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3)
얼핏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리안은 조금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네가 포기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포기하는 건 아니다.”
“……무슨……?”
리안의 눈앞에 이제껏 본 것과는 다른 영상들이 펼쳐졌다.
가슴팍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정말로 훌륭한 장성이 된 최효윤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어떤 연구소를 시찰하며 연구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또 다른 영상에선 반쯤 옷이 벗겨진 소녀가 보인다. 그녀의 머리에는 뿔이 돋아나고 드러난 살결 곳곳에 비늘이…… 보인다. 루우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눈물을 계속 쏟아내면서도 그녀는 어떤 말을 되뇌고 있었다.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리안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남은 시간 동안, 짐이 해야만 해.
마르코 폴로가 가볍게 손짓하자 모든 영상이 사라졌다.
암막을 친 것 같은 공간 속에서, 미리안과 마르코 폴로의 모습만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너희뿐만이 아니다. 영혼을 얻기를, 내세를 누리기를 바라는 인간들의 염원은 모든 세계에, 예외 없이 있었다. 너희처럼 떠나간 이를 그리워한 사람들의 염원까지 합치면, 대체 얼마나 많은 세계에 얼마나 많은 영혼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지 알겠나?”
그 모든 갈망이 모여 혁세주를, 파멸인을, 이단을 만들었다.
미리안이 딱히 특별한 게 아니다.
이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왜, 하필이면 나는 여기에 와서, 이런 혼란스러운 이야기만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가.
퍼뜩, 여기 오기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빨리 나가야만 한다. 돌아가야만 한다.
게레센제가 회담장에 갑자기 나타났고…… 그리고, 자신은 무사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많은 가능성의 세계를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견하가 죽는’ 세계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 세계 중 하나가 지금 자신이 사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제가 여기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은 정말 없는 건가요?”
“네가 있던 곳에서 누군가 세상의 틈새를 벌렸지. 너는 그 틈으로 빨려 들어왔다. 밖에서 그 ‘누군가’를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못 돌아가. 기다려라.”
답이 없는 질문이었나.
리안은 질문을 바꾸었다.
“다른 시도는 없었나요?”
“있었지. 그러나 그것이 어떤 세상이 ‘혁세주의 발생과 함께 멸망한다’는 결과를 뒤집지는 못한다. 결과를 위한 원인은 반드시 어딘가에 예비되어 있으니까.”
혁세주의 존재는 그처럼 절대적인 건가.
리안이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존재. 리안이 견하를 되살리길 바라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영혼을 염원하여 세상을 혁세주를 위한 제단으로 몰아간다.
지금 보는 모든 광경이 이 마르코 폴로를 자처하는 존재의 사기일 가능성도 없진 않았지만, 리안은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한다.
혁세주의 탄생을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견하가 죽지 않을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주견하의 죽음을 저지하려는 시도는……?”
침묵만이 돌아왔다.
어째서인지 마르코 폴로는 리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이전 문답을 통해 충분히 답을 유추할 수 있는데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 탓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건가.
리안은 털썩, 정좌로 주저앉았다.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생각한다.
원래 세계, 원래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때부터 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른다. 되돌릴 수 없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그리고 그 이후까지, 시간은 흘러만 간다.
죽게 하지 않을 테다.
견하가 죽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낼 것이다.
그러니 생각하자.
생각하고, 또 생각하자.
아직 ‘시간’이 있을 때.
***
이 붉은 세계에 오는 건 두 번째다.
견하는 멸망한 붉은 행성의 표면을 둘러본다. 전에 토칸이 자신을 불러내 대화를 나눴던 곳과 비슷하다.
그러나 전에 왔던 곳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멀리, 하얗고 거대한 기둥이 서 있기 때문이다.
기둥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하얀 촉수들이 무언가를 하늘 높이 떠받들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촉수들, 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 굵기는 거대한 나무줄기와 같을 것이다. 그것들이 위로도, 아래로도 곧게 뻗어 있다. 붉은 지면을 뿌리처럼 움켜쥐고, 검붉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늘이 일렁인다. 저 너머에 뭔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촉수들이 만든 거대한 기둥 꼭대기에는…… 이 상황을 만든 인간의 형상이 있었다. 거리는 멀지만 누군지는 확실히 보였다.
“형님…….”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울제이가 망연자실한 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울제이뿐만 아니라 회담장에 있던 사람들이 주변 곳곳에 흩어져 있다.
김천열과 고려 측 장성들, 울제이의 참모들.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이 사태에 말려든 다른 군인들이 보였다.
그리고 미리안…… 이, 견하의 곁에 있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털썩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은 떴고 숨은 쉬고 있지만, 아무리 부르고 흔들어도 이쪽을 돌아보진 않는다.
-의식이 다른 곳으로 날아간 걸까.
견하는 가장 먼저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 토칸이 자신을 붉은 세계로 불러내 대화를 나눴을 때, 자신은 의식불명 상태였다. 리안이 지금 겪는 현상도 비슷한 것일지 모른다.
“……다들 무기를 빼 드는 게 좋겠어요.”
견하는 다른 모두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고려 측 사람들은 견하의 말에 군소리 없이 따랐지만, 울제이는 반발했다.
“무슨 수작이냐.”
“수작은 당신 형님이 부렸으니까 그게 뭔지는 직접 물어보시고, 일단은 자기 몸을 지킬 준비나 하시죠.”
외교에 따르는 격식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견하는 그렇게 내뱉었다.
만약 이곳에도 다른 곳처럼 ‘파멸인’이 나온다면, 그때 본 환상 또는 꿈에서처럼 대량으로 기어 나온다면 외교나 전략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생존이 순전히 실력과 운에 걸렸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의식을 잃은 리안까지 지켜가며 싸워야 한다.
“칸발리크에서 일어났던 일이 여기서 또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때의 참극을 기억하고 있는 모두가 얼어붙었다. 지금 이곳의 풍경은 그때 그 칸발리크와 너무 닮아서 다들 불안해하고 있는데, 견하의 말이 그 예감에 쐐기를 박아버린 것이다.
어느새 모두가 서로에게 등을 맡기고 둥글게 모여 주변을 경계하는 대형을 갖춘다. 대부분이 군인이기에 자연스레 협조적인 자세로 나온다.
당장 처한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딱 구별해낼 수 있는 인간들이다.
다들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다. 견하를 비롯한 모두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혼란스러워한다.
애초에 파멸인과 이단 문제는 전문가라도 만족할 만한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그냥 그러니까’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혁세주가 나올 듯한 기괴한 풍경, 혹은 환상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은 당연히 없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괴이한 조용함이 지나간다.
“……아무것도 안 나오지 않나.”
누군가 맥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린다. 지평선 저 너머에서든, 음습한 구석에서든 파멸인 비슷한 무언가도 나타나지 않는다.
뭐지.
견하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전히 넋이 나간 리안을 제외하고.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소리가 아니라…… 몸, 뇌, 의식 자체를 진동시키는 어떤 울림이었다.
그것이 그들을 부른다.
일렁이던 하늘이 한층 더 격하게 파도친다.
양막을 뚫고 이 세상에 태어나듯, 피로 번들거리는 하얀 괴수들이 쏟아진다.
울음소리가 새처럼 아름다워 더욱 기괴한 그 광경.
날개를 단 것, 두족류처럼 촉수를 움츠렸다 펼치는 것, 뱀처럼 구불거리는 것, 몸을 감싼 무언가가 궤도를 그리며 주변을 도는 것.
이 모든 것을 갖춘 것 등.
다양한 모습의 괴물이 가득 쏟아져, 검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다닌다.
이제는 견하가 뭐라 하지 않아도 모두가 몸을 긴장시키며, 무기를 고쳐 잡는다.
기묘할 정도로 색이 아름다운 안구들이, 모조리 지상의 미물들을 향했다.
***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높은 곳에서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던 루우가, 가장 먼저 이변에 반응했다.
회담장으로 설치된 막사를 집어삼킨 거대한 검붉은 구체.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부풀어 오른 그것의 크기는 이미 양측 군대에 속한 모두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끝내 그것은 터지듯 솟아올라, 거대한 검붉은 기둥이 되었다.
수천 개의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이 탁 트인 평원을 진동시켰다. 포격에 익숙한 병사들이라 해도 처음 들어봤을 그 소리에 모두의 몸이 굳었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호랑이의 울음소리에는 인간의 다리를 묶는 마력이 있다고.
지금 들려온 소리,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천상의 괴물이 지상에 강림하는 소리도 사람의 오금을 무너뜨렸다.
호랑이가 굳어버린 인간을 손쉽게 사냥하듯, 인간은 혁세주인지 뭔지 하는 저 괴물의 먹이가 되어버리는 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루우는 뒤를 돌아보며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전원 대기한다! 명령이 있기 전까진 일체 재량행위를 금한다!”
그런 말을 남기고 루우는 전용기 룡황과 부하들을 내버려 둔 채 ‘혼자’ 울제이군 지휘소로 달렸다. 지금 상황에서 부하들을 끌고 기갑사까지 탑승한 채 다가가면 울제이군의 오해를 살 우려가 있었다.
당연히 저들은 이게 고려 측의 음모라 생각할 테니까.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저 이상 현상에 대처해야 할 시점에 양측 간 교전이 벌어지면 상황은 도저히 수습할 수 없게 된다.
무장하지도 않고 맨몸으로 달려온 소녀 황제에게, 울제이군은 당황한 시선을 보냈다.
“안내하라! 긴급 사태다!”
그렇게 호통을 치고서야 군인들은 여기저기 연락하면서 루우를 안내할 준비에 들어갔다. 고려 황제가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내하라는데 사령부로 곧장 들여보내면 될지 어떨지.
한창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루우의 속은 타들어 갔다.
지금 저 검붉은 기둥 안에 견하가 있다. 견하도 있고 미리안도 있고…….
자신이 아주 조금 늦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건 아닌가. 그런 불길한 상상이 계속 루우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루우의 체감으로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 간신히 사령부로 안내가 이루어졌다. 물론 실제로는 울제이군과 접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모두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폐하……?”
대치 국면이기는 해도, 타국의 군주이긴 해도 황제는 황제. 일단은 예우를 갖춰 루우를 그렇게 부른다.
루우는 곧장 사령부의 최선임으로 보이는 자를 향해 말했다.
“즉각 고려군 사령부의 김천열 대장에게 연락을 넣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