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7)
견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루우에게 반박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그런 견하의 망설임에, 루우는 빙글거리는 얼굴로 답했다.
“게다가 나 말고는 저 위에 올라갈 전력도 없잖아?”
이단이 아무리 인간의 근력을 뛰어넘는 높이로 도약할 수 있다고 해도, 게레센제가 있는 저 위까지 올라갈 수는 없다. 너무 높았다.
기둥의 표면을 ‘바닥처럼’ 차고 올라간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겠지. 꼭대기의 게레센제는 당장은 움직이지 않더라도 누군가 접근하면 공격할지도 모른다. 올라가는 중에 신종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기둥 표면을 박차며 중력을 거스르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전투까지 하면서 올라가는 건 무리다.
즉, 결론은 이렇다.
누군가 ‘날아올라’ 저곳에 가야 한다.
날아오르는 본인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하고, 주변의 동료들도 신종의 주의를 최대한 끌어야 한다.
“동명성왕 주몽은 황룡의 이마를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지.”
오늘, 황룡의 이마를 밟은 소녀가 그렇게 말한다. 어느새 그녀는 기둥 위로 올라갈 준비를 마쳤다.
견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정의 고갯짓이 아니라,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고갯짓이었다.
“그 이야기는 건국 시조의 죽음을 에둘러 표현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화 속 건국 시조는 그 자체로 신, 또는 신의 후손으로 그려진다. 그러니만큼 건국 시조가 평범한 인간처럼 죽었다거나 전사(戰死)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와선 곤란하다.
건국 시조의 신성성은 그가 세운 국가 자체의 신성성이다.
건국 시조가 평범한 인간처럼 죽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세운 나라도 다른 나라와 별다른 것 없는 나라라는 말이니까.
건국 시조가 사람으로 죽을 수 있게 된 건, 부처님이라는 ‘더 큰 품’을 상정하고 나서다. 그제야 고려 태조 왕건은 용의 후손으로 태어나서도, ‘삶은 본래 허망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오늘 견하는 다른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랬을지도 모르고, 오늘 짐처럼 정말 황룡의 이마를 밟았을지도 모르지.”
루우의 이 읊조림처럼, 견하는 정말로 고대 왕국의 건국왕, 동명성왕 주몽이 죽지 않고 황룡의 이마를 밟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게 아닌가 상상해보았다.
역사 속 많은 영웅이 이단으로 추정되듯이, 그 고대의 왕도 루우와 같은 이단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인들도 지금 여기 사람들이 루우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경외를, 주몽에게서 느끼고 있었겠지.
그런 감상은 오래 할 수 없었다.
게레센제의 머리 위, 역겨울 정도로 출렁이는 문 너머에서 속속, 새로운 신종이 머리를 디밀고 있었으니까.
적이 다시 숫자를 회복하기 전에 게레센제를 쳐야 했다.
“그러고 보니 폐하의 벼락은 신종에게 꽤 효과적인 모양인데.”
“그럴 수밖에. 짐은 신종의 피를 이어받았으니까.”
작제건이 어떻게 몽부인을 추락시켜 왕륭에게 주었는지, 천 년 전의 진상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루우는 선조들에게서 전해져 온 대로, 자신도 모르게 진실을 입에 담았다.
자신이 들어간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그 세상의 생물을 닮아가는 신종.
그 특성을 이용해 작제건은 용을 사람처럼 만들었고, 그녀를 며느리로 삼아 왕륭의 자손을 낳게 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늑대와 사슴의 혈통까지 섞인 루우.
이단 루우의 능력은, 단순히 ‘얼마나 강력한가’만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가 ‘얼마나 신종에 가까운 존재인가’를 말하는 지표다.
즉 견하와 루우는 같이 ‘이단’이라는 범주로 묶이기는 해도, 그 기원에 있어서는 완전히 상반된 존재다.
존재 자체로 신의 부정이 되는 자.
존재 자체로 신의 오랜 연원을 증거하는 자.
둘 중 신을 소멸할 수 있는 자는 후자라는 아이러니.
루우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잡담 시간은 끝이야.”
이젠 여유가 없었다. 기둥 꼭대기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해야 했다.
루우는 살짝 고갯짓했고, 견하는 망설임 없이 도약해 용의 이마, 루우의 뒤에 자리 잡았다.
두 사람은 리안을, 그리고 루우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효윤을 돌아봤다. 효윤은 리안 옆에 서 있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효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믿는다는 듯, 두 사람의 믿음에 부응하겠다는 듯.
이미 그들은 말로 하지 않아도 이 상황에서 각자 무엇을 맡아 어떤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이였다.
루우는 예전에 그들의 관계를 유사 가족이라 말하기도 했지만, 4년을 함께한 그들은
전우이기도 했다.
찰나의 시선 교환이 끝나자마자, 용은 하늘로 오르기 시작했다.
신종이 용의 머리를 노리고 달려든다.
아니 견하를 노리는지, 혹은 신종을 멸할 수 있는 루우를 향해 달려드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저것들이 게레센제를 베려는 그들을 가로막는다는 점은 확실했다.
신종의 수가 더 늘어나선 안 된다는 본능적 위기감을, 견하와 루우 둘 다 느끼고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기둥이었지만 전속력으로 오르니 순식간에 중턱에 닿는다. 그 속도에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휘날린다. 하지만 뺨에 스치는 바람은 조금도 시원하지 않았다.
이질적인 걸 넘어 메스껍기까지 한 느낌.
바람을 가르는 게 아니라 뜨거운 물 속을 헤엄치는 감각에 더 가깝다.
“게레센제의 세계와 우리 세계를 구분하는 장막은, 어쩌면 단순한 경계선이 아닐지도 몰라.”
이질적인 공기 탓일까. ‘밖’에서는 바람이 귀를 때려 들리지 않았을 루우의 목소리가, 여기서는 이상할 정도로 잘 들렸다.
“경계선이 아니라면?”
“다른 세계의 ‘침략’에 우리 세계가 ‘저항’해서 만들어진 전선(戰線)이 아닐까 하는 거지.”
견하는 칸발리크 사태를, 토칸이 자신을 불러냈던 의식 속 붉은 세계를 곱씹어보았다.
지금 이곳이 특별히 더 이질적이긴 했지만, 그 공간들 역시…… 세계를 ‘전혀 다른 곳처럼 뒤틀어버린다’라는 느낌이 확실히 있었다.
그런가.
그때도 느낀 불쾌감, 두통…… 그런 것들은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에 침략당하는 데에서 오는 감각이었나.
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변화하면, 당연히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 이(理)도 바뀐다.
이에 기댄 채 살아가는 이단은 이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제야 좀 알겠군.
토칸의 정신상태가 어땠는지.
하나의 세상이 다른 세상에 덮어씌워 져, 멸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지면 안 되는 싸움이군.”
“언제는 져도 되는 싸움을 했던가.”
견하는 루우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눈앞에서 흩날리는 머리칼은 리안에 비하면 훨씬 짧았지만, 왠지 그 모양이 좋아 보였다.
작은 등.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루우의 목소리는 농담조였다.
그녀의 말대로, 지면 안 되는 싸움만 계속해 온 지난 4년이었다.
허동주와 신수덕의 반란, 알타이 인민동맹이 일으킨 몽골 내전, 한족 반란 등 굵직한 전쟁들은 당연히 지면 안 되는 싸움이었다. 동명역 쿠데타, 삼한반도의 허동주 잔당 진압도 마찬가지였고.
크고 작은 무력 다툼뿐일까.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나 다이온 연방 결성을 둘러싼 외교전, 대공황 이후 관세동맹으로 돌파구를 찾기까지 경제 분야에서의 분투. 이 싸움 중 무엇 하나라도 패배했다면 오늘과 같은 성과는 없었다.
그래. 마침내 루우가 다이온 전체의 군주가 될 오늘 같은 날은…….
오늘.
오늘도 지면 안 되는 싸움을 한다.
지면, 그때는 세계의 멸망이다.
저 아래 보이는 모든 사람, 리안과 효윤까지…… 이가 무너져 신체가 붕괴해 죽거나 파멸인이 되어버린다. 마침내 장막이 걷히고 온 세상이 이 붉은 세상으로 덮어씌워 지면, 전 인류가 파멸하겠지.
하늘은 기괴한 소리를 질러대는 신종으로 뒤덮이고.
영혼을 지닌 괴물과 그 영혼을 갈망하는 괴물이 되다 만 것들이, 정처 없이 떠도는 붉은 세계.
한 발짝만 잘못 옮겨도 세상은 그 지경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도 자신은 효율적인, 효과적인…… 그런 말만 붙여서 계략을 꾸미는 데에, 그런 계략이 먹혀들어 가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세상이 망할 수도 있는 이 위기는, 명백히 견하의 책임이다.
게레센제가 자신을 저런 괴물로 변모시켰다고 해서, 신종이 들어오는 문을 열었다고 해서 게레센제의 책임이 되진 않는다.
직접적인 책임이 어쩌니, 이 지경까지 오길 바란 건 아니니 하는 변명을 늘어놓진 않을 것이다. 이 상황은 오로지, 주견하의 책임이다.
어쩌면 리안이 저렇게 된 것도……
“죄책감 느끼고 있을 시간은 없어, 감찰국장.”
퍼득 정신이 들어 다시 앞을 보니, 루우가 어깨너머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황제의 금빛 눈동자가 매섭게 반짝였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어.”
“아직…….”
“세상은 망하지 않았고, 타이시도 저대로 끝난 게 아니야. 그리고,”
루우의 음성이 한결 낮아졌다.
“짐도 아직 몽골의 카간이 되지 못했다.”
움직여라, 신하여. 그대가 꾸민 계략이고 그대가 원한 야망이지 않았나. 짐을 이용했으면 끝까지 이 계획을 밀어붙여라.
견하는 다시 각오를 다지며 끄덕였다.
마치 그러길 기다렸다는 듯 신종의 공격이 시작된다.
한편으로는 신을 죽일 수 있는 신, 루우를 목표로. 또 한편으로는 신이 존재할 수 있는 규칙을 위협하는 견하를 겨냥하며.
어쨌든 두 사람이 세상의 이를 다루려면 육신이 필요하다. 그 점은 신종도 파악했는지 어느새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단 개체들이 달려든다.
기존 신종 개체가 몸을 변화시킨 걸까, 아니면 저 검붉은 문이 그런 개체를 새로 들여보내는 걸까.
어느 쪽이든 신종이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려면 필요한 규칙’에 따라 변화,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다.
견하가 소환한 촉수가 루우와 용의 머리를 돔처럼 덮었다. 신종은 견하의 촉수를 물어뜯거나 발톱으로 끊어놓지만, 곧 새로운 촉수가 놈들을 휘감는다.
꿰뚫고, 짓눌러 터트리고, 찢어발긴다.
“……이제야 죽일 수 있게 되었군.”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신종이 견하와 루우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공격을 집중한다면 여전히 위태롭다.
“역시 게레센제가 조종하는 건가.”
견하는 그런 추측을 입에 담았지만, 루우가 곧바로 부정했다.
“신종 정도 되는 존재가 괴물로 전락한 자 따위의 명령을 들을 리 없지.”
게레센제의 역할은 이 공간을 만들고 문을 여는 것으로 그칠 것, 이라고 루우는 추측했다.
게레센제를 베어내면 문이 닫히고 이 공간도 걷히겠지만, 이미 들어온 신종이 어찌 될지는 루우도 모른다.
하긴 지금 누가 결과를 예측할 수 있으랴.
그저 마지막 희망이라도 잡아보듯, 가능한 한 빨리 게레센제의 목을 베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