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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16화 (416/541)

풍군작전(21)

기갑사 중에서도 황제전용기로 만들어진 ‘룡황(龍皇)’은 그대로 울제이의 전열을 가로질렀다.

루우는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울제이 측 병사의 시선을 느꼈다.

눈앞에 보병 따위는 일격에 수십 명을 쓸어버릴 수 있는 병기가 지나간다는 공포, 그 병기의 외양을 가까이서 본다는 호기심 같은 감정을 담은 시선이겠지.

물론 병사들은 그런 생각도 했지만, 그들 모두 루우와 황제전용기 룡황을 보며 또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아름답다.

옛 시대의 군주 중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코끼리를 타고 다닌 자도 있다고 했다.

네 마리 코끼리의 어깨 위에 얹힌, 작은 궁궐과 다르지 않은 가마. 화려한 코끼리와 가마의 행렬을 올려다보며 그 시대 민중들은 공포와 경탄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그처럼, 루우가 탄 룡황은 기갑사이면서 그녀의 어가이기도 했다.

루우는 그녀를 뒤따르는 기갑사 부대와 함께 울제이의 본영 뒤편, 야트막한 언덕 위에 포진했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울제이는 고려군 본대와 루우 사이에 끼어 있는 형국이고, 또 울제이와 칸발리크 사이에 루우가 자리 잡은 형국이기도 했다.

전장이었다면 그렇게 눈에 띄는 루우와 그녀의 부대는 집중 포격을 당했겠지만, 여기는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전장이 아니었다’.

이것이 김천열이 주견하와 함께 마련한 ‘기책’이다.

전열을 돌파하고 우회기동. 하지만 교전이 벌어질 가능성은 적다.

우발적인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긴 했지만, 견하도 루우도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진지 구축이 시작된 걸 확인한 루우는, 잠시 기갑사에서 내렸다.

가느다란 목 근처에서 살랑이는 밝은색 머리칼.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

멀리서 바라보는 울제이 군의 병사들에겐 간신히 성별을 구분할 정도의 윤곽만 보인다. 그런데도 루우의 기품과 아름다움, 위엄과 신비로움은 이상할 정도로 잘 전해졌다.

병사들과 함께 참호에서 칼을 휘두르는 황제.

압도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전장에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는 군주.

그런 소녀가 그들의 시야 한쪽에서 금빛으로 반짝이지 않는가.

라디오와 신문, 선전 영화를 통해 여러 번 접해봤더라도, 전설이 눈앞에 있다는 신비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울제이의 입장에서야 그런 루우의 존재가 여간 큰 부담이 아니겠지만.

“여기서 버티고 있으란 말이지, 주견하.”

루우는 자신의 매력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외모 때문에 자만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느끼는지를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다.

잘 보이는 곳에 모습을 드러내라.

가서 아직 신민이 되지 않은 자들에게, 여기 이 신비로운 소녀가 자신들의 군주가 될 수도 있음을, 그 가능성을 제시하라.

“시키는 대로 했어. 이제 뭘 어떻게 할지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멀리서 리안을 따라 울제이와의 회담장으로 가고 있을 견하를 향해, 그에게 직접 말하듯 중얼거렸다.

***

울제이의 예상처럼 회담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한두 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시늉을 해보고, 전쟁도 두렵지 않다며 큰소리도 쳐보았지만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지난번 카라코룸을 놓고 회담했을 때와도 다르다.

젊은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법인가. 아니면 이 미리안이라는 인간이 유달리 특이한 건가.

울제이를 조롱하며 격분시키던 때와는 다르게, 리안은 철저하게 무표정을 유지하며 자신들의 요구사항만을 반복했다.

“카라코룸은 이미 고려군이 점령 중인데 그걸 내어준다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카라코룸은 당연히 고려 것이고, 울제이가 내민 요구사항에 상응하는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낭키아스, 한족 관리 특구, 역외사국 그걸 다 끌어안고 싶으면 칸발리크 정도는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짐은 몽골의 카간이오. 카라코룸도 칸발리크도 없다면 어떻게 그 이름을 자처하겠소? 고려 측에선 어차피 유지하기 어려운 한족 관리 특구를 대가로 지나치게 많은 걸 요구하는 게 아닌지.”

“지적해드릴 게 한둘이 아니군요. 먼저 귀측은 키타이 칸의 자격으로 여기 온 것이지, 몽골 카간의 자격으로 여기 온 게 아닙니다. 개봉 정부가 무엇이라 자처하든 고려의 이 입장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고려는 ‘게레센제의 정식 양위’라는 조건을 내밀며 울제이를 이 자리로 불러낸 게 아니었던가.

“몽골의 카간이 되지 않더라도 ‘한족의 황제’라 자처할 방안도 검토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다이온 내에서 양측의 관계를 재조정해도 상관없습니다만.”

아예 몽골로부터 독립해 한족의 황제가 된다는 방안. 하지만 그것도 시레문 카간이 건재하던 시절에나 생각해볼 법한 것이었다.

고려는 두 도시를 모두 지배하게 되면 울제이가 ‘몽골의 카간’을 자처하든 말든 루우 테무르를 ‘다이온의 카간’으로 세울 것이다.

그런데 고려에 칸발리크와 카라코룸을 모두 내어주고 한족의 황제로 서남쪽에 웅거한다? 동북방에서 모든 실속을 챙긴 고려를 노려보면서?

“……칸발리크는 우리가 장악했소.”

“애써 얻은 칸발리크를 내어주지 않으려면 요구사항을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요컨대 우리는 힘으로 밀어버리는 선택을 고를 수도 있다, 는 협박이다. 그 증거로 미리안은 루우가 울제이의 전열을 흐트러뜨리며 화려하게 우회기동을 펼치게 하지 않았던가.

한족 관리 특구를 관리할 능력 역시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당연히 지금까지처럼 고려가 관리할 수 있다. 역외사국과의 외교도 넘겨줄 생각이 없다.

“낭키아스와 키타이, 칸발리크를 비롯한 몽골 남부의 통합. 대신 우리는 낭키아스 칸 작위를 귀측이 철폐하든, 낭키아스 칸으로부터 실권을 박탈하든 관여하지 않기로 하죠.”

애초에 고려가 제안한 바로부터 거의 나아진 게 없는 조건이다. 그런 조건에는 응할 수 없었다. 바이다르를 낭키아스 칸에서 퇴위시킨다 해도 고려만 침묵할 뿐, 울제이를 향한 세간의 비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의견 불일치는 종종 평행선에 비유되곤 한다.

고려와 울제이 사이, 언제까지고 합류하지 못하는 평행선이 놓인 것만 같다.

울제이는 문득,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것을 타협하러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타협이 되긴 하는 걸까.

그러다 고려가 과연 진지하게 타협할 생각으로 여기 나왔을까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든다.

만약 고려가 절대 타결될 수 없는 협상을, 그저 질질 끌 목적으로 여기 나온 거라면?

시선을 미리안 옆에 앉은 밉살맞은 청년을 향해 던진다.

이질적인 하얀 군복을 입은 남자다. 계급장은 준장임을 나타내지만, 주변의 중장이나 대장도 대하기 어려워하는 게 보인다. 실질적인 권력 순위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바로 고려 태사 미리안의 연인이자, 최측근 참모라고 알려진 주견하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한마디도 의견을 내진 않았지만, 종종 부하들의 귓속말을 듣거나 미리안에게 귓속말을 해주곤 한다. 다른 인사들과 시선을 교환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고갯짓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게 저 청년이 꾸민 일이라면?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면?

주견하에 대해서는 울제이도 아는 바가 있다. 한마디로 교활한 자다.

이 협상 자체가 그의 함정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모든 게 의심스러워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 왜 진즉에 이런 생각은 떠올리지 못한 거지? 미리안이 협상 자리에서 무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그에 대한 대비로 군대를 이끌고 오지 않았나.

아니나 다를까 미리안은 루우 테무르를…….

-……그것 자체가 함정이었나?

루우 테무르가 기갑사 부대를 이끌고 울제이의 전열을 돌파해 후방에 진지를 차렸다. 그 사실은 미리안이 역시 무력을 사용해 울제이를 압박할 의도를 드러냈다…… 고 생각하게끔 했다.

정말 그런 의도였나?

이 협상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는, 고려는 여기서 무얼 얻어낼 생각은 전혀 없고 그저 시간을 끌고 싶을 뿐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연막은 아니었나?

자신은 루우 테무르가 연출한 화려한 돌진 때문에, 그런 발상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고정되어 버린 것 아닌가?

애초에 ‘게레센제가 울제이에게 정식으로 양위’해준다면, 게레센제는 어떻게 설득할 셈이지? 게레센제는 어디 있지? 왜 게레센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

자리를 박차고 협상을 물거품으로 만들 듯 고려를 협박했던 것도, 고려의 의도대로 돌아간 일은 아닐까?

고려는 더는 그런 허세에 넘어가지 않을 테지. 만약 울제이가 정말로 협상을 결렬시키면 고려는 무력행사의 명분으로 삼을…….

아니, 혼란에 빠질 건 없다.

설령 이 자리가 고려의 함정이라고 해도, 고려가 이런 복잡한 함정을 배치한 것 자체가 ‘무력을 사용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다.

차분히, 게레센제는 어디 있는지 추궁하자.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그렇게 결심한 울제이의 시야 한구석에, 갑자기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금껏 그 자리에 사람이 서 있진 않았던 것 같은데……?

“……형님?”

꾀죄죄한 모습의 게레센제 카간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눈빛을 하고, 우두커니 서서 회담장 맞은편 벽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다.

게레센제 카간의 접근을 알리는 보고는 어디에서도 들어오지 않았다.

고려 쪽에서도 전혀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듯, 경악한 얼굴이다.

미리안의 눈썹은 사납게 치켜 올라갔고, 주견하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 한다. 입은 뭔가 명령을 쏟아내려는 건지 크게 벌어졌다. 아니, 고함을 지르는 걸까.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견하와 미리안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이, 게레센제의 머리 위에 있는 것에는 눈길을 주지 못했다.

검붉은 광배.

찢어지듯 커진다.

게레센제의 몸을 덮을 듯 커졌던 그것은 잠시 도사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회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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