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군작전(14)
이상이 바이다르가 그간 칸발리크에서 보고 들었던 일들이었다.
울제이 카간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았고, 어느 쪽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갈등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가장 강한 무력을 보유한 울제이 카간이 계엄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칸발리크의 분위기를 휘어잡지 않았더라면, 볼로드와 황정회는 벌써 무력 충돌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 혼란한 정국 속,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칸의 자리를 박탈당하진 않았다. 하지만 숙부는 자신이 응천으로 돌아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낭키아스 칸이라는 이름만을 지키게 했을 뿐, 그곳은 이미 숙부의 관료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사실상 낭키아스는 키타이와 통합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뭘 어디서부터 잘못한 걸까.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소년은 방에 홀로 웅크린 채 울었다.
물론 바이다르의 행동도 이러한 사태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긴 했다. 그러나 그의 책임을 묻기엔, 그의 사촌 누나와 그 신하가 너무 교활했다.
울음을 그치고 나선, 다소 맑아진 머리로 차분히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숙부는 개봉에 있던 가족들을 불러들였다. 바이다르보다도 훨씬 어린 사촌 동생들과 얼굴은 마주쳤지만, 살가운 인사를 나누진 못했다.
그 아이들은 바이다르를 낯설어했고, 바이다르는 그 아이들을 보며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먼저 걱정했으니까.
아마 상황이 안정되는 대로, 울제이 숙부는 태자를 책봉하지 않을까. 아버지 게레센제가 고려나 볼로드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 과정에서…… 혹여나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 공포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곧 그렇게 쉽게 죽이진 않으리라는 전망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인질이야.
고려가 혹여나 게레센제 카간을 이용해서 엉뚱한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혹은 게레센제 카간이 혼자 폭주해서 곤란한 상황을 만들게 하지 못하도록…… 변수를 통제하는 인질.
-그리고 숙부의 정의를 상징하기도 하지.
울제이가 낭키아스를 장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그가 확보한 명분이었다. 조카를 구한다는 명분.
실제로 울제이는 응천에서 바이다르를 구해냈고, 구해낸 조카이기에 ‘낭키아스 칸’이라는 작위도 유지시켜 준 것이다.
칸 작위를 박탈하거나, 자신의 신변에 뭔가 이상이 생기면 울제이의 명분은 퇴색된다.
그러니 바이다르는 자신이 고려로 탈출을 시도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안전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대로 숙부가 카간 자리를 굳힌다면 내 자유는 없어지겠지.
당장은 자유롭다. 낭키아스 칸이라는 이름으로 울제이 카간과 막료들의 회의에 얼굴을 내비칠 수도 있다. 뭐 그건…… 그런 모습을 보여주길 숙부가 바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숙부는 조카인 낭키아스 칸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사실로 자신이 게레센제 카간의 빈자리를 대신했음을 정당화하니까.
하지만 이 난리 통이 끝나고 나면, 평생을 궁궐의 한 방에 갇혀 산책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신세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열네 살 소년에겐 그렇게 아득한 미지의 세월이 펼쳐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포였다. 바이다르가 마음을 굳게 먹기엔 지난 시간은 너무도 가혹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구할 여력이나 있을까.
사촌 누나 루우 테무르는 자신을 구해줄까.
고려 태사 미리안은 약속을 지킬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은 그저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자신만 생각하고, 다른 이들에게 바이다르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것 아닐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어두운 상상만이 소년이 머무는 방의 구석부터 슬금슬금 뻗어왔다.
바이다르는 계속 몸을 웅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볼로드는 우리가 울제이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효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미끼를 저렇게 ‘선물’이라고 교묘하게 돌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어차피 언니는 볼로드를 실각시킬 생각이긴 했지.”
“동군연합이 성립되고, 다이온 체제가 완성되고 나서 볼로드를 실각시키려면 손이 많이 가.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우리가 직접 손을 대지 않더라도 처리하는 게 좋지 않겠어?”
“볼로드가 황정회와의 싸움에서 몰락해도 좋고, 결국 황정회를 물리친다 해도,”
“울제이 정권을 만신창이로 만들어줄 테니 좋지.”
“그러고 나면 울제이를 몰락시킬 때 함께 처리해버릴 수도 있고?”
견하는 양 손바닥을 효윤에게 펼쳐 보였다. 능청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너무 다 말해버리면 멋이 없지 않겠어?”
“……멋 타령할 일은 아니잖아.”
리안이 용성의 사령부에서 느낀 불안을, 미묘하게나마 효윤도 느끼고 있었다.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얼핏 보면 자만심이 한껏 부풀어 오른 것 같다. 계획이 예상대로 먹혀들어 가면서 견하의 얼굴은 어쩐지 더욱 활기로 빛난다.
혹여나 방심하진 않을까. 아니, 이 남자가 방심 같은 걸 할 리가 없다. 이 남자는 방심을 한다 해도 ‘자신이 방심할 가능성까지 대비’해둘 남자다.
그저 전에 없이 유쾌한 얼굴인 게,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계속 자극했다.
“볼로드가 첫 번째 선물이면, 두 번째 선물은 뭔데?”
두 번째 ‘미끼’라고 하려다 효윤은 견하의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뭐, 별 건 아냐. 고려 쪽에서는 아는 걸 그쪽에 슬쩍 흘리는 거지.”
“정보를 흘리겠다고?”
흘리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어떤 정보’를 흘리느냐는 것이다. 그 정보의 성격에 따라 적이 ‘믿지 않아서’ 효과가 반감되기도 하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적에게 들어가선 안 되는 정보가 ‘유추’되기도 한다.
“유추하게끔 해야지.”
그렇게 해서 칸발리크를 향해 몇 가지 정보가 흘러 들어갔다. 공작원을 거친 정보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것도 없이 선전전을 통해 온 사방에 알려진 정보도 있었다.
고려 태사 미리안을 비롯한 군부 주요 인사들이 용성까지 와서 통합사령부를 차렸다는 정보가 그 첫 번째.
이는 누가 작전을 총지휘하고 있는지를 밝히면서, 고려의 최상층부에서 이 사건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명확히 알려주었다.
고려군이 몽골 국경 안으로 들어왔으며, 여기서 황성방위군 사령관 김천열의 주도로 ‘울제이에게 충성하지 않는’ 몽골군을 규합하고 있다는 정보가 그 두 번째.
이는 울제이의 칸발리크 정부에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다.
세 번째로는 칸발리크 궁궐에서 납치된 게레센제 카간이 국경지대의 고려군 부대를 거쳐 용성으로 보내졌다는 정보가 알려졌다.
이는 게레센제 카간이 이제 울제이의 손이 닿기 어려운 위치에 있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네 번째 정보의 의미를 해석하는 단서가 되었다.
네 번째 정보는 고려가 진행 중인 작전의 이름, ‘풍군작전’과 그 의미였다.
***
“……고려는 고구려 장수왕이 북연의 풍홍을 끌어갔듯이, 형님도 그렇게 끌고 간 것인가.”
“하필이면 용성에 머무시게 한 것도, 그때의 일을 반복함을 국내에 선전하기 위함이 아닌가 합니다.”
각료의 지적을 들은 울제이의 입가가 처졌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자처하는 만큼, 장수왕과 풍홍의 일화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들의 역사 교과서에서도 반드시 가르칠 정도로.
이번에도 타국의 군주를 자신들의 수중에 넣고, 동아시아의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선전하는 것만으로도 미리안 정권엔 큰 이익이다.
당장 실질적인 영토 확장, 경제적 이익을 거두진 못하더라도, 그들이 치를 선거에서 미리안과 제국입헌당이 승리할 가능성을 높여준다.
“한편으로 짐은 이런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군.”
무엇입니까, 묻는 듯한 태도로 각료들은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대충은 무엇인지 짐작은 하고 있다.
“형님 게레센제 카간으로부터 루우 테무르가 카간위를 물려받는다고 선포하면, 여기 칸발리크에선 틀림없이 동요하는 자가 나올 것이다.”
황정회와 볼로드 파벌의 갈등, 그런 갈등을 두고 의견을 달리한 울제이의 참모들. 여기에 낭키아스의 ‘울제이파’도 보답으로 한 자리씩 나눠주어 칸발리크 정계에 참여했기에, 갈등은 날이 갈수록 복잡해져만 갈 뿐이다.
불가피하게 삼킬 수밖에 없었던 칸발리크, 카간 자리였다. 함정이 놓여 있는 줄 알면서도 정면으로 돌파할 생각으로 삼켰건만…… 이렇게 소화하기 어려울 줄이야.
-정점에 선 자는 모두를 포용하든지, 모두와 적이 되든지 선택해야 한다.
누가 해주었는지, 혹은 혼자서 떠올린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 울제이의 머릿속을 맴돈다.
울제이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상황은 울제이에게 우유부단할 것을 강요한다.
돌파구는 없는가.
“……불안 요소를 안고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나.”
울제이는 그렇게 혼잣말을 흘렸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해결되지 않는 칸발리크 정계의 문제를 붙들고 있어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결의 실마리는 다소 억지스러움을 감수하는 데 있을 것이다.
군사적 성과, 그에 따른 위엄으로 갈등 국면을 칼로 내리치듯 끊어낸다.
카간에 대한 충성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는 무리를 카간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건 바로 위엄이다. 그러고도 카간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면 쳐낼 힘도 위엄에서 나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치자들이 군사적 업적 세우기에 의존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군사적 업적을 세운 통치자를 감히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 권력은 실질적인 힘뿐만 아니라 그런 분위기의 작용이기도 하다.
“짐도 국경으로 나아간다.”
반대하는 목소리가 순간 높아진다.
“폐하께서 등극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국토가 안정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를 국경에 전진 배치하여 고려와 대치하시면, 고려는 이를 도발로 간주할 위험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승부의 향방과 관계없이 민심이 크게 흔들릴 겁니다.”
“고려는 협상의 문을 열어두었는데, 폐하께선 카간 즉위로 답하셨습니다. 그러고서도 고려는 협상의 문을 닫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군사를 전진배치하는 것으로 답하신다면 이는 고려에 명분을 주는 격이 됩니다.”
그대들은 고려의 눈치만 보는가! 그렇게 터져 나오려는 노성을 울제이는 억눌렀다. 참모들도 자신들이 하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이미 알고 하는 말이다.
울제이의 세력은 칸발리크 일대를 장악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했다. 이와 달리 고려는 칸발리크 동쪽부터 카라코룸에 이르기까지 긴 전선을 유지할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한 국가다.
각 한족 관리 특구에 배치된 고려의 병력도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다.
“그러나 이대로 상황을 흘러가게만 두어선 안 된다. 저들이 형님을 겁박해 루우 테무르를 거짓 카간으로 올리지 못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압박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한다.
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