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8)
“목을 베는 게 맞긴 할까……?”
루우는 혼잣말로 질문을 던져보지만, 당연히 답이 나올 수 없었다.
목인지, 아니면 기둥 위에 달린 게레센제의 ‘형상을 한 무언가’를 소멸시켜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 기둥 전체를 없애버려야 하는지.
“속력 더 낼 수 있겠어?”
견하가 물음을 던진다. 뭘 생각하는 걸까.
“아마도.”
“좋아. 그럼 내가 여기서 주의를 끌어볼게. 그 사이에 단숨에 게레센제가 있는 위치까지 올라가는 거야.”
그들이 올라온 높이는 막 기둥의 중간 부분을 넘어섰다.
견하가 용의 머리를 박찼다.
그대로 기둥의 벽면에 발을 디디고, 촉수 몇 가닥을 박아넣어 균형을 잡는다.
전력을 다해, 지금까지는 없었던 기세로 촉수를 뽑아내며 온 사방의 신종을 격추한다.
일순간에 루우를 둘러싼 널찍한 공간이 텅 비어버렸다.
루우는 견하가 이 기세를 고작해야 수 초 정도밖에 유지하지 못 하리란 걸 알았다. 망설일 틈도, 감탄할 틈도 없었다.
그대로 벼락을 뿜어내며 기둥의 표면을 질주한다.
“숙부님…….”
안쓰러움을 담은 그녀의 목소리는 게레센제에게 닿지 않는다.
게레센제의 피부는 이미 파멸인, 혹은 신종의 그것처럼 기괴한 흰 빛깔로 변해버렸고, 무릎 아래로는 아예 기둥과 융합해버렸다.
두 팔을 벌려 십자가에 매달린 어떤 성자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더욱 기괴하다.
천둥과 함께 용이 사라진다.
황금색 빛이 루우의 오른팔에 번뜩인다. 루우는 추락하듯 게레센제를 향해 똑바로 내리꽂힌다.
언월도가 게레센제의 형상을, 그 목에 해당하는 부분을 베었다.
***
“신의 혈통이 애매하게 드러난 자가 지나치게 높은 곳을 바라보았으니, 이런 결말에 이르는 것도 당연하다.”
마르코 폴로의 혼잣말이 리안의 귀를 아프게 때린다.
“문을 연 자를 참살한다는 발상은 자연스럽지.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다.”
마르코 폴로의 시야에는 게레센제의 잘려나간 ‘머리의 형상을 한 무언가’의 모습이 비친다.
그것은 눈을 부릅뜨고 있다. 하지만 그런 형상일 뿐, 이미 저 머리에는 의지도 증오도 없다.
당황하는 루우의 얼굴도 비친다. 기둥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물이 되어 춤을 춘다. 그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견하 역시 당황한 얼굴로 허공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런데도 리안의 눈은 정면을, 마르코 폴로 쪽을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외면하는가. 아니면 그만큼 자신을 향한 적대감이 높은가.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며 집중하고 있는가.
리안은, 마르코 폴로의 말을 모두 무시하기로 했다.
그가 지금 하는 말뿐만 아니라, 여기 온 뒤, 들은 말 모두를.
그가 전제한 모든 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세상들의 틈새, 이곳도 하나의 세상 아닌가.
-이치(理致)를 궁구(窮究)한다.
즉, 궁리(窮理)한다.
세상들의 이치가 조금씩 변경됐다면, 그 모든 세상이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공통된 이치를 공유한다는 뜻이다.
세상의 한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무수한 갈망은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공통점’을 흔적으로 남겼다.
그 세상들을 관조하는 이곳 역시, 세상과 연결된 만큼 공통의 이치를 공유할 터.
-그러니 세상들을 관통하는 이치를 붙잡는다!
올 수 있다면 갈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르코 폴로는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나는 얽매이지 않아.”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거의 매일 패용하는 환도가 들려 있었다. 환도 끝이 마르코 폴로를 향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칼끝 앞에서 마르코 폴로는 리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아닌 나, 그 누군가는 미련한 짓을 반복하겠지.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야.”
싱긋, 리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리석음의 연쇄를 끊어낼 ‘나’ 또한 무한히, 연쇄적으로 발생할 터.”
말을 마치자마자 리안은 칼끝을 수직으로 내렸다.
무엇이 여러 세상에 걸쳐 그토록 견하를 되살리게끔 했는가.
무엇이 여러 세상에 걸쳐, 수많은 이들의 안타까운 갈망을 담아냈는가.
또한, 무엇이 어리석은 결정을 후회하게 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의지를 불어넣었는가.
마음, 즉 심(心)에서 비롯되었다.
견하와 함께할 때 느끼는 기쁨도, 사랑도, 욕망도, 즐거움도,
비극을 뜻대로 할 수 없는 분노도, 슬픔도, 증오도,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 것.
이 한 조각 붉은 마음(一片丹心)만큼은 세상을 거듭해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즉, 심이야 말로 무수한 세상을 관통하는 이(理)일 터.
리안은 환도로 틈새의 바닥을 매섭게 내리찍었다.
***
게레센제가 만든 공간에 있던 모두가, 세상의 위아래가 ‘접히는’ 느낌을 받았다.
시야의 위와 아래가 뒤집혀 다시 맞붙는 기묘한 감각.
순간적으로 모든 중력은 무시되고, 검붉은 문과 리안의 몸이 맞닿았다.
한편으로는 잃었던 의식을 되찾고 일어난다.
또, 한편으로는 검붉은 문을 칼날로 뚫고 강림한다.
동시에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묘한 현상이, 인간의 시야가 미처 받아들일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져 모두의 뇌를 혼란스럽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혼란은 잠시뿐이었다. 시야는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리안의 눈앞에는 붉은 세계가, 경탄과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리고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효윤이 있었다.
“……돌아왔군.”
짧게 중얼거리고 리안은 효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울먹임을 삼킨 효윤이 그녀의 명을 받을 준비를 마쳤다.
“모두들 신종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착각한 것 아닌가?”
리안은 질문인지 질책인지 모를 말을 하며 환도 끝으로 앞을 가리켰다.
아니, 그 조금 아래를.
“모름지기 땅에서 솟아오른 것은 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단은 이단대로 거대한 기둥의 뿌리를 찌르고, 난자하고, 으깬다.
총을 든 자들은 그들대로 모든 화력을 뿌리에 쏟아부었다.
하얀 살점 같기도 하고, 나무 속살 같기도 한 무언가가 튀어 오른다. 파편이 되어 흩날린다.
게레센제였던 이 기둥 형태의 괴물은, 고통스러운 듯 더욱 격하게 몸을 흔들었다.
가지, 혹은 촉수가 소리도 없이 뻗어온다.
지면의 모든 미물, 그 정수리를 찍어누를 듯 내리꽂힌다.
***
루우의 시야 구석, 목을 잃은 게레센제의 형상은 꾸물거리며 그 형태를 잃어갔다.
그것은 순식간에 기둥 끄트머리에 달린 돌기 비슷한 것으로 변했다.
“……숙부는 이미 죽었던 거군.”
그런 사실이 죄책감을 덜어주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숙부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계획 자체는 주견하의 것이었지만, 자신도 이렇게 숙부가 자멸하길 바라지 않았던가.
여기 들어온 수많은 목격자, 회담장까지 데려온 각국의 외신 기자. 그들이 게레센제의 추태를 만방에 알릴 것이다.
게레센제의 명예는 추락하다 못해 완전히 짓밟히겠지. 세계는 게레센제가 이렇게 칸발리크 사태를 연상시키는 만행을 벌인 걸 보고 제멋대로 추측을 덧붙일 것이다.
게레센제가 칸발리크 사태의 배후는 아니었는가. 그가 배후의 알타이 자유 공화국, 즉 반란군과 손을 잡았던 것은 아닌가. 그가 형을 죽이고 멋대로 카간 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아닌가.
루우의 조정은, 고려 정부는 그런 추측을 절대로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루우는 숙부를 죽인 게 아니라 구제 불능의 폭군, 형을 죽인 패륜아를 처단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빼앗긴 자리를 되찾는 정당한 후계자의 이미지를 얻는다.
진위와는 관계없이.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추락하면서도 그녀가 몸에 새긴 전사의 본능은 언월도의 소환을 거둔다. 다시금 용을 불러내 그 이마에 내려앉는다.
추락은 활공이 된다.
급강하하며 역시 추락 중이었던 견하를 받아냈다.
얼떨결에 루우의 두 팔에 안기듯 내려온 견하는 헛기침 몇 번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두 사람은 흘끗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타이시의 의식이 돌아왔군.”
“그래.”
짧은 대답이었지만 견하의 목소리에선 안도가 짙게 묻어나왔다.
지상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기둥의 뿌리 부분을 공격한다. 그 반응인지 기둥의 꿈틀거림이 심해졌다.
“계속 싸울 수 있겠어?”
루우는 질문을 던졌지만, 실상 그 말은 독려에 가까웠다. 싸울 수 없을 것 같아도 싸워라.
“……해봐야지.”
기둥은 나무처럼 무수한 가지를 뻗는다. 그 가지 끝이 견하와 루우, 용을 찌를 듯했지만, 용의 움직임은 빠르면서도 유연하게 그 공격을 피해냈다.
멀리 뻗어 나간 가지는 그들 대신 신종을 붙잡았다. 신종은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치다 이내 부르르, 가볍게 떨더니 흐물거리며 녹아내렸다. 가지는 신종의 피를 빨고 고기를 먹듯 꾸물거린다.
아마 양분을 보충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일 테지. 신종을 섭취하여 조금이라도 더 신종에 가까워지려는 본능.
혹은 그렇게 해야 신종에 가까운 루우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게레센제의 머릿속에 남은 어렴풋한 기억에 따른 행위일까.
식사를 마친 가지가 수직으로 꺾여 아래로 쇄도한다.
견하가 촉수를 뻗어 가지를 끌어당긴다. 강력한 공격이긴 하지만 아까보다 훨씬 기세도, 숫자도 줄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루우의 용이 몸을 비틀어 가지들 속으로 파고든다. 온 하늘을 뒤덮을 듯 벼락의 가지가 괴물의 가지를 태워버리며 뻗어 나갔다.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버릴 듯한 섬광. 귀가 멀듯 한 굉음.
그러나 그 덕분에 지면의 사람들은 뿌리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뿌리를 파헤친다.
이윽고 그 안에서 박동하는, 구체를 발견할 때까지.
“‘신종의 씨앗’.”
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신종을, 파멸인을 파멸한 다른 세계에서 불러오는 문이기도 한 그것.
게레센제가 자기 심장 자리에 박아넣을 때는 주먹만 했던 그것은, 어느새 거대한 기둥의 둘레에 버금갈 정도로 커져 있었다.
리안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루우의 모습은 용의 이마 위에 자그맣게 보였지만, 황제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리안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모두 물러나!”
거리를 벌림과 동시에 용이 내려왔다.
용의 아가리가 신종의 씨앗을 물고, 힘주어 뜯어냈다.
견하는 용에서 내려 리안 곁으로 다가왔다. 반가움을 드러낼 틈은 없었다.
신종의 씨앗을 문 용이, 루우가 승천하듯 하늘로 치솟아 올랐으니까.
용이 턱에 힘을 준다.
신종의 씨앗은 찢기듯 터져나갔다.
안 그래도 붉은 하늘이, 더더욱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피의 비가 내려 모두를 적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