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1)
나, 마르코 폴로는 소녀에서 여인으로 넘어가는 시절에 있는 누군가를 본다.
누구인지는 안다. 그녀는 그녀가 속한 곳에선 고려국의 재상이다.
웅크리고 앉아 어딘가를 보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이렇게 세상과 세상의 틈새에 나 외의 무언가가 찾아오는 건 무척 드문 일이다.
그녀가 내 말을 들으리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나는 말을 걸듯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결말 중 하나’를 보고 있군.”
그녀는 어깨를 움찔했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대화가 되는 인간은 더욱 드문 손님이다.
“당신은……?”
이렇게 보니 그냥 소녀라고 불러도 좋을 인상이다. 분명 여기에 온 그녀의 나이는 스물셋이지만.
“어떤 세계든 나는 마르코 폴로라 불리는 사람이지.”
미리안의 눈이 살짝 커진다.
“여긴 어디죠? 사후 세계……?”
“사후 세계가 없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나?”
그 말에 미리안은 입술을 다물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렇죠. 영혼은 없으니까, 영혼이 죽어서 머무는 곳 또한 없죠. 그렇다면 당신도 저도 아직 죽지 않은 거군요.”
“내가 죽은 세계는 있지. 여기 있는 나는 ‘그렇게 되지 못한 나’고.”
“제가 죽는 세계도 있을까요?”
“어딘가엔.”
1929년 4월 1일, 태사전용열차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죽은 세계.
허동주와 담판을 지으러 갔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한 세계.
동명역 쿠데타 시도를 막지 못하고 죽은 세계.
동명시 지하에서 파멸인과 싸우다 죽은 세계.
나는 굳이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진 않았다. 그런 가능성 모두를 ‘나’로 받아들이는 건, 아직 인간인 자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그녀는 여기 있지만 아직 인간이다.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여기에 왔다면 ‘미끄러진’ 거지. 그러니 누군가 손을 내밀어줄 때까지는 나가지 못해.”
미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인간인 채로 여기 왔다는 건, 보통 일을 겪지 않고선 불가능하니까.
“곤란한데요. 제가 여기 오기 직전에 적의 공격을 받았거든요.”
“돌아가서 그 사태에 대처해야겠지. 지켜야 할 사람도 있을 테고.”
“네.”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한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네가 온 세계의 시간과는 동떨어져 있다.”
안심해도 좋다는 말은 굳이 입에 담지 않는다.
“지켜보던 것이나 마저 보면서 기다리는 게 좋겠군.”
미리안은 확실히 총명한 사람이었다. 별다른 수가 없다는 걸 알고는 금방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까 ‘결말 중 하나’라고 하셨는데 그건 어떤 의미죠?”
“그 의미는 인간의 감각으론 알기 어려운 것이지.”
나는 미리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아마 ‘다음 순간, 우리는 지켜보던 공간으로 이동했다’라고 생각할 테지.
그렇다. 우리 눈앞엔 미리안이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던 그곳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바로 그곳의 풍경을 보고, 소음을 들었다.
어떤 1936년, 카라코룸 시내의 한복판에서.
***
미리안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여긴…….”
그녀가 아는 도시다. 와본 적 있다.
카라코룸.
몽골 내전에 개입해 화려한 승리를 거두고 얻은 전리품.
그곳에서 잠깐이나마 머물며 이곳저곳을 살펴두었기에 확실히 기억한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 웅장한 건축물은 극장이다. 높이 이어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화려한 서양식 입구에 닿고, 그 안으로는 역시 상류층의 사교장이나 서양식 오페라 공연을 위한 시설이 갖춰진 곳.
하지만,
“……제가 아는 곳과는 조금 다른데요.”
거대한 휘장들이 건물 전면을 뒤덮었다. 그중 일부에는 고려의 국기, 봉황이 자리한 그 국기가 수 놓였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천손민족협회의 세 발 까마귀.”
모양이 좀 다르긴 하지만 틀림없는 세 발 까마귀다. 대체 왜……?
그녀는 저런 걸 허용한 적이 없다.
카라코룸 행정장관 류성일이 멋대로 일을 저지른 걸까? 사실 그도 천손민족협회 회원인데 본색을 드러낸 건가?
카라코룸에서 류성일이 반기를 든 건가?
“여긴 네가 있는 1932년이 아니야.”
마르코 폴로의 말을 미리안이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마침내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한 ‘시간’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알게 된 미리안은 끄덕였다. 그녀는 마르코 폴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곤 묻는다.
“미래인가요? 아니면 다른 ‘세계’인가요?”
“시간, 가능성, 세계…… 이 모두를 같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지. 나에겐 그걸 구분하는 게 별다른 의미가 없으니까.”
마르코 폴로가 시간에 ‘몇 년’이라고 이름을 붙여 부르는 건, 그저 인간 시절의 습관에 불과했다.
“여긴 1936년의 카라코룸이다.”
“4년 뒤의…….”
미리안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아마 고려는 카라코룸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라는 그녀가 바라지 않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천손민족협회가 부활이라도 한 걸까요.”
“계속 보도록 해.”
마르코 폴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미리안은 극장 입구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주변 거리를 살펴보았다.
화려한 번화가. 카라코룸의 중심 도로는 아니지만, 그곳과 가깝다.
확실히 번영하긴 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동명과는 사뭇 이질적이다.
중압감…… 같은 것이 거리를 누르고 있으니까.
“경찰들이 세 발 까마귀 완장을 차고 있어요.”
미리안은 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로 이마 양쪽을 눌렀다. 두통이 이는 모양이다.
“제가 한 짓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걸까요.”
“같은 일이 매번 필연적으로 같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아.”
미리안이 마르코 폴로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그는 턱짓했다.
“봐라.”
입구에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정치인이나 사업가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나온다.
그 무리의 중심에는, 두 사람이 있다.
“……저군요.”
그리고 견하도, 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마르코 폴로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어느새 이곳의 시간은 멈췄고, 두 사람은 이 1936년의 미리안과 주견하 곁에 섰다.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며, 애정과 씁쓸함을 담아 중얼거렸다.
“듬직해졌네. 진급도 했고.”
그녀가 기억하는 주견하는 최근 준장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 주견하는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인상도 기억보다 더 날카로워진 것 같다.
“저 세 발 까마귀는 네가 한 일일까? 내가 그걸 허락해준 걸까?”
“조금 물러서서 보면 더 잘 보이는 것도 있다.”
마르코 폴로의 말에 ‘시야가 조금 달라진다’. 미리안은 좀 더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보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한 무리가 아니에요.”
함께 나오는 것 같지만, 미묘하게 두 사람의 거리는 떨어져 있었다. 연인 사이의 다정함은 남아 있지만 동시에…… 두 사람은 대립하고 있다. 따스함 속에 섞인 부자연스러움이 그 추측이 맞다고 말한다.
미리안과 주견하, 두 사람을 따르는 무리도.
“정치적인 견해가 달라진 걸까요? 견하는 제가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리게 된 걸까요?”
무엇 때문에 대립했을까.
미리안의 머리에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왜 동명이 아니라 여기 있지?
그러고 보니 다이온 연방의 새 수도를 카라코룸에 둔다는 「화림 계획」이 머리를 스친다.
천도를 둘러싸고 대립했을까?
굳이 천도를 카라코룸으로 했다면,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동명과 칸발리크, 두 정부가 공존한다는 리안의 구상과는 달라진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연방이, 루우를 중심으로 한 동군연합이 어떻게 성립해야 하는지를 두고 격하게 대립한 걸까.
다이온 연방이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견하는 자신의 조직을 바탕으로 천손민족협회와 비슷한 집단을 부활시킨 걸까. 그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정권의 한 귀퉁이를 장악한 걸까.
자신은 거기에 반대하다 견하와 거리가 벌어진 걸까.
마르코 폴로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 여기서 보여주려는 건 그것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반복해서 말하지만, 일단은 봐라.”
마르코 폴로는 오른쪽 발끝으로 살짝, 지면을 찼다.
시간이 다시 움직인다.
총성.
동시에 주견하의 머리가 날아갔다.
미리안은 비명도 절규도 내뱉지 않았다. 주저앉거나 손을 들어 입을 막지도 않았다.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지도 않았다.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 모든 건 그녀가 아니라, 1936년의 그녀가 하고 있으니까.
다시, 마르코 폴로가 미리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시점이 더 멀어진다.
처음 마르코 폴로를 만난 공간에서, 미리안은 아까 벌어진 일을 영사기에서 내보내는 영상처럼 바라보았다.
영상. 미리안의 제한된 인지로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결국, 저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가요?”
“글쎄.”
마르코 폴로가 손짓하자 화면은 둘로 늘어났다. 좌우 양쪽, 허공에 뜬 광경은 1936년의 어느 날에 벌어진 똑같은 일을 담고 있다.
아니, 똑같지 않다.
왼쪽의 영상에선 견하의 시체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1936년의 미리안은 짐승의 울음을, 위장의 밑바닥에서 긁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뽑아내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손짓 한 번에 왼쪽 영상은 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리안은 오른쪽의 영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1936년 미리안의 울음은 비명으로 변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 미리안도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견하의 머리가 날아간 자리, 턱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고 목의 찢긴 절단면이 보이는 그 자리에,
하얀 촉수들이 몇 미터씩 뻗어 나와 사방을 휘젓고 있었으니까.
마르코 폴로가 다시 손짓하자 그 영상도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제야 미리안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시간…… 이라고 부르는 게 편할 무언가가 꽤 오래 흘렀다.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나서야 리안은 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영상이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두 세계는 다른 세계죠?”
“그래.”
“혹시 왼쪽의 세계는…… 이단이나 파멸인 같은 게 없는 세계인가요?”
마르코 폴로가 대답하지 않자 미리안은 몸을 일으켰다. 다리는 아직도 떨린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라 주장하는 이 ‘인간이 아닌 존재’와 얼굴을 마주 보고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제 추측이 맞나요?”
“옳다고 할 수 있지.”
“당신이 굳이 여기서 저에게 말을 건 것, 저런 걸 보게 한 것 모두…… 초능력이 없는 세계와 관련이 있군요.”
마르코 폴로의 무표정한 얼굴에 드디어 사람 같은 감정이 드러났다.
무척 고통스럽다는 듯, 그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말한다.
“이제야 네 세계의 부자연스러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구나, 미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