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3)
그들은 벨리사리오스와 교종청의 거래에 따라 로마 제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벨리사리오스를 돕는다는 허울 이면에는, 연구소를 계속 감시하라는 교종청의 지시가 있었다.
그렇게 몰래 감시하다, 결국 오늘 일어난 사태를 보고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이곳에서도 칸발리크 사태가 재현된다! 악마를 구속하고 황자들과 그 수행원들을 구출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데우스는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에 벨리사리오스가 직접 날개를 제거한 상태였다. 신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베드로의 검 부대장은 아마 데우스의 전투력이 많이 감소했으리라 짐작했다.
벨리사리오스에 비해 우리 부대의 전력이 부족하진 않다. 오히려 상회한다. 그런 계산도 있었다.
그래서 몸을 숨겼던 자리에서 나와 연구소 최심부로 진입, 부대를 둘로 나눴다. 한쪽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황자들과 사병들을 데리고 빠져나가려 하고, 다른 한쪽은 데우스와 대치했다.
도약. 각자의 무기로 데우스를 무력화하려 한다.
데우스는 몸 곳곳이 베였지만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듯, 그래도 팔을 휘둘러 적을 쳐냈다. 그 반격에 이단 둘이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죽진 않았지만, 전투 불능이다. 당장 병원에 보내지 않으면 목숨도 위태롭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부대장은 초조하게 구출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자신도 달려들 준비를 한다. 아무리 약해졌다 해도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신종이다. 목숨 걸고 달려들지 않으면 이 재해는 유럽 최대 도시를 끝장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부대장이 막 도약한 순간,
데우스는 녹아내려 버렸다.
“……!”
부대장이 휘두르던 칼이, 맞은편 벽에 박혔다. 그 칼에 의지해 균형을 잡았다가,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착지했다.
“뭐지……?”
부대장이 뱉은 말은 의문문이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발바닥을 끈적하게 붙잡고 늘어졌다.
전장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은 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종종 그것은 함정에 빠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경우, 무력화된 황자들이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베드로의 검을 제외한 누군가가 함정을 판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당신들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리란 건 너무 명백하지 않소. 교종청에서 나를 ‘이단’…… 초능력자가 아니라 정말로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자라고 이미 규정 내렸을 텐데.”
부대장 역시 수많은 전투를 겪은 자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뒤에서 들려온 음성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벨리사리오스는 그 혼신의 일격을, 마치 아기의 코를 손가락으로 살짝 밀듯이 막아냈지만.
천사처럼 여러 겹의 날개를 펼친 이단.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교종청의 충복들. 그렇다면 언젠가 당신들이 내 앞을 가로막으리란 것도 예상되지 않겠소?”
보랏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두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이질적인 공포 앞에 부대장은 얼어버렸다.
“그러니 처리해야지. 될 수 있으면 유용하게 쓰고 말이오. 마침 나의 형님들도 방해가 되긴 마찬가지라, 둘 다 처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소.”
벨리사리오스의 머리 위에는 빛의 고리가 떠 있다. 그 모양이 가시면류관 같아 더욱 신성모독적이다.
“당신들은 내 연구가 진척이 없는 줄 알았겠지. 데우스를 놓고도 어찌할 방법을 몰라 계속 묶어두었다고. 하지만 연구 성과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소. 그건 결정적인 국면에 써먹어야 하는 것 아니오?”
쿡쿡, 하고 벨리사리오스는 웃었다.
“여기 데우스는 껍데기만 남고, 내가 모든 힘을 흡수하는 데 이미 성공한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고려 황실의 세조, 왕륭과 그 아내인 몽부인의 사례. 이미 벨리사리오스의 연구소는 그 사례를 참고한 연구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잘들 가시오, ‘황족 암살범’으로 기록될 이들이여.”
벨리사리오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형제들을 보았다.
“잘들 가십시오, ‘사교 숭배 의식에 참여하다 목숨을 잃은’ 형제들이여.”
그것이 그들이 뒤집어쓰게 될 누명. 이것도 고려의 주견하가 게레센제와 울제이를 처리한 방식을 본떴다.
부대장은 벨리사리오스를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벨리-”
벨리사리오스의 모든 날개가 ‘눈을 열었다’.
황자의 보랏빛 눈동자와 닮은 수십 개의 눈을.
“주께서 눈을 뜨게 하시니.”
읊조림과 함께, 벨리사리오스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불타올랐다. 모든 인간이 높다란 비명을 지르며, 춤추듯 타오른다.
새까만 재만 남을 때까지.
“불사조 로마가 솟아날 재가 될지어다.”
***
“……보르지긴 황실의 구성원이 벌인 추태에 짐은 다이온의 모든 신민 앞에 사죄하노라.”
고려 황제 왕서라, 그리고 곧 몽골 카간이 될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의 라디오 연설이 전파를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볼로드는 자기 부하들 손에 체포되었다. 그가 일부 경찰과 관료들을 장악하고 그들의 충성을 받는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게레센제나 울제이 둘 중 한 사람이 건재할 것을 전제로 했다.
두 형제 모두 몰락한 지금, 볼로드가 희망을 걸어볼 동아줄은 모두 끊어졌다. 동아줄이 썩었는지도 알아보지 못한 볼로드의 안목에 부하들도 실망했다.
체포 직전 마지막 발악으로 그는 시민들을 향해 ‘게레센제 카간을 납치한 건 고려인들’이라 폭로해보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게레센제 측근의 증언도 확보했지만 소용없었다.
모두 그가 울제이에게 붙어 길을 열어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고려를 비방하니 더욱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이처럼 볼로드 또한 자멸한 덕분에 고려군과 황제 루우 테무르는 칸발리크에 당당히 무혈입성했다.
다시금, 황제전용 기갑사 룡황을 앞세우며.
지난번 칸발리크를 구한 데 이어, 이번에도 세계를 구한 영웅이라는 찬사가 칸발리크 곳곳에 퍼져나갔다. 당연히 미리안과 주견하의 선전전이 거둔 성과였다.
사람들은 들리는 말의 실체를 눈앞에서 확인한다.
흥분이 웅성거림으로, 환호로 바뀌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33년 새해의 첫날이었다.
황궁에 들어간 루우는 이제 공주도, 국빈도 아닌 카간으로서 거침없이 어좌를 향해 올라가 앉았다.
아버지가 앉고, 숙부들이 앉았던 그곳에.
아직 그녀가 원하는 ‘정식 쿠릴타이’가 열리진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이미 카간이라는 사실에 그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루우 테무르가 황궁에 입성했다는 소식은 구금되어 있던 볼로드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자신을 데리러 온 군인들을 보며 안도했다.
극단적인 조치는 없을 것이다.
미리안이나 루우 테무르 앞으로 끌려가 호되게 질책을 받겠지. 죄도 몇 개 추가될 거고…… 하지만 일단 그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다는 건,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든, 죄를 인정하고 깨끗하게 죽여줄 것을 청하든, 살아날 방법은 많았다.
차가 황궁이 아니라 칸발리크 밖으로 나갈 때까지는 그런 희망을 품었었다.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 쓰레기통 앞에 설 무렵엔, 볼로드의 넋은 완전히 나가버렸다.
유언도, 발악도, 저주도, 허탈한 웃음조차 없는 최후.
가벼운 총성 한 발이 그의 뒤통수와 이마를 꿰었고, 시체는 푹 쓰러져 작게 움찔거렸다.
군인들은 볼로드의 체중이 무겁다고 욕하며 쓰레기통으로 밀어 넣은 뒤, 불태웠다.
한때는 루우와 견하 모두, ‘칸발리크에서 루우의 동군연합을 지지해 줄 사람’으로 꼽았던 정치인의 최후는 그랬다. 루우든 견하든 리안이든, 모두 볼로드의 제거를 명하고는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바이다르를.”
루우가 관심을 가지고 만나려 한 유일한 황족은 바이다르 뿐이었다. 울제이에 의해 황궁 한구석에 갇혀 있던 바이다르는 초췌한 얼굴로 루우 앞에 나와 섰다.
바이다르도, 리안도 약속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다.
루우 역시 게레센제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낭키아스 칸의 작위를 폐하고, 영지를 몰수한다.”
소년은 담담하게 자신의 처분을 들었다.
“낭키아스는 연방 정부의 지도하에 새로이 개편된 행정을 시행할 것이다.”
루우는 그렇게 낭키아스 땅을, 다이온 체제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말한다.
이 말은 주변에서 이 역사적 상황을 취재 중인 기자들 더러 들으라는 말이다. 그들이 열심히 수첩에 베껴 적는 이야기가 루우의 새 시대를 홍보해줄 것이다.
“바이다르, 이제 너는 칸이 아니다.”
황족 소년, 바이다르는 조아렸다.
“어리다고는 하나 칸의 책임은 무거운 법. 아무리 시대가 혼란스럽고 간신배가 날뛰어도 책임은 칸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것이 짐이 너의 칸위를 박탈한 이유다.”
“황공하옵니다.”
“너를 새너두의 별궁에 머물게 하겠다. 그것이 한때 칸이었던 황금가문 일원에게 내리는 벌로써 격에 맞다.”
바이다르는 물러났다. 군인들이 그의 호송을 준비했다. 왕에 준하는 예의를 갖출 것을 명했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었다.
리안은 바이다르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만의 구상을 정리했다.
루우는 리안에게 ‘자신의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고선 자신의 붕어 시엔 미리안이 통령이 된 공화정을 수립해도 좋다고 했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현실적으로도, 그리고 리안의 심적으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리안은 바이다르를 루우의 후계자로 생각해 두었다. 물론 그것도 루우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때의 일이다. 지금 당장은……
-연인을 만들 생각은 없어?
-글쎄?
-뭐 애부터 낳아라, 이런 건 아니지만 진지하게 생각은 해 봐. 아무리 황제의 실질적 권력이 낮다고 해도 황위 계승은 혼란의 연속이니까. 게다가,
-게다가?
-이렇게 애써 얻은 고려 황제, 몽골 카간, 자손에게 물려주지 못하는 건 아깝지 않아?
리안의 물음에 루우는 씩 웃었다.
-권력을 향한 야망은 자신에게서 완결되는 거야. 이 점에 있어 두 숙부는 크게 착각하고 있지.
이어지는 루우의 음성에 리안은 회상을 그만두었다.
“울제이는 옹구차트의 별궁에 가둔다.”
울제이를 부르지도 않고, 루우는 그렇게 명했다.
“울제이의 처와 자손은 황족의 지위를 보전케 한다. 그들 역시 옹구차트로 보낸다. 개봉 왕궁에는 그 어떤 황족도 머무를 수 없다. 지금까지 처분을 결정한 황족을 제외한 다른 왕공은 칸발리크로 와서 처분을 기다려라.”
이후 그들의 처분은 이미 리안, 견하와 논의해두었다. 한껏 겁을 준 뒤, 카라코룸에서 열리는 쿠릴타이에 데리고 올라갈 계획이었다.
“울제이의 칸위 역시 폐하며, 키타이 땅 또한 낭키아스와 마찬가지로 연방 정부의 지도를 받는다. 또한, 연방 재편성의 혼란상을 방지하기 위해, 새로이 ‘강회(江淮)한족관리특구’를 신설한다.”
다이온 연방의 새 시대를 알리는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