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6)
주견하는 ‘영혼을 불어넣어 되살리고 싶다’라는, 미리안의 반복된 열망이 여러 세상을 거치며 차츰 변화시켜 온 존재다.
그리고 처음 미리안을 만날 때마다, 그는 매번 ‘칠정’을 크게 손상당했다.
이단이 되어서 탑승한 기갑사가 왜 ‘칠정 순환계의 역류’, ‘이의 혼란’인 불가살 현상을 일으켰는가. 애초에 견하의 존재는 그런 현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단들은 몸 밖에 ‘무기’의 형태로 모조 영혼을 둔다. 그들도 무기를 소환하지만 견하의 ‘소환’과는 완전히 다르다.
견하가 불러오는 건 작은 파멸인들 그 자체니까. 견하가 만든 검, 견하가 휘두르는 채찍은 그것들을 변형한 것이다. 그렇다면 견하의 모조 영혼은 어디 있지? 견하가 이단이 되던 날, 견하의 몸을 찌르고 들어간 그것은 어디로 갔지?
“주견하는 그런 일을 겪고도 육신이 붕괴하지 않았다. 주견하의 사단칠정은 흐트러져 있다. 사람의 이가 흐트러지고, 사람의 기를 발하지 못하면서도 사람의 형상을 유지하고 사람처럼 행동한다.”
존재 자체가 세상 원리의 부정이다, 라고 마르코 폴로는 단언했다.
“기름이 물 위로 뜨고, 뜨거운 것이 찬 것 위로 뜨는 자연스러움이 신종이라면, 주견하는 정확히 그 반대다. 주견하는 기름이 물 아래에 있고, 뜨거운 것이 찬 것 아래에 있는 상태와 똑같다.”
‘원리’로서의 신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현상을 주견하에게 반복하기 위해 접근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주견하는 붕괴한다.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말지.”
그래서 어떤 1936년에서는, 주견하는 생물의 기능을 상실하자마자 파멸인으로 변한 것이다.
“네가 속한 세상의 네가 영혼과 부활을 바라는 이들의 발걸음을 막을 방법은 없다, 미리안.”
마르코 폴로의 담담하지만 냉혹한 선고를 듣는 순간,
그 한순간 리안의 눈에 절망의 빛이 스쳤다.
절망을 안겨주려는 악의는 마르코 폴로의 마음엔 없었다. 그저 소용없는 고민을 거듭하는 미리안이 안쓰럽다…… 그런 얼마 남지 않은 인간적 감정의 표출일 뿐.
그마저도 너무나 희미해서, 이제 마르코 폴로는 의문에 자동으로 답해주는 기계에 가까웠다.
그러나 리안의 눈은 곧바로 마르코 폴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마르코 폴로는 그 눈을 보며 희미한 놀라움을 느꼈다.
단순히 적대, 반발만을 담은 눈이 아니었다.
의지가 불타오르는 눈이었다.
***
공기가 바뀌는 느낌에 루우는 잠시 숨을 멈췄다.
금방 다시 숨을 들이쉬었지만, 확실히 검은 기둥 안으로 들어오기 전과는 달랐다. 어딘가에서 불이라도 피우는 듯한 매캐함이 코와 폐를 찌른다.
“칸발리크 위에 장막을 씌운 때와는 다르군.”
혁세주의 출현 당시 칸발리크도 검은 장막에 뒤덮였었다. 그러나 이번에 게레센제가 만든 장막 안에는, 원래 있어야 할 평원이 아니라 다른 세상이 있었다.
이 세상은 ‘붉은 꿈’을 통해 보는 세상과도 조금 다르다.
“게레센제 숙부가 만들어낸 것…… 이라고 봐야겠어.”
그 말을 들으며 효윤은 자신의 박도를 소환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루우와 함께 싸웠던 칸발리크의 풍경이 되살아났다.
그때처럼 머리가 지끈거리진 않지만.
소집된 모든 이단이 황제를 따라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에는 칸발리크 사태를 통해 이런 광경을 본 적 있는 이도 있었지만, 많은 수가 처음 보는 광경에 경악했다.
얼핏 보기엔 생명이라곤 조금도 없는 황량함에 먼저 놀란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붉은 세계의 풍경은 생명 그 자체를 배척하는 것만 같다.
그 안에서 생명인 자신 또한 초대받지 않은 손님 취급을 받아, 언제라도 쫓겨날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진다. 혹은 이렇게 함부로 ‘생명 없는 순수한 세계’를 휘젓고 다녀도 될까 싶은 죄책감이 든다.
존재 자체가 세계에서 겉도는 감각. 지면에는 발을 딛고 있으나 세계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불일치. 그런 감각에 어떤 이는 메스꺼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깨달음이, 그들이 느끼는 메스꺼움의 정체를 알려준다.
그들이 발을 디딘 대지는 혈관이나 내장의 표면 같은 것이라고.
생명이 없는 게 아니라, 생명이 과잉된 세계다.
모든 것의 ‘이’가 무너져, 경계도 질서도 없이 하나의 생명이 되어버린 세계. 영혼을 얻겠다는 그 아집만이 영원히 남은 세계.
그런 세계이니, 자신들의 목적과는 관련 없는 불청객이 들어오면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이런 세계에선 멀쩡하게 ‘이’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여기가 정말로 ‘혁세주의 붉은 세계’였다면 암담했겠지만, 이곳은 원본이 아니다.
게레센제가 만들어낸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루우는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하얀 기둥을 보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세계의 본질과, 타파할 방법을 떠올렸다.
“……진군한다.”
황제는 부하들의 기분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그렇게 명령을 내리며, 자신의 언월도를 소환했다. 사실 부하들의 당혹감을 살핀다 해도 루우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빨리 이 사태를 끝내고, 이 기분 나쁜 붉은 세계를 치워버리는 수밖에.
루우가 대지를 박찼다.
황제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최효윤과 태주갑을 비롯해 뒤따르는 모든 이단도 함께 다리 근육에 힘을 주었다. 그들의 눈에도 황량한 붉은 벌판 위에 우뚝 서 있는 하얀 기둥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검붉은 원…… 하늘을 나는 무언가를 뱉어내는, 거대한 문도.
***
신종은 게레센제가 만들어낸 이 세계가 얼마나 작고 조잡한지 알지 못한다.
신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판단으로, 이 세계에서 ‘이질적’이라 판단한 것들을 제거하려 들 뿐이다.
아니, 판단이라는 걸 하긴 할까.
이제는 견하만 공격하는 게 아니다. 일행 중에 섞인 이단들을 향해서도 공격을 가하더니, 점차 이단인지 아닌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을 공격하려 든다.
견하가 가장 넓은 범위를 방어할 수 있었기에 대부분의 공격을 맡고는 있지만, 이단들 역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일반인을 지켜야 했다.
-머리를 으깨도 뇌 비슷한 기관은 안 보이는군.
견하는 반복되는 전투에도 지쳐갔지만, 적의 급소를 찾을 수가 없다는 초조함에 더 피로를 느꼈다.
적이 물러나게 하려면…… 아니 적어도 무력화하려면 저 기둥 꼭대기의 게레센제를 베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도 이 상황이 진정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가장 눈에 띄는 표적이지 않은가. 이 사태의 원인임은 말할 것도 없고.
원인을 제거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수밖에.
게레센제의 형상을 한 저 ‘무언가’를 없애도, 이 상황이 끝나진 않는다…… 그런 끔찍한 이야기는 지금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다만, 베어야 한다면,
-역시 정치적인 문제일까.
이런 상황을 모두가 목격한 이상 게레센제가 카간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벤다면? 루우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보르지긴이 다른 보르지긴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난 결과, ‘죽임’을 당한다면?
앞으로 루우의 치세가 이어지는 동안 그게 얼마만큼의 약점으로 작용할까.
머리 바로 위로 달려드는 신종의 좌우 날개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날개뿐만 아니라 주변의 살갗도 뜯겨 나온다. 그것들을 멀리 던져버리고 다시 생각한다.
아니, 성급한 생각이다. 루우의 입장이 곤란해지기 전에 일단 게레센제를 베어낼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다.
다시 리안을 본다. 그녀의 눈은 계속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방황한다.‘
리안을 깨울 방법이라도 있다면…….
그때, 천둥소리가 견하의 귀를 먹먹하게 했다.
***
울제이는 보았다.
이단의 군세가 달려오는 모습을.
그 군세의 선두에 고려의 황제, 그의 조카가 선 모습을.
먼 옛날의 군대에서나 볼법한, 전사이자 장군이자 군주인 자가 선두에서 돌격하는 모습은 울제이의 가슴마저 뛰게 했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비웃음이 치밀어오르면서도, 시대착오적이기에 웅장하다.
제왕의 용포고 뭐고 없이 전투에 적합한 가벼운 차림만 걸친 루우 테무르지만, 누가 봐도 그녀가 군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엄이 피부 위로 넘쳐흐르는 듯한 아이다.
달려오던 루우 테무르가 도약한다.
멀리 뛰려는 건가 싶었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발은 땅에 닿지 않았다.
벼락. 멀리 떨어진 지금 자신의 피부를 떨리게 하고 옷자락을 흔드는 공기의 움직임. 빛.
늑대를 닮고 사슴의 뿔이 달려 보르지긴의 조상이 누구였는지 알려주는 형상. 그리고 그 위에 뒤덮인 용의 금빛 비늘은 그녀가 세상의 동쪽 절반에서 가장 고귀한 피만 섞인 후손임을 알려준다.
그 거대한 형상이 루우 테무르의 두 발을 떠받쳤다.
울제이도 거의 본 적 없는 광경.
아마 최근엔 흑백 영상으로 봤었지. 고려 내전, 허동주를 죽인 신환도역 전투. 아마 세계 각국 정상들은 사진으로든 영상으로든 그 광경을 보고 숨을 삼켰을 것이다.
고려에 이토록 강대한 이단이 있다니. 그리고 그런 자가 고려의 새로운 군주라니.
울제이의 감상은 조금 달랐다.
나 따위가 루우 테무르의 자리를 위협해도 될까.
시레문의 동생이고 남자라는 것, 연장자이며 정치 경험이 더 길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그는 이단이 아니었다. 이단이 될 가능성이 큰 혈통을 타고났지만…… 아니었다. 그와 그의 형제들 모두.
우리 혈통에서 가장 두드러진 능력을 보이는 조카.
호탕하게 웃어넘겼지만, 그 열등감은 알게 모르게 가슴 속에 남아 있었던가.
“……형님…….”
형님도 그러셨습니까. 그것이 오늘의 이 결과입니까.
이단이 아니면서 이단을 따라잡으려 했기에, 루우 테무르만큼 강대한 힘을 손에 넣으려 했기에 괴물이 되는 결말을 맞이한 건가.
용은, 용의 군주는 어느새 뒤따르던 이단의 군세보다 한참을 앞장서, 회담장에 있던 사람들 앞에 그 위용을 뽐내기 시작했다.
용이 신을 삼킨다.
몸에 두른 벼락과 광채만으로도 루우 테무르의 용은 신종을 흔적도 없이 태워버렸다.
***
그 광경은 견하의 눈에도 들어왔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신환도역 전투와 똑같은 모습이었으니까.
반격을, 승리를 알리는 용의 불길.
촉수들을 거두고 잿더미가 떨어져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게레센제 숙부의 목은 내가 베어야겠지.”
돌아보자, 어느새 견하의 곁으로 다가온 루우가 보였다. 그녀는 애써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씁쓸함을 감출 순 없었다.
“네가 정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건 알아.”
이런저런 잡음은 있었어도, 루우와 견하 역시 4년 동안 함께해 온 동지였다.
루우는 주저앉아 있는 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짐이 할 일이야. 구하는 것도, 비난을 받는 것도, 패륜을 저지르는 것도, 새 시대를 여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