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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12화 (412/541)

풍군작전(17)

고려의 철도성 장관 임병욱은 카라코룸 행정장관의 관저로 들어서며, 저절로 목이 움츠러드는 느낌을 받았다.

법무장관이었던 류성일과는 어쨌든 동렬에 있는 ‘장관’이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축인 임병욱에게 세계대전의 영웅인 류성일은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는 존재였다.

카라코룸으로 유배를 당했다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이 행정장관 관저는 기물 하나하나가 류성일의 위엄을 반영하는 것 같지 않은가.

류성일의 환대를 받고, 자리에 앉는다.

류성일의 얼굴은 아주 환하다.

여전히 카라코룸에서 행정장관으로 머물러 있지만, 이번 작전은 사실상 그의 유배가 풀렸다는 신호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류성일은 그간 납작 엎드려 견하의 계획에 협력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풍군작전의 한 축을 맡으라는 동명의 명령이 내려오는 일은 없었을 테니.

“지난번에 임 장관이 보내준 ‘특별한 화물’은 잘 받았소. 태사 각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엄중히 보관하고 있지.”

“예, 예. 이번에 제가 찾아온 것도 ‘화물’의 보관 상태와…… 언제쯤 화물에게 자유를 줄지 류 장관님과 논의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화물은 다름 아닌 게레센제 카간이다.

게레센제가 이들의 대화를 직접 듣는다면, 군주는커녕 사람조차 아닌 화물 취급에 진노할 것이다. 그러나 대화가 어찌어찌 흘러 들어가 게레센제의 진노를 산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들에겐 오히려 바라는 바다.

“슬쩍, 요즘 도는 풍문을 흘려주었네.”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길길이 날뛰지만 갇혀 있는 몸이니 어쩌겠는가. 그저 저 화가 잘 ‘숙성’되기만을 바라야지.”

게레센제 역시 울제이나 견하와 거의 같은 계산을 하고 있었기에, 감히 자기 위신을 건드리진 않을 거라 여겼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울제이는 게레센제의 아픈 부분을 찔렀다.

이래서야 칸발리크로 돌아간다 해도 민중의 싸늘한 시선만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닌가.

“그나저나 임 장관의 ‘철도 마술’은 알아줘야겠구만. 울제이는 화물이 용성에 있는 줄로만 알 테니.”

“주견하 국장이 적절한 소문을 흘려준 덕분이지요. 풍군작전에서 ‘용성’이 상징하는 바라든가……. 그런 내용을 흘리지 않았다면 울제이도 한 번쯤 의심은 해봤겠습니다만.”

용성왕 풍군을 고구려 장수왕이 끌고 간 이야기. 그 이야기가 울제이의 뇌리에 남아, 게레센제의 행방을 가리는 기묘한 안개가 되어 주었다.

“덕분에 울제이가 ‘용성까지 진군해 게레센제를 구출할 기세’로 우리 고려와 대치 국면을 만든 것 아니겠습니까.”

“음. 상황이 아주 좋네. 울제이가 카라코룸을 겨냥했다면 곤란할 뻔했거든. 뭐 방어 자체야 어렵지 않았겠지만, 카라코룸과 본국을 잇는 선이 공격을 받으면 임 장관이 자랑하는 신철도의 기능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겠나.”

임병욱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이런 정치외교적 문제는 그의 특기 분야가 아니다. 사실 임병욱은 계속 자기 능력 밖의 일을 하는 듯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처하기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이렇게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절대로 반감을 사지 않는 처세술이기도 하다.

“다만 두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네.”

“예? 어, 어떤 점인지…….”

“첫째는 키타이와 낭키아스에서 건설되던 신철도지. 모든 노선이 완공된 건 아니지만 남북을 잇기엔 이미 충분하지 않던가?”

“그렇긴 합니다.”

대원철도주식회사를 통해 막대한 자본과 인력이 투입된 만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에 임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르게 노선을 개통해나갔다. 전시에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해 전선까지 이어놓는 철도처럼 말이다.

그런 철도들이 정치적 상황 때문에 철도성과 원철의 손에서 벗어나 울제이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직원들의 전면 철수는 이미 귀띔을 받았기에 각오한 일이지만, 임병욱 입장에선 심혈을 기울인 철도망을 넘겨줘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가슴 아팠다.

“그 철도를 이용한다면 울제이가 생각보다 빨리 키타이, 낭키아스의 역량을 총동원할 수 있는 체제가 마련되지는 않을까 염려되는군. 지금껏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해도, 울제이는 비상한 자일세.”

“두 번째 우려는 어떤 것인지요?”

“화하, 형초, 파촉 특구에 주둔 중인 우리 고려군이지. 그쪽 보급은 임 장관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

한족 관리 특구는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영토뿐만 아니라 역외사국의 영토 일부까지 포함한다. 그 지역들에는 아무래도 원철의 공사가 더디다.

고려와 몽골, 고려와 키타이, 고려와 낭키아스, 이렇게 일대일로 처리할 수 있었던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 세 개 국가가 복잡한 협의를 거쳐야 하는 문제니까.

“특구에 주둔 중인 우리 군대의 역할은 중요하지. 울제이의 발을 조금이나마 묶어준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흔들릴 역외사국의 외교를 붙들어 줄 수도 있네.”

즉 다이온에서 일어난 이 사태로 역외사국이 연방을 탈퇴한다든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진다든가 하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틈을 노린 바라트가 협약을 깨고 티베트와 버마 너머까지 혁명을 시도할 가능성을 저지할 수도 있고.

“두 가지 우려되는 점 모두 대처법은 같네. 핵심은 시간일세. 적이 예상보다 빠르다, 시간이 흐를수록 좋지 않다면 우리는 예상 이상으로 빠르게 움직여야 할 뿐.”

그러니, 하면서 류성일은 말을 이었다.

“언제쯤 화물을 밖에 내놓아야 하겠는가?”

류성일의 질문에 임병욱은 잠시 잊고 있던 임무를 다시 떠올렸다. 그렇지. 그 문제를 의논하려고 카라코룸에 온 거였지.

류성일의 질문은 조금 전에 말한 게레센제의 ‘분노가 숙성될 때’가 언제인지 묻는 의미기도 했다.

“곧, 화물의 의사와는 관련 없는 협상이 울제이에게 제안될 겁니다.”

임병욱의 답을 들은 류성일의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용성, 동명, 카라코룸을 오가는 철도가 한층 바빠지겠구만.”

***

-더 이상의 대치 국면은 양측에도, 다이온 전체에도 좋지 않다. 대화를 하자.

그런 식의 메시지가 울제이의 사령부로 전해졌다.

고려가 군대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대화를 택했다는 사실에 울제이는 안도했다.

아니, 안도하려다가 자신을 다잡는다.

“애초에 고려는 다이온 전체를 또 내전에 말려들게 할 수 없다. 다이온을 온전히 자신들의 보물로 삼으려는데 그 보물이 손상되어서야 말이 안 되지.”

그렇다. 이것은 자신이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고려가 내세우는 방안에는 한계가 있고, 자신은 그것을 읽어내어 적절히 대처했다. 움츠러들 이유는 없다.

-어떤 대화인가. 무용한 대화가 아니길 바란다.

도발하듯 던진 답신. 고려 측의 반응은 빨랐다.

-게레센제 카간에게서 울제이 카간이 정식으로 양위를 받는 건 어떤가.

상상 이상의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쿠릴타이에서 게레센제 카간이 정식으로 양위를 선포하고, 쿠릴타이가 이에 동의해 울제이를 카간으로 추대하는 형태가 가장 이상적이었겠지만…….

순서는 좀 흐트러졌어도, 지금이라도 게레센제가 울제이의 카간 자리를 정식으로 인정해준다면 울제이의 자리는 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울제이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줄 방안을, 고려가 제시해왔다.

-대가는?

물론 무상으로 베푸는 자비는 아닐 터.

-지금 이상으로 다이온 연방 내에서 고려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해줄 것. 고려와 몽골이 1년마다 의장국 지위를 교대하고, 울제이의 태자를 고려에 보내 교육받도록 할 것.

참으로 교묘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앞의 내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책봉되지도 않은 ‘울제이의 태자’를 운운한 것은 교활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태자를 고려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한다는 건 인질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울제이의 ‘태자’를 인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형 게레센제 카간이 루우 테무르의 눈치를 보느라 바이다르를 태자로 책봉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파격적인 제안이다.

울제이의 자손이 카간을 잇도록 해주겠다.

루우 테무르는 카간 자리를 포기하겠다.

그 대신, 울제이의 자손들을 우리 고려가 대대손손 교육하여 영향권 아래에 두겠다.

고려에서 고려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 카간의 자리에 오른다면 확실히 고려의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동시에, 카간의 지위는 보장된다. 루우 테무르와 그녀의 자손은 카간이 되지 못한다.

철저히 대가를 요구하면서도 매혹적인 제안.

참모들과 함께 검토를 거듭해보아도 ‘충분히 들어줄 만한 제안이다’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다만,

“고려 태사 미리안은 협상 자리에서 허동주를 참살한 전례가 있습니다.”

선제공격은 허동주가 했지만, 미리안도 그 점에 대비해 충분한 무력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억울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일본공화국을 중재역으로 내세운 협상에만 응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당장 주변국 중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하지만 중재국의 감시 하에선 협상에 응하지 않겠지.”

“예. 이런저런 구실을 붙일 겁니다.”

지금의 사태는 보르지긴 황실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고, 이를 굳이 외국에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지 않나. 이미 상호 폭로전으로 먹칠을 한 마당에 더 수치를 겪을 필요는 없다. 조용히, 무난한 선에서 처리하자.

“하지만 협상 체결의 가능성을 놓치고 싶지도 않군.”

그 점은 참모들 모두가 공감했다. 고려와의 이런 대치 국면은 길어질수록 좋지 않다. 서둘러 반쪽짜리 카간 자리라도 얻어낸 뒤 국내 안정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참모들의 의견이다.

“……강하게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협상이 결렬된다면 승패와 관계없이 고려와 결전을 치를 것이다, 그런 각오를 보인다.

울제이가 이기면 그대로 고려는 다이온에서 나가떨어지고, 고려가 이겨도 울제이군을 섬멸하기까지 막대한 자원을 소모하게 된다.

그런 예상이 된다면 고려도 섣불리 더러운 수단을 쓰진 못할 것이다.

“군과 함께 진격한다. 참호전이 이루어질 정도로 전군을 고려군에 바싹 붙인다.”

일촉즉발을 더더욱 일촉즉발로 몰아가는 것.

그것이 울제이가 취한 수단이었다.

울제이의 군대가 더더욱 동쪽으로 접근, 아예 전선을 형성하며 참호를 파기 시작하자, 고려군 사령부에도 당황을 담은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오직 대원수, 태사 미리안만이 단호한 명령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우리도 참호를 판다. 언제든 돌격할 수 있도록 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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