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군작전(15)
이대로 버티면서 상황을 ‘굳힌다’는 전략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상황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고려가 무력에 의한 울제이 퇴위를 단념하게끔 하는 것.
하지만 칸발리크 내부의 정세가 이래서야 굳히기만으로 승부를 보긴 어렵다.
게다가 군대를 전진 배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루우 테무르의 찬탈을 저지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협상 과정에서 다른 양보도 얻어낼 수 있겠지.”
한족 관리 특구는 단순히 울제이의 서쪽과 남쪽을 위협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울제이가 장악한 영토와 역외사국을 차단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카라코룸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한족 관리 특구만이라도 넘겨받고, 이를 통해 역외사국까지 영향권으로 끌어들인다.”
이렇게 하면 울제이가 차지한 영토는 옛 한족 왕조들과 비슷해진다. 전에도 몇 번 구상했던 것처럼, 몽골 카간이 아니라 한족의 황제로 행세하는 것도 가능하다. 울제이는 그 점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군을 전진시킨다. 이는 다시 논의하지 않겠다. 짐과 짐의 사령부도 동쪽으로 옮겨 직접 대치 국면을 지휘할 것이다.”
***
“울제이는 그럴 사람이죠.”
효윤과 함께 용성의 사령부로 돌아온 견하는, 이번에도 즐거운 얼굴로 상황을 평했다.
다만 풍군작전 이전처럼, 약간의 긴장이 감도는 얼굴이다. 이제는 그도 승부수를 띄워야 할 때라고 보는 듯했다.
준비된 계략들이 착착 맞아떨어져 갔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승부수를 위한 준비 과정.
결전의 순간엔 그렇게 준비된 것들이 한꺼번에 튀어 올라 예상치 못한 경로로 흩어지곤 한다. 그러니 계책에 계책을 더하는 수밖에.
“회수대치 때부터 그랬어요.”
“칸이면서도 후방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전선까지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내지.”
리안의 말투엔 감탄이 담겨 있으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움과 비웃음도 담겼다.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반란을 진압할 때도, 한족 반란을 진압할 때도, 낭키아스 장악에 나설 때도. 이번이 네 번째인가.”
“자신을 과시하지 못하면 안달이 나는 성품이죠.”
물론 이런 과시를 통해 천하는 울제이의 이름을 알게 된다. 견하가 칸발리크의 비극 당시 루우를 내보낸 것도 그런 목적에서다. 정치적 계산이 깔렸다면 꽤 좋은 수단 중 하나다.
“최고사령관이 전선을 시찰하는 건 나쁘다곤 할 수 없는 일이야. 견하 네가 말한 ‘과시적’ 성격도 그래. 사령관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사기 진작에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어. 느슨해진 기강도 조일 수 있지. 하지만 그것도 적절한 시기가 있는 법.”
매번 전선에 직접 나서거나, 전선 가까운 곳에서 지휘하려 든다면 문제가 생긴다.
“눈앞의 전장밖에는 보지 못하게 돼. 시야가 좁아진다는 거야. 울제이는 단순한 군사령관이 아니라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 자다. 최전선뿐만 아니라 후방도 아울러 눈에 담아야 하고, 군사 이외의 것도 배려해야 하지.”
그래야 ‘국가’라는 총체를 움직일 수 있다.
“최전선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후방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지. 군담을 즐기는 호사가들은 그런 전쟁의 가혹함을 숭상하길 마다하지 않지만…… 때론 후방의 요구를 위해 최전선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사실은 죄악이라도 되는 양 난리를 치지.”
그러니 호사가는 호사가에 불과하다는 거다, 라며 리안은 유쾌한 비웃음을 던졌다.
견하가 긴장하기 시작하자, 리안이 오히려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효윤은 두 사람이 많이 닮았지만, 이렇게 대비되는 면모도 있음을 확인했다.
이런 두 사람이 언제까지라도 화목하기를…….
“내실을 다져도 부족할 시간에 군사적 해법을 찾아 나섰다는 건, 울제이가 딱 거기까지라는 이야기야. 승부는 났다고 봐도 좋겠어. 당장 훨씬 어리고 경력이 짧은 주견하 준장에게 이용이나 당한다면 더 볼 것도 없지.”
자신만만하게 단언했지만, 그녀도 계획에는 만전을 기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작 스물하고도 몇 년을 넘긴 나이에 제국을 경영할 수 있을 리 없다.
리안의 시선을 받은 견하는 그 ‘만전’의 세부 항목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네 가지 정보를 흘려 울제이에게 보내는 두 번째 선물로 삼았죠. 이번에는 세 번째 선물을 보낼게요.”
“어떤 선물이지?”
견하는 울제이의 측근들이 본다면 사악한 음모가라고 부를 미소를 지었다. 리안에겐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는 연인의 웃음이지만.
아니, 리안에게도 신뢰하는 모사의 책략이 깃든 웃음이다.
“이 시점에서 게레센제를 꺼내 보죠.”
***
“너도 결국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오랜만에 직접 대면한 조카를 보고, 게레센제가 처음 던진 말이었다.
그런가? 하면서 루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리안이 자신의 카간 즉위를 위해 싸우는 건 고려가 주도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위함이다.
견하가 이번 풍군작전에 열심인 건 리안의 권력 확대를 위함이다. 그 점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루우 자신은 그 커다란 계획에서 순전히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그저 그 역할만으로도 괜찮았다.
몽골을 떠나 고려로 올 때만 해도 그런 생각은 품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괜찮다.
다만 견하의 목표에서 최우선은 아니라는 사실이 어딘가를 아리게 할…… 아니, 이 생각은 하지 말자.
“입헌군주정의 군주들에겐 많든 적든 괴뢰성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숙부의 말을 능청스레 그렇게 받았다.
게레센제도 비아냥을 그치고, 조카가 꺼낼 본론을 기다리기로 했다.
“……고려 황제께선 이 몸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루우는 대답 없이 게레센제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게레센제는 학자의 풍모를 지녔고, 울제이는 전형적인 무골이라 형제가 재미있는 대비를 이룬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게레센제는 시레문의 형제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형제.
이렇게 찬찬히 들여다보니 새삼, 숙부의 얼굴에서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보였다.
3년 전만 해도 루우의 대관식을 축하하러 와 주었던 숙부들과 이제는 카간 자리를 두고 쟁탈전을 벌인다.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 예상도 했고, 숙부들도 괘념치 말라고 했지만…….
피어오르는 적의는 어쩔 수 없다.
안타까운 마음도 어쩔 수 없다.
적의와 안타까움이 뒤섞여 가슴을 기괴하게 비트는 이 감각을 감내해야 한다.
거기까지 감상을 그치고, 루우는 답했다.
“라디오 방송을 해주셨으면 해요.”
“방송을? 무엇 때문에? 무슨 내용으로?”
“그거야 숙부께서 하고 싶으신 대로 하면 되죠. 고려 정부와 저를 실컷 비난하시든, 울제이 숙부의 정통성을 부정하시든.”
“하!”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한 번 치고, 게레센제는 말했다.
“안 하겠다.”
“하셔야 할걸요.”
“그 방송, 생방송은 아니지 않나. 내가 몽골 백성들을 격동시켜 울제이에게 충성할 것을 호소하고, 너희의 납치 행각을 비난해도 그게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해질 일은 없겠지.”
“물론이죠.”
“그러니 나는 요구에 응해줄 수 없다. 어서 내 칙령을 빙자해 카간을 칭하려무나. 그게 너에게도, 고려에도 쉽고 빠른 길이니까.”
쉽고 빠른 길을 택할 거였으면 진즉에 카간 자리에 올랐겠지. 그런 말을 삼키고 루우는 시선을 내리깐 채로 할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하셔야 할 거라고.”
“무슨 수로 하게 만들 셈이냐? 나를 협박할 거리라곤 이제 이 알량한 목숨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되어서 시해를 두려워할 성싶더냐.”
“아까 꼭두각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저는 숙부를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이에요.”
거짓말이다. 이 작전이 끝나면 게레센제는 카간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러나 아주 잠깐, 게레센제를 멈칫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괴뢰로 만들어봤자 네가 곧 카간 자리를 이어받으려 들겠지. 그렇게까지 비참해지고 싶진 않구나.”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떻든 ‘지금 이 상황’보다는 희망이 있잖아요?”
루우의 말은 옳다.
아예 포로로 잡혀 있는 지금보다는, 꼭두각시가 될지라도 어쨌든 칸발리크 황궁으로 돌아가 카간 행세를 하는 게 더 희망적이다.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다시금 세력을 규합해서, 무모할지 몰라도 고려에 도전해볼 수 있다. 그런 희망을 품어볼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당하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바이다르……. 울제이가 설마 바이다르의 목숨에 손을 대진 않겠지만, 그 아이의 입장이 아주 곤란해지겠지.
하지만 견뎌다오, 바이다르.
이대로 있어봤자 비참한 인생을 보내는 건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덜 비참해질 수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게 옳다.
“……울제이를 비판해주면 되는 건가?”
“숙부께서 예상하셨다시피 우리는 녹음된 카간의 옥음을 ‘적절히 편집해서’ 내보낼 거예요. 그러니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시면 마음껏 하셔도 돼요.”
마음껏.
지금 이 순간에는 얼마나 부질없는 말인지.
고려와 울제이 양쪽 모두를 비판해도, 울제이를 향한 비판만 적절히 편집해서 내보낼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서 이 상황을 자신의 뜻대로 뒤틀어보려 해도, 더 머리 좋은 사람들이 게레센제의 말을 철저히 분석하겠지.
여기서는…… 협력해주는 수밖에 없나.
울제이를 몰락시키고 고려군이 칸발리크에 입성하도록.
꼭두각시에 불과한 자신이 마지막 순간까지 고려에 놀아나도록.
놀아나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발버둥을 쳐보도록.
***
“……짐은 번왕의 지위에 있는 아우 울제이를 칸발리크로 부른 적이 없다. 울제이가 자신의 거병이 카간을 구하기 위한 의군이라 칭한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낭키아스에서 일어난 소요 사태도, 짐의 아들인 바이다르 칸을 옹위하기 위한 행위라는 진상을 파악하고는 신정권을 승인하려 했노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식으로 조칙을 내리기 전에 키타이군의 군홧발이 황궁을 범했도다…….”
숙부의 음성을 들으며, 루우는 씁쓸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얼마 못 가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저 내용도 녹음이 끝나는 대로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편집되어 몽골 전역에 퍼져나갈 것이다.
울제이를 직접 ‘반역자’로 규정하진 않는다는 기존 방침은 유지된다.
아직까지는.
그러나 울제이를 역적이라 부르지만 않을 뿐, 게레센제 카간이 직접 그를 비판하는 방송은 울제이에겐 뼈아플 것이다.
지금껏 내세웠던 명분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내용이니까.
게레센제가 목소리를 내도록 기회를 주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을 테니, 꽤 당황하지 않을까.
“폐하.”
자신을 부르는 보좌관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게레센제 카간의 녹음이 끝났습니다. 폐하께서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일으켰다.
게레센제의 울제이 비판에 이어, 고려의 정당함을 호소하는 루우 테무르의 음성을 녹음한다.
자기 자신마저 기만해라.
몽골인들의 지지가 정말로 절박하다는 듯, 루우 테무르는 간곡한 목소리로, 몽골어로 된 연설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