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군작전(19)
김천열은 경례를 올리고 물러났다.
지금까지 김천열과 나눈 대화는 정말로 울제이와 ‘교전이 벌어질 때’를 상정한 이야기다.
교전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즉 평화로운 협상으로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이 엄청난 전투 준비는 ‘호들갑’으로 끝나겠지만…….
“울제이는 지금도 협상을 원한다.”
협상을 원하기에 저렇게 나오는 것이다. 정말로 한판 벌일 생각이었다면 곧바로 맹렬한 기습을 가하는 편이 그나마 승산이 있다.
그러면 고려의 반격을 받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앞으로 입을 큰 피해를 두려워한 고려로부터 양보를 끌어낼 가능성도 있다. 그런 기대를 걸어볼 만한 방책이 기습 공격이다.
상황이 고착된다고 해서 마냥 울제이에게만 좋게 흘러간다고 볼 수 없으니까 더욱 그렇다.
만약 고려가 제의한 대로 울제이의 카간 자리를 인정한다면, 분명 한동안은 울제이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울제이는 그 시간 동안 자기 자리를 굳힐 수도 있고.
하지만 여전히 고려가 끼워 넣은 조건, ‘울제이의 태자를 고려에서 교육받게 하라’는 마음에 걸리겠지.
고려가 여차하면 다시금 울제이와 그 자손의 카간 자리에 도전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조건이기도 하니까.
게레센제는 경쟁에서 탈락했다. 고려는 다른 요소는 따질 필요 없이, 오로지 울제이만 겨냥해 모략을 꾸미고 카간 자리를 향해 진격할 수 있다.
“따라서, 울제이의 저 행동은 우리가 제시한 것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받아내려는 시도로 봐야겠지.”
게다가 리안은 협상장에서 허동주를 참살한 전적이 있다.
물론 그 자리에선 허동주도 리안에게 칼을 들이댔지만, 결과적으로 허동주는 리안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미 죽어버린 허동주가 무슨 수작을 꾸몄든, 리안은 외교 무대에서 ‘상대를 속이고 무력을 행사한 자’라는 오명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대놓고들 말은 안 하지만, 평생 짊어져야 할 짐이지.”
울제이는 리안의 의도와 발상을 읽으려 한다. 리안 역시 울제이에게 같은 시도를 한다. 양쪽 모두 서로의 의도를 뛰어넘는 발상으로 승리를 거머쥐려 한다.
리안이 먼저 울제이가 예상 못 할 후한 제안을 던졌고, 울제이는 의표를 찌르려 전쟁을 준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리안이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 쪽에서 다시 한번 울제이의 의표를 찔러야겠지.”
울제이는 우리가 전쟁을 마냥 피하고 싶어 하리라 예측한다. 틀린 예측은 아니다. 고려 측 인사 중엔 그러길 바라는 사람이 꽤 있으니까. 차무룡이 경제 상황의 악화를 염려하고, 리안 본인도 짐짓 교전은 만에 하나라는 식으로 군부에 언질을 주었다.
울제이가 이런 고려의 분위기를 모를 리 없다.
“따라서 자신만만한 울제이의 얼굴에 진흙을 뿌려준다.”
리안은 자신이 준비해둔 기책을 쓰기로 한다. 기책은 하나가 아니다.
김천열이 모르는 기책, ‘풍군작전’의 마무리를 위해 준비된 기책이 또 하나 있다.
리안은 김천열 이후 들어오기로 예정되어 있던 장성 하나를 불러들였다.
제국정보사령관 구종환 중장이 오랜만에 리안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
황량한 국경지대에 열차가 한 대 버려졌다.
작은 마을의 한 역에, 멍한 얼굴로 사람들이 내렸다. 포로들처럼 화물로 실려 온 사람들이었다.
“……여긴?”
“우릴 감시하던 고려군은 어디로 간 거지?”
그들은 신원경제자원연구회의 직원들이었다. 고려 각지에 파견되어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정보사 요원들에게 체포된 자들이다.
동료들에게 연락을 취하거나 도망칠 틈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사살. 시치미를 뚝 떼며 일단 끌려 온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계속 자유로이 활동하도록 내버려 두기에, 이런 식의 전면적인 체포 작전은 예상하지 못했다.
게레센제 카간이 고려 측에 납치되고 칸발리크가 울제이의 손에 넘어간 후 모두가 혼란에 빠진 탓도 있었다. 지휘계통이 마비되었으니까.
동시다발적인, 흩어진 모든 신원연구회 직원의 체포 작전은 그만큼 성공적이었다. 남김없이 쓸어버렸다, 그런 표현이 딱 어울릴 만큼 철저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고려인들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는 착각 자체가 저들의 계략이었나.
-애초에 고려 국내에 들어갈 때부터, 이런 대대적인 체포가 계획되어 있던 것 아닌가.
원철 직원들이야 아직 울제이와 고려 사이에서 외교적 해법을 찾는 만큼, 전원 무사히 추방되었지만 신원연구회는 아니었다.
그들을 후원하는 게레센제 정권이 몰락했으니, 고려는 거리낌 없이 그들에게 총칼을 들이댔다.
해외 추방에 따르는 최소한의 예의마저 내팽개친 채, 그들을 국경 어딘가에 갖다 버린 것도 고려가 그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알려준다.
주변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기차역뿐만 아니라 주변의 마을도 버려졌는지 아무도 없었다.
“이 주변을 떠돌다 굶어 죽으란 말인가…….”
그들이 고려 앞에 도저히 떳떳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활동을 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잔혹한 처분을 받아야 할 일을 한 적은 없었다. 새삼 그들의 잔혹함에 이가 갈린다.
이제 어쩔 것인가. 가장 가까운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해도 멀어서 도착이나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당장 추위가 문제였다. 빈집의 문짝이라도 뜯어서 땔감으로 쓰지 않으면 그들 모두 얼어 죽을 것이다.
하나둘,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그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도적?”
두려움이, 안 그래도 추위에 소름이 돋은 피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몽골 내전 이후 도적 떼가 이런 국경 지역에 횡행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가진 것도 없고 빈 마을이니 목숨 말고는 빼앗길 것도 없겠지만, 그저 재미로 사람을 사냥하는 이들이라면…….
기마대가 기차역에 도착하고, 버려진 기차를 바라보던 우두머리가 얼굴을 감싼 천을 내렸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누군가 외쳤다.
“폐하!”
기마대 또한 잔뜩 긴장했는지 그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냥했지만, 그 직원은 기마대 앞에 납작 엎드렸다.
“그대는……?”
게레센제가 기억이 날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원경제자원연구회에 소속된 자였나이다. 고려에서 활동 중 추방되어 여기에 버려졌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함께 추방된 자들도 이 마을에 있습니다.”
직원은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어 슬쩍 기마대를 살폈다.
옷 한 벌만 간신히 걸친 채 버려진 자신들보다는 나았지만, 역시 땀과 먼지에 절어 꾀죄죄한 차림새다. 카간의 얼굴이기에 잠깐이나마 멀끔해 보였을 뿐, 게레센제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온 게 분명했다.
“카간께선 고려인들에게 붙잡히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했네.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있어 이렇게 여기까지 오긴 했네만…….”
암담하기는 두 무리 모두 마찬가지였다. 게레센제는 탈출하긴 했어도 도적이나 다를 바 없는 신세였다.
성공하면 왕이 되고 실패하면 도적이 된다는 한족의 옛 격언이 이렇게 딱 들어맞는 처지가 될 줄이야.
다만 신원연구회 직원들은, 무장한 기마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들은 일단 불을 피우고 마을에서 가장 큰 폐건물에 모여 앉아 서로가 아는 바를 이야기했다.
게레센제는 자신이 탈출한 이후의 소식은 잘 알지 못했기에 신원연구회 직원들에게서 꼭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게레센제는 고려와 울제이의 군대가 대치 중인 상황, 고려가 울제이를 향해 ‘정식으로 카간 자리를 이어받을 것’을 권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게레센제 격하’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것도.
고려의 반역자였던 신수덕과 거래한 자, 게레센제.
감히 확정 짓진 못했지만 알타이 자유 공화국과도 손을 잡았던 게 아니냐는 혐의까지 제기되었다.
칸발리크의 비극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도 그럴 것이 게레센제는 ‘신수덕에게 받은 정보’를 기반으로 혁세주를 물리칠 방안을 마련했으니까.
결국 고려와 울제이 모두, 게레센제가 몽골의 카간으로는 부적합하다는 데에 동의한 셈이다.
게레센제 카간을 향한 불신임 선언.
반응은…… 격노였다.
그간 쌓여 온 배신감,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굴욕감, 상황이 이렇게 흘러오기까지 오판을 거듭해온 한심한 자신에 대한 분노.
이성, 냉철한 판단을 유지하던 마지막 보루는 깨져버렸다.
주견하가 배치한 모든 구도와 메시지는, 울제이를 압박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게레센제의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기 위한 것이었다.
카간 자리에서 내쫓고,
고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실컷 이용했으며,
마침내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국경지대를 떠돌게 했다.
능멸.
그런 단어 외에 무슨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게레센제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셈이다. 이대로 칸발리크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가짜 게레센제’ 취급이나 당하다 어디 이름 없는 골목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이 순간, 게레센제의 머릿속에선 아들 바이다르를 비롯한 가족들에 대한 걱정, 미래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겠다는 판단마저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품 안에서, 게레센제는 주먹만 한 무언가를 꺼냈다.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은 남은 신하들의 안위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게레센제는 가장 가까이 있는 신원연구회 직원의 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미안하군. 그대들의 목숨이 필요하다. 오명을 씻을 길이 없다면 나는 기꺼이 폭군의 길을 걷겠다. 이름 없는 도적으로 살다 가느니 그게 낫겠지.”
게레센제는 그것을 자신의 가슴팍에 대고 세게 짓눌렀다.
주변 사람들이 그게 ‘신종의 씨앗’과 같은 종류의 물건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들 ‘폐하’를 외치며 달려들었지만,
신종의 씨앗은 게레센제의 가슴팍을 으깨고 들어가 박혀버렸다.
마치 심장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발작하는 게레센제를 어떤 이는 부축하려 했다.
눈치 빠른 몇몇 인간만 건물 바깥으로 서둘러 달려 나갔을 뿐이다.
건물의 문과 창문들을 뚫고 피 묻은 촉수들이 뿜어져 나온다.
거대한 새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 촉수들이 건물을 바스러뜨렸다.
먼지가 걷히고, 하얀 내장 같은 표면으로 뒤덮인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게레센제의 부하 중에는 저게 무엇인지 아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촉수가 그들을 추격했다. 사람의 걸음은 촉수가 뻗어 나가는 속도보다 느렸다.
그대로 허리를 붙잡힌 자는 촉수에 허리가 으스러져 가자 비명을 지르다, 끝내 끊어져 두 동강이 나고서야 비명을 그쳤다.
어떤 이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위에서 내리친 촉수에 으깨졌다.
그런 식으로 괴물은 사람들을 죽이고, 섭취했다.
표면의 수많은 눈을 껌벅이던 그것은 식사에 만족한 것인지, 아니면 더는 먹을 게 없어져서 식사를 마친 것인지 수축하기 시작했다.
수축을 거듭해, 사람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크기만 줄어든 게 아니다. 그것은 옷차림까지 갖춘 게레센제 카간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했다.
게레센제의 형상을 한 괴물은 슬금슬금 남쪽을 향해 움직였다.
머리 위에는 성인(聖人)의 광배(光背)처럼 검붉은 원을 띄운 채로.
멀리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군인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거리를 유지하며 게레센제를 추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