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5)
“물론. 짐과 태사, 감찰국장과 정보사령관이 충분히 논의한 대로다. 지금 이 사태도, 짐의 출격도.”
예상과는 어긋난 부분이 많았지만 루우는 그렇게 잘라 말했다. 이건 전군의 사기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정세와도 관련된 문제다.
여기서 괜한 불안을 심어놓으면 루우 테무르를 중심으로 한 다이온 체제 구축에 차질이 빚어진다.
이러한 돌발 사태 또한 루우 테무르 이하 고려 지도부는 충분히 대비해두었으며, 그렇게 대비된 시나리오에 따라 대처하면 된다. 그런 확신을, 루우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심어주어야 했다.
하지만 김천열은 그 답만으로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신(臣)이 폐하께 감히 의견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루우는 금빛 눈동자만을 돌려 김천열을 응시했다.
“허한다.”
“폐하께선 나라의 기둥이십니다. 부디 구출 작전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재고하심이……!”
루우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기둥은 그대와 같은 자들이지. 혹은 태사 같은 이들이 제국의 기둥이다.”
“그 기둥도 단단한 초석 위에서야 설 수 있는 법입니다. 폐하! 초석이 없으면 기둥도 없습니다.”
“짐은 초석조차 아니다. 초석은 백성이지. 그리고 여기 있는 평범한 군인들, 휴가를 나가거나 전역하면 맞아줄 가족이 있는 이들, 지금도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이다.”
루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고려어로 한 번, 몽골어로 한 번. 다분히 주변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김천열은 그런 답을 유도한 건 아니었지만, 눈앞의 이 가녀리게만 보이는 황제, 아직 어린 줄만 알았던 황제가 이 순간마저도 정치가로서 발언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어떤 이는 이런 모습을 보고 가식이다, 교활하다 말하겠지만, 김천열은 성숙함을 느꼈다.
우리의 황제는 더는 어린애가 아니다.
숙부들보다도, 그 신하들보다도 더욱 현명하고 어진 분이 바로 우리의 황제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지 않으랴!
“짐은…… 그래. 그 위에 얹힌 지붕의 장식 정도겠지. 여기가 누구의 집인가, 하는 정도의.”
사람의 마음을 알고, 활용할 줄 안다. 무엇이 상황에 적절한 발언이고, 또 어떤 말이 사람의 마음을 고무시키는지 안다면, 더는 물러서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군주라면.
그리고 이질적인 여러 무리를 하나의 국가로 엮어야 한다는, 자신의 역할을 잘 아는 군주라면 더더욱 충성하기에 적합하지 않은가.
“게다가 보르지긴 가문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보르지긴이 책임져야겠지.”
김천열은 그제야 자신의 의견을 거두고 물러났다.
물러나면서 주변을 살핀다. 고려군은 말할 것도 없고 몽골군 역시 눈에 묘한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울제이의 편에 선 자들이든, 고려 편에 서서 울제이를 반대하기로 한 자들이든.
당장 루우 테무르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진 않더라도, 이렇게 ‘어쩌면 루우 테무르야말로……?’라는 잔잔한 생각 한 조각을 심어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역사는 변한다.
김천열은 각오를 다진다. 자신이 할 일은 이미 미리안과 주견하로부터 들었다. 구종환에게서 다시 확인받고, 혼자서도 몇 번이고 검토했다.
“사태가 더는 외부로, 민간인 거주 지역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경계하겠습니다. 또한 폐하가 무사 귀환하실 수 있도록 모든 종류의 지원에 대비하겠습니다.”
루우는 그 말에는 따로 답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동원 가능한 모든 이단이 루우의 뒤에 모였다.
가까이서 본 검붉은 기둥은 그 표면이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올려다보면 마치 하늘에 닿은 것처럼 아득해, 어지럽기까지 하다.
칸발리크에서도 비슷한 일을 해봤건만, 그래도 살짝, 겁이 난다.
하지만 황제이자 카간으로, 두 어좌의 주인으로 향하는 길에 망설임은 없어야 할 터.
누군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루우는 성큼성큼 기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리안은 답답한 심정으로 견하의 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왜 내 몸은 저기서 저렇게 의식을 잃고 있는가.
나를 깨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신을 향한 인간의 집념은 진보한다.”
리안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마르코 폴로는 말했다.
“숭배는 그렇게 되고 싶다는 표현의 아주 낮은 단계지. 부러움, 시기심의 온건한 단계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신을 부러워하며 결국에는 신이 되고자 한다.”
신처럼 되어서 영혼을 지니고자 한다.
유일신을 섬기는 자는 신의 숨결을 얻고자 하고,
다신교의 신들을 섬기는 자는 신들의 자리에서 말석을 얻고자 하고,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신마저 초월한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
“그 집념이 어리석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집념이 이룬 것들이 대단치 않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 미리안.”
인간의 어리석은 집념은 성과를 거두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의 집념은 계승된다.
인류를 파멸시킬 무언가라 해도, 집념 또한 의지이기에 세상의 틈을 통해 계승되고야 만다.
“게레센제는 단신으로 혁세주와 비슷한 현상을 일으키는 경지에 이르렀지.”
비록 이단은 아니지만, 그의 몸에도 몽골 황실의 푸른 늑대와 흰 사슴,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고려 황실에서 들여온 용의 피가 흐른다.
그 혈통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검붉은 장벽 안, 혁세주의 표면 같은 붉은 세상이 펼쳐지고, 또 거기엔 검붉은 문이 있어 신종을 불러들이고 있다.
잠깐이지만 루우가 같은 일을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본다. 상상은 끝까지 이어지진 못했지만 리안은 몸을 떨었다. 소름이 두피부터 발등까지 뒤덮는 느낌이었다.
“이대로라면 혁세주가 ‘게레센제가 만든 틈’에 눈을 돌릴 수도 있다.”
마르코 폴로는 담담하게 고했다. 그의 눈은 작제건이 살아 있던 시절로 향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혁세주를 끌어들였던 남자. 자신의 힘으로 혁세주를 밀어내기까지 했던 남자.
그때처럼 혁세주를 밀어낼 인간은 존재하지 않건만.
그때처럼, 혁세주는 세상의 틈으로 자기 몸을 디민다.
혁세주야말로 인간 집념의 결정체니까. 다시 한번 인간에게 영혼을 주려는 시도를 느끼고, 또 그런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움직인다.
“혹은 게레센제가 ‘이번 세상’의 혁세주가 될 수도 있지.”
수많은 세상에, 수많은 비극의 ‘기원’이 흩어져 있다. 원인은 다양하다. 사람들의 열망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만큼,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혁세주가 탄생하고 만다.
혁세주가 존재하게끔 하는, 수많은 기원.
“어느 쪽이든 게레센제를 저지해야 하는군요.”
게레센제가 새로운 혁세주가 되든, 아니면 어딘가에서 혁세주를 불러들이든, 그 전에 저지해야 한다.
저지해야 한다, 고 돌려 말했지만…… 이 말은 결국 게레센제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뜻이다.
견하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보르지긴이 보르지긴의 피를 흘리게 하는 길은 피하고 싶었는데.
모든 일이 잘 풀린다 해도, 그건 루우의 치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다시 견하의 분투로 눈을 돌렸다. 그의 채찍질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그는 기계가 아니다. 나가떨어지기 전에 누군가 도움을 줘야만 한다.
아무리 처참한 지경에 이르러도, 신종은 몸을 일으켜 순식간에 재생해 다시금 공격을 감행한다.
파멸인은 저 지경까지 가면 죽는데.
“엄밀히 말해서 신종은 생명이 아니다.”
신은 영원하다, 혹은 영혼은 영원하다…… 이 말은 죽음이 없다는 뜻이다. 죽음이 없다면 삶 역시 없다. 살아있지 않으니 삶을 박탈할 수 없고, 이미 죽어 있으니 죽일 수 없다.
그저 ‘이 세상의 원리’에 따라 형체를 순간적으로 일그러뜨릴 수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 상태가 계속될 리 없으니 ‘원래대로 돌아가’ 공격을 반복한다.
“신종이 자신이 출현한 세상의 존재와 완전히 ‘닮게’ 될 때까지지.”
“그럼 견하가 버티기만 하면……?”
“아니, 거기 신종은 네가 사는 세상에 출현한 게 아니지 않나.”
그랬다. 신종은 견하와 리안이 사는 세계로 들어온 게 아니라, 게레센제가 만들어낸 붉은 세계에 들어왔다. 그 붉은 세계에서 신종은 다른 무엇을 닮을 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게레센제가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이중으로 분리한 건, 우연히 그렇게 된 걸까 아니면 계산된 행동일까.
지금 촉수들의 기둥 위에 장식처럼 붙어 있는 게레센제에게, 이성이 남아 있을까.
리안은 원망을 담아, 게레센제가 상공에 연 문을 올려다본다. 신종은 그 위에서 계속 내려오고 있다.
“신종은 문을 연 자의 뜻에 따르는 건가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다. 게레센제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모두를 증오할 테지. 카간 자리를 강탈한 동생도,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조카도, 그런 계략을 꾸민 리안과 견하도.
그 증오의 반영이 아닐까, 막연히 그렇게 추측해본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는 부정했다.
“그럴 리가. 신종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들어온 세상의 생물들을 닮음으로써 먼저 ‘적응’하려고 하지.”
그렇기에 인간이나 짐승과 닮은 모습을 취하려 한다. 그 과정이 기괴하긴 해도, 마침내 어디선가 본 듯한 형상을 갖추게 된다.
루우의 먼 조상, 왕씨 가문에 용의 피를 물려준 몽부인 역시 그러했다.
“파멸인은 영혼에 대한 갈망, 붕괴된 육신에 대한 절망으로 사람을 공격한다. 신종의 저런 행동은 오히려 파멸인에 가깝지.”
“갈망도 절망도 없는데 대체 왜……?”
“만약 일반적인 이단만 있었다면 신종의 행동 양상도 달랐을 거다. 그러나 미리안, 생각해봐라. 주견하는 ‘일반적인 이단’인가?”
마르코 폴로는 온화한 말투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지금 이 말은 리안에겐 꼭 매서운 질책처럼 들렸다.
답은 생각할 것도 없었다.
견하는 일반적인 이단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굳이 ‘일반적이지 않다’라고 말로 표현하길 꺼렸을 뿐.
‘직접 문을 열고 파멸인에 가까운 무언가를 데려와서 부리는’ 이단이 견하 말고 또 있던가?
‘문 너머의 세상과 신체 일부나마 직접 접촉한’ 이단은?
‘기갑사와 같은 기계를 체내에 흡수한’ 경우는? 그것이 다시 신체 일부의 기계화로 드러난 경우가 견하 말고 또 있나?
오직 견하만이 그런 이상 현상을 드러냈다.
“……그게, 저 신종들이 견하를 적대하는 이유인가요?”
“신은 똑같이 신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의외로 관대하지. 기꺼이 자기들 옆자리를 내어준다. 하지만 신의 존재 그 자체가 위협받는다면 어떨까?”
마르코 폴로의 은유는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려웠다.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리안은 눈 앞에 펼쳐진 문제를 이해하게 되었다.
“적대, 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그저 ‘반응’하는 것이지. 신종은 인간이 생각해 온 그런 신들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개념에 가장 가깝다. 신을 향한 인간의 시도는 모두 불완전했지. 하지만 주견하는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