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4)
명령을 내릴 거라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나타나, 너무도 당연하게 명령을 내린다. 그 탓일까. 울제이 측 장성은 루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굴리다 이렇게 되물었다.
“무, 무엇이라고 연락을……?”
루우의 미간이 일그러지고, 혀에서는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호통까진 나오지 않았다.
루우는 낮아진 목소리로, 장성의 머리에 못 박듯 구체적인 명령을 때려 넣었다.
“고려 황제가 여기 있다, 현 시간부로 다이온 전 군대는 ‘다이온의 보호자’인 황제의 명령을 받는다. 즉각 통합 대응 부대를 꾸릴 준비를 할 것.”
그리고, 하면서 루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덧붙였다.
“최효윤 중장과 그 부대를 이곳으로 보내라는 연락도.”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루우는 다른 참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네 군대에 소속된 이단은 전부 긁어모아. 이건 일반인으로는 대응 불가야. 고려와 다이온 전체의 이단 전력으로 구출 부대를 편성한다.”
***
신종.
신 또한 생명의 한 종류로 분류하려는 그 명칭이 정말 적절한지, 견하는 의문에 휩싸였다.
위로부터 내리쏟아지는 공격. 그것을 막기 위해 견하는 소환할 수 있는 모든 촉수를 뽑아내 채찍처럼 휘두르며 방어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강력했기에, 방어는 거의 전적으로 견하의 몫이었다.
촉수 다발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반구를 그리며, 그 안으로 접근하려는 모든 신종의 공격을 후려쳐냈다.
채찍에 맞은 인간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듯, 신종도 그 기괴한 몸이 더욱 기괴하게 뭉개지며 지면에 처박히거나 멀리 내동댕이쳐졌다.
하지만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
“……재생을…… 하는군.”
울제이가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한 결과를 말한다.
그의 말대로였다. 견하의 공격에 찢기고 짓뭉개져도, 신종은 곧 원래의 형상을 회복했다.
다른 이단의 병기나 총기에 맞은 개체들도 마찬가지였다. 견하의 촉수들이 만들어낸 방어망을 뚫고 들어온 그것들은 이단 여럿이 달려들어 난도질하거나 일반 군인들의 집중사격으로 곧 무력화됐다. 하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재생하며 몸을 일으킨다.
완전히 재생하기 전에 견하가 그것을 촉수로 휘감아 방어망 너머로 던져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파멸인은 인간을 닮은 구석이라도 있지만 이것들은 아니야.
사람이 아닌 것. 촉수에 와 닿는 그 감촉만으로도 이것들이 얼마나 이질적인지 알 수 있었다.
-표면에 눈 같은 게 있긴 해도 속은 생물과는 전혀 달라. 내장이 없어. 약점이 될 만한 치명적인 기관도 없어.
관자놀이에서 목까지, 얼굴을 타고 땀이 흘렀다.
이대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견하의 양 손바닥 위, 먼 어딘가의 공간을 잘라낸 그 둥근 틈에서 촉수들은 끊임없이 나와 싸워주고 있다.
어딘가에서 온 아이들. 죽어간 아이들. 살고자 했던 아이들.
그들이 견하의 부름에 응해, 삶을 부정하는 것들과 싸워주고 있다.
문제는 견하가 그들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얼마나 더 열어둘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왼팔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이제는 피를 흘릴 일이 없는, 저주받은 팔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피가 솟는다. 왜지? 이게 내 피이긴 한 걸까? 상의를 벗고 붕대를 풀어 왼팔의 상태를 보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틈이 나지 않는다.
리안이라도 정신을 차리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이런 소모적인 방어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애초에 저 신종이라는 것들은 왜 인간을 공격하지? 파멸인은 잃어버린 인간의 형상을 추구해서, 또는 이단의 존재에 위협을 느껴서 그런다고 하지만 저것들은 대체 왜?
밖에서는 뭘 하고 있을까. 루우는? 김천열은?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을까?
게레센제의 충동적인 발악을 유도한다는 작전 자체는 성공했다. 게레센제는 결국 미리안과 울제이의 회담 자리에 나타났다.
울제이와 그 참모들 앞에서 괴물의 본성을 드러냈다. 이것만으로도 작전의 반은 성공한 셈이다.
바깥의 고려 군대, 울제이의 군대, 혹은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는 루우 테무르가 카간으로 적합할지 의심하는 모든 이들 앞에 ‘게레센제를 축출할 이유’가 드러났다.
그러니까 게레센제만 물리치면, 울제이의 입을 닥치게 하고 루우가 유일한 카간으로 설 수 있다. 그럴 수 있는데…… 대체 이 공격은 언제 끝나는 거지?
루우가 밖에서 게레센제가 만들어낸 이 기괴한 현상을 깨뜨리기만 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된다. 자신은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루우가 너무 오래 걸린다면? 자신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면?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혹시 나는 게레센제가 일으킬 현상을 과소평가한 건 아닐까? 게레센제가 일으킨 이 현상이 협상장에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평원에 있던 모두를 집어삼킨 거라면?
루우나 효윤에게도 뭔가 일이 생겼으면 어떡하지? 이대로…… 탈진할 때까지 싸우다 죽는 건가?
리안의 의식은 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걸까. 이에 대한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자만한 탓이다.
작전이 성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혁세주니 파멸인이니 하는 것이 ‘예상한 범위 내’에서 작동하리라 생각했기에, 계획에서 어긋난 일이 한 번 터지고 나니 이 꼴이다.
분명 게레센제의 이동 경로는 확인하고 있었다. 보고도 계속 들어왔고…… 그 속도대로였다면 언제 도착할지 가늠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게레센제의 도착 시간에 맞게 울제이와의 회담을 질질 끌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공간을 뛰어넘어 나타날 줄이야.
애초에 정보도 없고, 멀리 떨어져 있기까지 한 게레센제가 방향을 정확히 잡아서 내려오는 시점에 의심을 한번 해봤어야 한다. 그토록 사소한 것까지도 의심하면서 왜 그 부분은 간과했단 말인가.
이단의 힘이, 파멸인의 기괴함이, 혁세주의 무자비함이 자신이 ‘계산’ 내에서 작동하리라는 망상. 그 오만이 결국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지 않았나.
다시 한번, 리안을 곁눈질한다. 아까 전과 달라진 게 없다. 견하의 움직임은 리안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리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니 이미 생긴 것 같지만, 사태가 끝나도 리안이 저대로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 작전에 성공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렇게 견하의 손에 남은 제국은, 껍데기일 뿐이다.
견하의 저울에는 수천만, 수억의 인구도 맞은편에 리안을 올려놓는 순간 깃털처럼 붕 떠버린다. 지금 그에게 리안만큼, ‘가족’이라 여겨질 만큼 가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그런 가치 있는 이들 전부를 합쳐도 리안에게 미치지 못한다.
-이대로 죽게 할 순 없어!
자신이 죽더라도 리안은 살려서 내보낼 것이다. 가서 자신의 풍군작전으로 완성한 제국을 통치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 생각해라. 방법을 궁리해라. 계략을 짜내라.
이를 악물고 한층 거칠게 신종을 찢고, 붙잡아 던지고, 패대기친다.
견하는 버틸 수 있는 한계 이상까지 버티길 각오했다. 온몸의 혈관을 활짝 열고, 멈추지 않고 피를 돌리려는 듯이 기(氣)를 조정하고 이(理)를 수정해 극한의 효율성으로 적의 공격에 대처한다.
그러다 목숨 그 자체가 마모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
울제이의 참모들은 루우의 개입에 오히려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당장 울제이를 비롯한 최종결정권을 지닌 이들이 저 검붉은 기둥 속으로 사라진 마당에,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는 부담을 짊어지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책임감이 강한 자라도, 누군가 어깨의 짐을 덜어주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법이니.
게다가 루우 테무르는 몇 년 전만 해도 몽골 카간의 유일한 따님, 즉 공주님이 아니었던가.
구중궁궐에서 곱게 자란 공주님이 와서 상황을 통제한다고 하면 다들 어색한 얼굴이 되었겠지만, 루우 테무르는 실전 경험이 있는 군인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그렇지만 고려가 벌인 다른 큼직큼직한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으니 어깨너머로 전략도 배웠을 터였다.
전장을 아는 공주님이라면 지휘를 받아도 문제가 없다. 그것이 지금 울제이군 장성들의 기분이었다.
물론 이것도 견하의 의도한 바 중 하나였다. 이번 위기에서 또다시 루우가 활약하게끔 해서, 루우 테무르라는 ‘하나의 군주’ 밑에서 신하의 정체성을 갖게끔 하는 것.
향후 동군연합이 이루어질 때를 위해서라도, 이런 과정은 꼭 필요했다.
울제이군과는 달리 루우의 앞에 불려온 김천열은 침착했다. 그가 담력이 울제이군 장성들보다 더 커서는 아니었다. 그는 회담 직전에 게레센제를 둘러싼 작전을 보고받았기 때문이다.
정보사령부의 구종환 중장. 그자가 태사 및 감찰국장과 비밀리에 추진해오던 작전을 그제야 말해주었다.
뭐 당연히 태사의 명령이 있었으니 그 시점에 드러낸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야전사령관 체질인 김천열은 후방에서 정보를 다루는 구종환이 마음에 차진 않았다.
-전쟁에서 정보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편견인지 뭔지, 아무래도 음습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저놈이 아는 정보가 뭘까. 뭘 감추고 뭘 꺼내고…… 그래서 뭘 꾸미고 있지는 않을까.
물론 구종환 중장 입장에서도 김천열에게 경례하는 기분이 썩 좋진 않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참 후배에 소장에 불과했는데, 줄 좀 잘 섰더니 어느새 대장을 달고 원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어쨌든 약간 어색한 태도로 보고를 받은 후, 김천열도 나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고심했다.
루우가 그랬던 것처럼 동원 가능한 이단을 모으고, 조심스러운 눈길로 회담장을 지켜보았다. 한편으로는 게레센제 출현 보고가 들어오진 않는지 주의하면서.
황제 앞으로 나아가 이상의 조치를 보고한다. 황제는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끄덕임으로 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무기’를 이리저리 변형시켜보더니, 작전에 필요한 장비를 몸에 착용하는 중이었다.
그렇다. 루우는 직접 구출 작전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신환도역 전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산동 토벌전에서 최전선에 나섰듯이. 그리고 칸발리크에서 파멸인의 공격으로부터 시민들을 지켰듯이.
이번에도 최효윤 중장이 함께하는 듯하다. 그녀와 태주갑의 부하들 역시 전투 준비로 분주하다.
여기에 울제이군과 고려군에서 끌어온 이단들이 합세했으니, 이단 전력이 단일 작전에 투입된 사례로는 세계대전 이후 최대일 것이다.
하지만 김천열은 감히 황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 이 모든 게 주견하 중장이나 미리안 태사와 논의된 일입니까?”
고속으로 진급했다곤 해도, 김천열 역시 장성이 되기까지 꽤 오랜 기간 작전과 씨름해온 사람이었다.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음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