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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26화 (426/541)

아우구스투스(2)

게레센제의 등장과 죽음, 루우의 활약을 보면서 모두가 어렴풋이 느꼈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는 걸.

루우가 보여준 압도적인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약 이 상황이 고려 측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고려는 다이온 전체를 집어삼키기 위해 ‘못 할 짓이 없음’을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려는 상황을 여기까지 몰아넣으면서 오래도록 참았지만, 참기만 하진 않는 나라라는 게 확실해졌다.

얼마만큼의 대군을 갖추었든, 고려에서 괴물로 전락시키고 싶다면 그렇게 된다.

아무리 억울한 면이 있어도 소용없다. 명분을 갖추려 해도 고려는 게레센제에게 했듯이 울제이를 ‘천하의 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카간 참칭’, ‘수도 칸발리크 침탈’, ‘연방 해체 획책’ 등의 죄목은 받아들여라. 그 이상 말도 안 되는, 명예 자체를 소멸시켜버리는 죄를 뒤집어쓰기 전에.

울제이와 측근들은 그 무언의, 하지만 명확한 메시지를 깨달았기에 무기를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도부가 그렇게 무력화하자, 그 군대도 마찬가지로 저항 의지를 상실했다.

울제이를 정통 카간으로 만든다는 가느다란 명분에 의존하던 군대였다. 그나마 키타이군이 울제이 개인에 대한 충성이 높았지만, 그런 만큼 울제이의 의지가 무너지면서 그들도 싸울 이유를 잃고 말았다.

게다가 회담 직전, 고려는 울제이군 눈앞에서 그 압도적인 전력을 마음껏 드러내지 않았던가.

황제전용기 룡황을 필두로 한 강력한 기갑사 전력이 달려들자,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곤 해도 울제이는 길을 비켜주어야 했다.

그 행위만으로도 누가 우위에 있는가는 분명해졌다.

물론 불리한 상황에서도 죽음을 각오하며 싸우는 자들도 있다곤 하지만, 울제이가 내세운 명분은 죽음까지 각오하기엔 너무 약했다.

“게레센제와는 이야기를 나눠봤잖아.”

울제이를 죽이진 않겠지만, 유폐된 그를 루우가 만나는 일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리안의 말은 그래도 숙부니까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의 부담을 덜라는 뜻이다.

루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회한은 없어. 있어도 돌아봐야 할 이유가 없고.”

게레센제를 저렇게 파멸시키고, 울제이를 잡아 가둔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겠다는 말.

리안은 짧게 끄덕이고, 막사 안에 있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칸발리크로 개선(凱旋)한다.”

***

유스티니아노스 5세의 아들 중 일곱이 한자리에 모였다. 막내 벨리사리오스를 제외한 일곱 형들이었다.

각자 자기 사병을 이끌고 벨리사리오스의 연구소를 급습해, 마침내 데우스가 있는 곳까지 이르렀다.

당연히 현대 로마 제국은 황족의 사병 보유 따위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병’이란 실상 폭력배 무리, 용병을 긁어모아 놓은 것이었다.

정규군에 비하면 오합지졸에 불과했지만, 그건 벨리사리오스의 경비 병력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비밀 연구소를 습격하자 모두 도주해버렸다.

운 나쁜 연구원 몇이 포로로 잡혀, 일곱 형제에게 이 연구소 및 데우스의 정체를 낱낱이 고했다.

연구원이 한 문장 한 문장 마칠 때마다, 일곱 황자의 얼굴색은 다채롭게 변해갔다.

“……벨리사리오스, 대체 무슨 짓을 한 게냐.”

장남, 유스티니아노스가 망연자실한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유스티니아노스 5세의 첫아들. 탄생의 기쁨 속에서 그는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을 물려받았다. 이름뿐만 아니라 ‘카이사르’라 칭해지며 황위 계승권자의 지위도 확고했다.

이제 젊었던 아버지는 노인이 되었고 그는 중년이 되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유스티니아노스 6세라 불릴 것이다.

그는 데우스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내려, 연구원을 향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벨리사리오스는 이것으로 대체 무슨 짓을 하려던 거냐? 고하라.”

“이…… 이것은 벨리사리오스 황자께서 독자적으로 추진 중인 이단 연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타국에 비해 확고한 전력 우위에 서려면 이단 능력의 증진이 필요한 데, 데우스는 그 실마리가 아닐까 하고 연구를 진행……”

거기까지 듣고 장남 유스티니아노스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연구원은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간단한 이야기였다.

“벨리사리오스는 황위를 노렸을지도 모르겠구나.”

“모르겠구나, 가 아니야. 형!”

삼남, 알렉산드로스가 씩씩대며 형의 말을 가로챘다.

“이걸 보고도 모르겠어? 아직도 막내 걔가 단순한 학구열로 이거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 같아? 형! 정신 차려! 벨리사리오스는 이제 형의 귀염둥이 막냇동생이 아니야!”

분노에 찬 알렉산드로스의 말은 유스티니아노스가 외면하는 진실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칸발리크 사태 같은 일이 콘스탄티누폴리에서도 일어날까 두려워 여기까지 쳐들어오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막내가 그런 무서운 일을 꾸밀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자는 거야?”

말을 잇지 못하는 장남을 대신해, 차남 필리포스가 물었다. 삼남의 이름은 차남의 이름과 짝을 이루기 위해 지은 것이었다.

“일단 이 데우스인지 뭔지 하는 괴물과 연구소를 장악해야지. 벨리사리오스가 발뺌하려 들기 전에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어야 하니까.”

이 시점에는 형제 중 가장 강경파인 알렉산드로스도, 동생을 죽여야겠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조치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이 일로 벨리사리오스를 협박해 다시는 엉뚱한 짓거리 못 하도록 황궁 구석에 처박아놓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철없이 위험천만한 놀이를 즐기는 동생, 감히 황위를 넘본 동생의 버릇을 고쳐줘야 한다, 딱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면 저 괴물을 없애야겠구나. 너무 위험해. 이런 건…… 신앙 측면에서든 사회에 미칠 여파에서든 좋지 않아. 칸발리크에서 일어난 일도 이런 유치한 발상을 한 누군가가 저지른 게 틀림없어.”

안정적인 황위 계승권을 누려온 유스티니아노스 황자는 그만큼 안정을 중시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벨리사리오스만 혼내놓고 나면 내각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비밀리에 알려야겠다. 우리 선에서 해결할 일은 아닌 것 같으니. 문제가 되기 전에 없애고 영원히 비밀로 묻어둬야겠지.”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런 이름을 받은 탓일까. 그는 고대 정복군주처럼 모험심이 강했다.

그것도 너무.

“형, 아니지. 형은 황제가 될 사람이잖아. 좀 더 멀리 내다봐야지.”

“어처구니없는 소리는 아예 하지 말거라, 알렉산드로스.”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아니야, 형. 나도 나라와 황실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고. 형은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은 신경도 안 쓰는 거야?”

알렉산드로스의 지적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식민지. 세계대전 후 얻어낸, 카르타고에서 크테시폰에 이르는 광대한 근동 지역.

지난 30여 년간 무슬림 반란은 희생도, 국제 사회의 비난도 두려워 않고 무자비하게 찍어눌러 왔다.

학살이라는 오명을 받으면서도 마을 단위로 죽여댔고, 어찌어찌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은 뗏목에 실어 홍해나 페르시아만에 갖다 버렸다. 그들이 바다에서 죽든, 아라비아 칼리프국으로 살아 들어가든, 아라비아 칼리프국에서 어떤 비참한 대우를 받든, 로마 제국이 알 바 아니었다.

종교의 자유라는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무자비한 개종 강요도 이어졌다. 그나마 일단 크리스트교기만 하면 더는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일까.

물론 그건 로마 제국이 무슬림 외에 다른 종파까지 탄압할 여력이 안 되어서다.

문제는, 최근 무슬림 저항 운동의 양상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폭력 저항 운동인지 뭔지 그거, 엄청 짜증 난다고.”

무장도, 구호도 없이 그저 콘스탄티누폴리까지 행진하는 발걸음.

처음에는 그들도 무력으로 두들겨 보았다. 당연히 무장 투쟁보다는 진압하기도 쉬웠다. 총칼로 쓸어버린 자리에는 일방적으로 도륙당한 시신들만 남았으니까.

하지만 무장 투쟁과 달리, 그들은 어디서 데려왔는지 더욱 세를 불려 행진을 재개했다.

무력으로 맞서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발길질하고 총을 겨눠야 하는 일선 군인들의 불만도 고조되고 있다. ‘그냥 걷는 사람들인데 왜 때려야 합니까’라는 당연한 질문과 함께.

물론 당장은 ‘이슬람 제국 부활을 획책하는 무리’, ‘저들이 콘스탄티누폴리에 진입하면 돌변해 시민들을 학살할 것’, ‘속지 말라’는 말로 다시금 적대감을 일으키고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비폭력 저항’에 ‘종교를 초월’해 동참하는 지식인이나 주교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흔들린다.

“멍청이들의 생각과 달리, 저들이 비폭력으로 나오는 건 평화니 뭐니 하는 가치를 존중해서가 아니야. 무력 저항의 여력이 없고, 비폭력이 당장은 유일한 전술이어서지. 조금이라도 자치를 허용해줘 봐, 어떻게 되나.”

그들이 당장 마각을 드러내리라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더 압도적인 힘을 보여줘야 해. 신성해 보이기까지 한 힘을.”

그래서 아예 신앙 자체가 꺾여버리도록.

“이번에 고려에서 일어난 일처럼 말이야.”

으음, 하면서 유스티니아노스가 신음을 흘렸다.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고려 황제 왕서라의 압도적인 이단 능력이 또 다른 괴물 창궐 사태를 물리치고, 그 적들마저도 위용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도 할 수 있어. 아니, 형이 황제가 되면 해야 하는 일이야.”

“그건…….”

아마 유스티니아노스는 자신이 생각해 둔, 다른 구상을 설명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첫째 황자가 입을 연 그 순간,

데우스의 탁한 눈이 움직였다.

대리석 조각 같은 그것의 무기질적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곳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신종의 시선을 받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구속된 것처럼 보였던 데우스는 사실은 가만히 공중에 떠 있었을 뿐이라는 걸,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

누가…… 저 괴물을 풀어두었지?

처음부터 풀려나 있었나?

이건 벨리사리오스의 함……

오래전 벨리사리오스와 그의 부하들이 겪었던 일이, 이곳 벨리사리오스의 비밀 연구소에서 재현됐다.

기껏해야 총과 몽둥이를 들었을 뿐인 오합지졸들이 신종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이들은 그저 형들이 동생을 혼내주려고 급히 모은 자들에 불과하니까.

데우스가 오른손을 들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저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데우스가 직접 물리적인 타격을 가할 필요도 없었다.

비명을 지른다.

깨어져 나갈 듯한 두통. 실제로 깨어져 나가는지 피를 쏟아내는 눈과 코와 입.

이 사태를 조금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있던 무리가, 마침내 움직였다.

전원이 이단으로 구성된, 로마 교종청의 비밀무력 집단 ‘베드로의 검’.

그들은 ‘가르침에서 벗어난 자들’이기에 이단으로 불리지만, 동시에 신앙의 증명을 통해 신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는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는 자들…… 교종청에서는 그렇게 규정해 두고 있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달리, 병사의 귀를 잘라버린 베드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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