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군작전(20)
“그건 예상 밖인데.”
보고받은 견하의 눈이 조금 놀랐다는 듯 커졌다.
놀람은 잠깐이었다. 곧 견하의 입에선 씁쓸한 어조로 상황 분석이 흘러나왔다.
“혁세주를 소환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단도 파멸인도 뭣도 아닌 괴물이 되어버렸다…….”
제물이 없어서인가.
알타이 자유 공화국과 혁세주교, 그 배후에 있던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혁세주를 불러낼 때는 수많은 파멸인, 신종의 씨앗, 교인들을 제물로 삼았다.
그에 대항해 견하는 죄수들을 제물로 삼아 혁세주를 ‘동시 소환’하여 물러나게끔 했다.
반면 게레센제가 제물로 삼기엔, 소수의 측근과 추방된 신원연구회 직원들만으로는 부족했다.
그 인원이라도 전부 파멸인으로 만들 수 있었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간신히 몸만 빠져나가도록 ‘유도된’ 게레센제에게 그럴 여력은 없었을 터.
게레센제 본인만 간신히 괴물로 만든 것인가.
“그나저나 또 흥미로운 양상이군.”
도저히 그런 여유로운 말을 뱉을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게레센제가 변한 괴물의 특징만 놓고 보면 흥미롭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거대한 파멸인처럼 변했다가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아마도 신체 전부나 일부를 다시 파멸인처럼 변화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건 마치,
“따지자면 토칸과 비슷하군.”
토칸과 비슷한 존재. 토칸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자연적인 존재는 분명 아닐 터이다. 아마 투글룩이라면 토칸 같은 존재에 대해 뭔가 아는 바가 있을지도 모르지.
“투글룩 소장을 여기로 모셔오도록. 이미 폐하께서 관련된 일은 내게 일임하셨으니 따로 태사 각하나 다른 이의 허가는 필요치 않다.”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 나서, 견하는 돌이켜 생각해본다.
투글룩을 불러와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리안도 ‘게레센제가 최후의 발악으로 혁세주를 소환할 경우’를 예방할 방법을 찾으라 명했지만…… 오늘까지 찾지 못했다.
그래서 견하가 택한 방법은, 일단 황야에 풀어놓고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는 것.
게레센제의 이성을 완전히 무너뜨려, 그가 황야에서 일을 벌이게끔 한다. 혁세주를 불러온다면 거기서 불러오게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칸발리크나 카라코룸, 동명에서 일이 터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다.
게레센제를 저지할 방안이 마땅치 않기에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차선책을 고른 것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또 다른 포로와 죄수들, 파멸인의 시체를 준비시켜 두었지만, 상황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머리 위의 ‘검붉은 광배’라…….”
묘사만 보자면 마치 혁세주의 검붉은 하늘이 축소되어 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뭔가 하기 전엔 알 수 없지. 계속 거리를 두고 추격하도록.”
사람의 걸음걸이와 같은 속도로 남하하고 있다지만, 언제 태도를 바꿔 맹렬히 돌진해올지 알 수 없다.
방향은 정확히, 울제이와 고려군이 대치 중인 곳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게레센제의 형상을 한 그 괴물이 사람 같은 판단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걸 알아내겠다고 부하들을 바짝 붙였다가 참사를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참사로만 그치지 않고 더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물론, 각하께서 구상하신 대로 여기 딱 맞춰서 와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만.”
이익서가 말하는 ‘각하’는 ‘준장 각하’가 된 견하를 말한다. 견하는 이익서의 말을 들으면서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리안의 호칭을 꼭 ‘합하’로 높여 다른 장성들과 구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늘 시간과의 싸움이었지만, 이번엔 특히 더 피가 마를 거야.”
김천열과 함께 준비한 기책, 리안이 비밀리에 진행하고 견하에게 마무리를 맡긴 기책, 울제이와 리안이 결국 맞닥뜨리는 순간, 이 모든 것이 정밀하게 맞아 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진행된 풍군작전의 모든 국면은 이에 비하면 오히려 느슨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울제이가 강하게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태사 각하께서 다른 수를 부리지 못하게 하려는 거지. 교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계산이야. 그러니 우리는 울제이의 예상을 뛰어넘어 쓴맛을 보여준다.”
그 말에 견하의 방에 있던 그의 측근 모두에게, 긴장감이 흐른다.
침착한 얼굴의 이익서도, 이 작전을 견하와 함께 입안한 한재연도, 그저 묵묵히 명령을 따를 뿐이었던 양수영도, 이제는 아예 능글맞은 웃음을 짓게 된 유지나도.
견하를 따르며 몇 번이고 그래왔듯이, 긴장으로 몸의 감각을 일깨운다.
“울제이의 본대를 집어삼킬 듯이 전진하면서, 교전도 마다하지 않을 듯 돌진한다.”
“설령 교전이 벌어지더라도 ‘전쟁’으로는 발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니 곡예나 다를 바 없네요.”
지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소감을 말한다. 하긴 견하가 내린 명령이 언제는 곡예가 아니었던 적이 있던가.
“실상 우리 감찰국, 그리고 방첩국을 포함한 정치경찰실이 할 일은 많지 않아. 전장의 일은 결국 김천열 대장을 비롯한 군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전투의 뒤편, 전투 너머에서 진행되는 풍군작전의 마무리 공작이다.
“언론의 힘은 끝까지 놓지 않는다. 우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고 승리해야만 한다는 걸 세계가 알게 한다. 게레센제와 울제이 모두 자격 없는 자들이고, 오직 루우 테무르만이 몽골의 카간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린다.”
해야 할 일, 그 일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명확했다. 이제는 그 목표를 재고하기는커녕 약간 시선을 돌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폐하가 두 개의 어좌에 오르시기까지 앞으로 한 걸음.”
견하는 지나 쪽을 보며 씩 웃었다.
“곡예를 펼쳐보자.”
***
“이러면 다른 수작은 부릴 수 없겠지만, 마치 전근대 전장 같군.”
울제이는 재미있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양측 군대가 서로를 노려보는 가운데, 우두머리들이 나와 회담을 벌인다.
총탄이 오가고 포화가 대지를 갈아엎는 근대 이후의 전장에선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지금 같은 광경은 지휘관들이 말에 올라 전장을 직접 보며 지휘하던 시절에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지휘관이 전장에서 거리를 둔 후방에서 작전도와 통신에 의존해 지휘하듯, 평화회담도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진행된다. 제삼국이 중재를 제안하면 당사국의 외교관들이 모여 평화를 협의하는 게 일반적이다.
즉, 이렇게 미리안과 울제이가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이곳이 전장이 될 가능성이 크지 않음을 말해준다.
서로가 이를 인지하고, 분위기만을 극한으로 몰아 원하는 바에 다가서기 위한 의식을 치른 셈이다.
이번 회담에서 울제이는 고려가 제안한 것에 더해 역외사국에 대한 권리, 한족 관리 특구에서 고려군 철수, 낭키아스와 키타이의 몽골 통합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요구사항이 늘어난 만큼 우리는 카라코룸을 내어준다.”
북방의 옛 수도, 조상들이 카간으로 즉위할 때 의식을 치르던 성역을 고려에 넘겨준다는 점이 무척 아쉽긴 하다. 게다가 이번에 카라코룸을 내어준다는 건 도시 하나만 내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한 북방 초원, 몽골 ‘본토’라 불리는 땅 대부분을 내어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난 몽골 내전 이후 카라코룸은 고려의 영토가 된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선심 쓰는 척 내어주면 실질적으로 울제이가 잃는 건 없다.
“칸발리크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곳 역시 쿠빌라이 카간 이래 다이온의 수도가 아니었던가. 명나라의 주원장을 비롯한 한족의 끈질긴 공세에서도 지켜낸 이래, 한족의 주인은 몽골인임을 늘 남쪽을 향해 알려주던 도시.
이대로 다이온을 고려와 양분하자. 자신은 아직 젊다. 남은 생애를 자신이 얻은 영토를 통합하는 일에만 집중하면, 아들 대에는 적어도 고려로부터 수모를 당할 걱정은 없을 터.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쌍안경을 눈에 댄다.
고려군 쪽을 바라보는데, 다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폐하, 고려군 우익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그래, 짐도 방금 보았다.”
무슨 수작일까. 지금 대치하는 고려군에는 자신을 따르지 않기로 한 몽골군 일부도 있다. 그들이 이번 회담에 반발한 것일까.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지만 경계하도록.”
이제는 울제이가 어떻게든 교전을 피하려고 한다. 협상을 앞두고 사소한 일 때문에 어그러뜨릴 순 없다.
협상장에서 고려 측에 붙은 몽골군의 죄를 묻진 않겠다고 먼저 선언해야겠군. 울제이는 그렇게 다짐한다.
어차피 고려와의 갈등은 이 협상 이후로는 웃어넘길 수 있는 사건이 될 테니, 그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차라리 관용을 보여주어, 울제이의 휘하에서도 계속 군인으로 출세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편이 낫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군사력을 보강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울제이는 고려군의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돌출하고 있지 않나?”
순간적으로 저쪽의 몽골군 일파가 상황을 전쟁으로 몰고 가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수작에 넘어가면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교전은 피한다. 좌익을 물리도록.”
고려 측 우익이 돌출함에 따라, 울제이 측 좌익이 충돌을 피하려고 차분히 진지를 버리고 물러났다. 돌발 행동을 한 몽골군 일파는 고려군이 알아서 제압하도록 해두자.
그런데…… 그 돌출부가 진격을 멈추지 않는다.
“더는 물러날 수 없나. 나머지는 자중하면서, 좌익만 교전을 허한다. 범위 내에 들어오면…….”
“폐하! 저건!”
아까보다 한층 다급한 목소리. 울제이는 쌍안경을 들여다보다 혀를 찼다.
“……루우 테무르.”
전진해오는 고려군 우익은 몽골군 일파가 아니었다. 게레센제가 보유한 숫자는 아득히 뛰어넘는, 울제이는 당장 꿈도 못 꾸는 기갑사 무리가 돌진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 선두에 선 기갑사는, 이질적인 황금빛으로 빛난다.
게레센제가 보유했던 어설픈 모양의 기갑사도 아니고, 고려의 실전적이지만 투박한 기갑사도 아닌, 그야말로 ‘위엄’만을 생각해 멋을 잔뜩 부린 기체다.
루우 테무르의 무기인 언월도를, 기갑사의 몸집에 맞게 거대해진 그것을 비껴들고서.
저게 루우 테무르가 탄 기갑사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갑옷을 이루는 황금빛 표면 틈새로, 마치 하얀 깃털 같은 무언가가 일렁인다.
신의 빛이 새어 나오는 것만 같다.
아마 가까이서 보고 있는 아군 좌익은 넋을 잃었을 것이다.
조카가 이단으로서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는 울제이도 잘 안다. 저 기갑사의 기이한 모습은, 거대한 용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반영했기 때문일 터.
“……발상을 제한당했군.”
이곳은 울제이와 미리안의 회담장이다, 저쪽에서 그런 생각을 심어두었기에 울제이는 루우가 여기 올 거라는 발상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걸 보여줄 셈이었나.
“폐하!”
참모의 부름에는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담겼다. 울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교전은 무조건 피한다. 길을 열어주어라.”
이 상황에 고려의 황제가 직접 탑승한 기갑사를 향해 사격할 순 없었다. 애초에 그런다고 루우 테무르가 타격을 입을지조차 의문이었다.
“……한 방 먹었군.”
울제이만 무모할 정도로 대담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고려의 태사 미리안도, 황제 왕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음이 이렇게 눈앞에서 드러났다.
“호락호락 짐이 원하는 바를 내놓진 않겠다는 게로군.”
신하들을 돌아보며 울제이는 웃었다.
그러면서도 새삼, 각오를 다진다.
카라코룸 공략전에서도 그랬지만 미리안은 만만치 않은 상대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