속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탈리아 독립’이 신성 제국과의 정면 대결로 가능하겠는가?”
“그 이탈리아의 독립도 반도 북부의 독립으로 끝낼 것인가? 결국 지리적 공동체,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독립을 지향하지 않겠는가?”
“그랬다간 신성 제국에 이어 로마 제국과도 싸워야 할 텐데?”
이탈리아 반도 남부는 로마 제국의 영토다. 오랜 세월 반도의 남부와 북부는 이질적인 문화권에 속했지만, 이탈리아 독립론자들이 생각하는 ‘독립된 조국’은 조금 달랐다.
물론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독립은 ‘프랑스’도 아니고 ‘알레마니아’나 ‘게르마니아’도 아닌 ‘이탈리아’만의 고유함을 그 명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독립론자들이 주장하는 조국의 미래영토는 어김없이 알프스 산맥부터 장화 모양 반도의 발끝까지, 심지어 시칠리아 섬까지 이른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독립한 이탈리아가 바다와 산맥을 ‘자연국경’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부터, 이탈리아의 독립을 지키려면 안전지대로서 그 정도 국토는 필요하다는 의견이 그것이다.
반도 전체를 통합한 강력한 국가여야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리라는 의견, 고대부터 이 땅은 ‘본국 이탈리아’로 분류되었다는 역사적 근거를 든 의견도 있다.
“하지만 당장 신성 제국을 상대하기도 벅찬데, 반도 남부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켜 유럽에서 가장 강한 두 제국과 동시에 대결한다? ‘공통의 적을 둔 두 제국’이 힘을 모아 독립운동을 진압할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는 건가?”
“일단 북이탈리아의 독립을 달성한 후에, 국가체제를 갖추고 남부의 독립을 지원하는 게 좋지 않은가? 그런 방식이라면 지금처럼 지하 활동을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의 지원을 남부의 동지들에게 해줄 수 있다.”
“그게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결국 언제냐의 문제일 뿐 실패를 향한 경로는 동일하지 않은가?”
일단 북부 이탈리아가 독립하고 나면, ‘건국의 아버지’가 될 사람들이 얼마나 지혜로운지에 관계없이 반도 남부도 독립시키자는 여론이 들끓을 것이다.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정치인들, 또는 독립으로 기세가 올라 피를 식힐 줄 모르는 과격분자들이 그런 여론에 편승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런 여론의 배후에 설 수도 있고.
그러면 신생 독립국 이탈리아는 당장 외교적 위기를 맞게 된다.
“신성 제국이 우리의 기세에 밀려나 독립을 승인한다 해도, 향후 백 년 이상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 할 것이다. 독립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겠지. 그런데 마침 남쪽의 로마 제국과 곧장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신성 제국 입장에선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로마 제국은 반드시 북이탈리아의 신생국을 격파하려 들 것이고, 신성 제국 역시 굴욕을 갚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누군가의 지적처럼, 잠깐 독립이라는 달콤한 꿈을 꾼 후에 예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아니, 지금 동아시아에서 한족이 반란 이후 완전히 기세가 꺾인 것처럼, 이탈리아 독립의 꿈도 꺾일지 모른다.
“하지만 고려는 한족 반란이 다시 일어날 것을 우려해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비롯한 유화 정책을 펼친다. 그런 진보를 이룰 수 있다면 우리의 저항이 한 번 꺾인다 해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 않나.”
“피는 공짜가 아니다. 잃어버린 동포, 잃어버린 지혜로운 지도자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한 걸음 나아가더라도 거기서 주저앉아 다시는 나아가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피를 흘려야 한다면 완전한 독립의 완성이 이루어질 때여야 한다.”
이탈리아 독립운동은 요 몇 년 사이에 한족 독립운동을 교훈 삼아 최대한 역량을 비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고려가 내전 전까지 ‘자유세계’의 일원이 아니었다고는 해도, 산동에서 벌어진 학살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신성 제국이 아무리 자유세계의 일원이라 해도, 보나파르트 황실은 나폴레옹 1세의 ‘군대’에 기반을 둔 세력이다. 똑같은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렇기에 이탈리아 독립운동은 지금까지 ‘교종’의 뒤, 종교라는 방패 뒤에서 살아남는 길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