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4)
강회한족관리특구.
낭키아스와 키타이 사이, 회수와 장강이라는 두 큰 물줄기를 움켜쥐듯 설정된 새로운 군정 지역의 이름이다.
루우는 낭키아스와 키타이, 두 봉국을 해체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 ‘강회특구’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 구상안은 이미 풍군작전의 실행단계부터 올라와 있었다.
“내륙 한족 통제를 재편해야 해.”
몽골계 칸과 중앙 군사 귀족, 토호, 한족 주민. 낭키아스와 키타이라는 나라는 이들 간 균형 상태를 통해 지난 20여 년을 존속해왔다.
그러나 대대적인 한족 반란을 거치며 이러한 균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족 주민의 이탈, 비협조로 행정에 차질이 생기고, 낭키아스의 경우 토호들이 정쟁으로 무너졌다.
몽골에서 온 칸과 중앙 군사 귀족 역시 이번 사태를 거치며 제거되다시피 했다.
혹은 곧 제거될 예정이었다.
“그 시스템을 대체할 새로운 시스템을 확립해야지.”
울제이와의 일촉즉발 상황에 대비했던 리안의 두뇌는, 사태 후처리를 비롯한 다음 단계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었다.
그때 본 것, 마르코 폴로가 보여준 ‘가능한 세계들’과 붉은 세계가 신경 쓰일 법도 했지만, 그녀는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두고 해야 할 일에만 집중했다.
누군가는 리안을 놀라운 집중력의 소유자라 평했고, 누군가는 일의 경중을 판단함이 빠르다며 감탄한다. 또 누군가는 리안이 참으로 냉철, 냉혹하다며 두려워한다. 그 모든 평가가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안 본인은 그저, ‘자신은 억누르는 일에 익숙할 뿐’이라고 자평했다.
기쁨도 걱정도 누르고 눈앞의 일에 묵묵히 집중하는 재능.
그 슬픈 재능이 없었다면 지금 여기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기에, 평생을 함께 가져가야 할 재능.
물론 리안은 이런 상념마저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밀어내 버렸다.
“난민이 발생할 수도 있어. 최대한 방지해야지.”
정세의 혼란은 빠르게 수습했다지만, 전에 재무장관 차무룡이 지적했듯이 경제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극적으로 나빠지진 않았다뿐이지 지표는 분명히 부정적인 방향을 가리켰고, 특히 한족 민중의 생활상은 악화 일로를 걷는 중이다.
반란이 진압되었다고 해서 생활도 곧장 안정되는 것은 아니니까. 파괴된 도로와 철도, 학교와 직장은 어떻게든 빠르게 복구할 수 있다. 그러나 내전 중에 죽은 사람들이 맡았던 경제적 역할은 공백으로 남았다. 그것만은 속도전이 불가능하다.
“풍군작전 전에는 원철이 어찌어찌 그 역할을 대신해 왔지만, 그것도 울제이가 추방하면서 다시 휘청거렸지.”
일시적 조치에 불과했고, 사태가 진정된 지금 다시 복귀하고 있다곤 해도, 타격은 분명히 컸을 것이다.
“원철과 함께 우리 고려의 기업들도 진출하겠지만, 이들이 자신의 이익에 급급해서 한족 주민 생활 문제는 뒷전이라면 별다른 소용은 없어.”
즉, 국가 권력의 강제적 개입은 필수다. 재건된 국토가 분명히 한족 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도록, 다이온 연방 정부는 고려로 들어오는 이익의 상당 부분을 구 키타이, 낭키아스 지역으로 돌릴 것이다.
“그게 효과를 볼 때까지, 군정을 통한 통제가 필요해.”
강회특구를 신설하는 이유였다.
네 개의 특구, 화하, 파촉, 형초, 강회. 이들은 한족을 강제로라도 해당 지역에 정착시키고, 함부로 떠나지 못하도록 하며, 새로운 반란의 씨앗을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
물론 채찍만 주어져선 효과가 전혀 없으니, 당근도 주어야겠지.
“배급, 교육기관 정상화 등의 서비스에 고려군을 적극 투입한다. 이제 이곳도 다이온의 영역이니 ‘해외주둔제한법’에서도 자유롭겠지.”
해석에는 이견이 있겠지만, 어쨌든 고려는 다이온의 구성국인 데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특구도 ‘국내’로 인정될 것이다.
“주민들에게 친절한 고려군의 인상을 전파하는 것도 중요하고.”
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봤다. 유지나가 준비해 온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루우와 리안, 그리고 그녀의 측근들 모두 탁자 위의 커다란 지도에 주목했다.
국경선과 행정구역 위주로 그려진 지도였다.
네 개의 특구와 다이온 사이에 선이 그어졌고, 다이온 내부에는 따로 국경이 그어져 있진 않았다. 다만 고려의 영토였던 곳은 도(道) 단위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삼한반도부터 산동 쪽의 발해도까지.
“카라코룸과 칸발리크만 중요한 게 아니야.”
리안의 손가락이 황해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갔다. 발해도를 제외하면, 해안선과 특구들과의 경계선 사이는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황하, 회수, 장강을 젖줄 삼은 농업. 무역이 가능한 수많은 항구. 세계의 자금이 오갈 금융 중심지. 공업 집약 도시. 이 모든 게 여기도 있어.”
리안의 말에 루우가 의견을 덧붙인다.
“앞으로 그렇게 될 곳도 있지.”
“다이온 전체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나아가 하나의 국가로 묶으려면 황해를 도는 이 해안선을 따라 개발이 이루어져야 해.”
단순히 각 거점을 개발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원철도주식회사와 함께 그 거점들을 연결하는 철도의 건설까지 완료되고 나서도, 다이온의 모든 국민이 최소한 ‘다이온 연방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춰야 한다.
민족을 초월해서.
당연히 그런 정체성은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형성되진 않는다. 섬세하게 설계된 정책이 수십 년에 걸쳐, 몇 차례 세대교체를 이루어가며 서서히 형성시키는 것이다.
“경제 거점 개발이 진척되면 반드시 그쪽으로 사람이 몰리겠지만, 상정한 것 이상의 사람이 몰리면 뭘 해보기도 전에 사회부터 무너질 수가 있어.”
“카라코룸의 조드 빈민처럼 말이지.”
조드 빈민은 그 이름과 달리, 그저 기후 때문에 발생한 빈민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시레문의 급속한 산업화 정책 속에서 빈민으로 전락한 자들이었다. 사회 구조의 격변, 그 과정에서 ‘알아서 적응해 살아남으라’며 정부가 방기해버린 사람들. 그런 이들이 뭐라도 해볼까 하여 카라코룸으로 모여들었고, 그대로 도시의 빈민층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품으로 들어가, 끝내 반란을 떠받치는 토대가 되지 않았던가.
시레문과 볼로드의 실책…… 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볼로드의 피 값으로 무마했지만, 우리가 또 같은 전철을 밟을 순 없어.”
개혁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볼로드는, 결국 미룬 개혁이 부채로 돌아오는 바람에 죽었다. 당연히 고려의 최고권력층은 그 부채를 대신 짊어져 줄 생각이 없었기에, 청구서를 총알에 실어 볼로드의 머리에 박아넣었다.
“몽골 제국입헌당을 쓸 차례가 왔군.”
“볼로드가 이들과 잘 협력해서 조금씩이라도 개혁을 진전시켜왔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그 대신 황정회와 손잡는 길을 택했지.”
황정회와 손잡고 몽골 제국입헌당과 대립했다.
물론 볼로드 입장에서도 몽골 제국입헌당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건 권력의 축소를 의미하기에 어려웠을 수 있다. 하지만 리안과 루우, 견하는 그런 입장까지 배려해 줄 수는 없었다.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쓸모가 없다면 제거해야지.
안타깝긴 했지만 일단 방향이 정해진 이상 볼로드의 죽음은 막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환(環)황해권 개발도 그렇지만, 난민 발생은 역외사국 문제를 원만하게 다루려면 꼭 막아야 해.”
“난민이 해안 쪽 도시로만 몰리진 않을 테니까.”
정세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역외사국, 즉 티베트, 탕구트, 대예, 보우슈엥으로 난민이 몰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장 내란으로 엉망이 된 고향보다야 먹고 살 거리가 많을 테니까.
“그들이 역외사국의 빈민층을 형성하는 건 순식간이겠지.”
“원한이 깊은 한족 따위를 돌봐줄 이유도 없고, 그럴 여력도 없을 테니까. 문제는 그들이 역외사국의 빈민층을 형성해버리면 그 나라들의 정세도 어지러워진다는 거야.”
“바라트에서 그 틈을 파고들 수도 있고.”
바라트가 고려의 중재로 국제무대에 복귀하면서, 공산권과 다이온은 세력권의 한계선을 합의했다.
바라트는 동쪽으로 버마까지. 다이온은 서남쪽으로 대예와 보우슈엥까지. 라타나코신 및 티베트를 중립지대로 둔다는 협약이었다.
“풍군작전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졌다면 저들이 마음을 달리 먹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어.”
“베트남을 지나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을 확보, 마자파히트와 봉래를 넘어서 태평양 진출. 기회가 눈앞에 온다면 외면하진 않겠지.”
비참한 신세가 된 사람들의 절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용하며 전파되는 공산주의 혁명. 역외사국은 그걸 막을 힘이 없다.
“곧 2차 동아시아 평화회의를 열어서 직접 살펴봐야겠지만, 개혁에 큰 진전은 없었으리라고 봐.”
리안의 말에 루우는 그래 그것도 있었지, 라며 끄덕였다. 입헌군주라지만 이제 고려 주도의 다이온 체제가 자리 잡아야 하는 이상 신경 쓸 일은 배 이상 늘어났다.
칸발리크에서의 일을 처리하고 카라코룸으로 올라간다고 끝이 아니었다. 아마 지금보다 더 각 구성국의 의회나 정부에 계속 얼굴을 비쳐야 할 것이다. 갈등 국면을 조정하는 카간의 연설도 더 많아질 테고.
“그러니 새로 설치될 강회 특구를 비롯한 4개 한족관리특구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거야.”
“특구의 설치로 내륙 지역과 변경은 이렇게 관리한다고 치고, 이 비어있는 부분들은 아직 개편안이 마련되지 않은 건가, 태사?”
리안은 직접 대답하지 않고, 이번엔 견하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견하 뒤에 선 재연도 긴장하는 게 보였다.
키타이, 낭키아스 두 봉국의 해체 후 행정구역 개편. 견하와 재연은 이 두 문제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 「화림 계획」부터 이번 풍군작전에 이르기까지 관련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황제와 태사의 지원 아래 ‘알타이 민족문제 연구소’, 통칭 AN연구소를 이끌고 있지 않은가. 분명 그쪽에서도 뭔가 안이 나왔을 것이다.
“저희가 제안하고 싶은 건 ‘발해도 모델’입니다.”
견하의 목소리를 들은 유지나와 양수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도 수감 된 한족 독립운동가들을 회유해 발해도 지방 정부를 창설하는 데 기여했었다.
신수덕의 한족 학살 사건으로 파탄에 이르렀던 고려의 산동 통치는, 식민지 산동을 발해도로 개편하면서 방향을 바로잡았다.
덕분에 몽골 내전, 한족 반란, 풍군작전에 이르기까지 발해도는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도(道)’ 체제를 다이온 직할령, 그러니까 몽골 북방 본토부터 낭키아스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확대하자는 겁니다. 각 도의 자치는 발해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두고요.”
“그렇게 된다면 도의회는 한족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게 될 텐데. 도지사를 비롯한 행정관리들이야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겠지만. 그리고 교육 정책도 바뀔 거고.”
“네. 한어(漢語)가 필수 과목이 되고, 몽골어와 고려어가 선택 과목이 되겠죠. 지금 발해도처럼.”
“지금까지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가 취해 온 정책과 충돌하진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