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군작전(11)
이러면 지금 칸발리크에서 저항하는 게레센제 측근들도 자연스레 와해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카간은 무력하게 고려인들 손에 들어갔고, 울제이가 칸발리크에서 ‘유일한 카간’이 되었으니까.
물론 그중에는 루우 테무르 쪽에 승산이 있다고 내다보고 고려에 투항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이렇게 칸발리크에서 발목만 잡는 것보단 그게 낫다. 그런 선택을 하면 고려로 망명해야 할 테니.
만세가 귀를 때리지만, 그 소리는 울제이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꿈꾸던 카간 자리와는 달랐으니까.
어둡고 긴 동굴 같은 미래의 예감이, 울제이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
울제이의 카간 선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용성의 통합사령부부터 동명의 정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울제이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토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황제는 침묵했고, 태사는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이온마저 또 다른 내전으로 몰고 갈 셈인가? 그럴 순 없다. 게다가 바이다르 칸이 칸발리크에 있다. 울제이를 도발하면 그의 안전이 위험하다. 아직 협상의 여지는 있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 뒤에 울제이와 대결해도 늦지 않을 터.”
권위와 권력의 정점에 있는 두 사람이 그렇게 고집을 부린 탓에 논란은 미적지근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태사가 너무 소극적인 정책을 펼치는 건 아닌가’라는 볼멘소리는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태사가 저렇게 울제이와의 대결을 거부하는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주견하의 얼굴을 바라봤다.
“언니야 네 계획을 믿으니까 저렇게 버텨주는 거지만, 견하 네 입으로 급하다고 했잖아? 시간을 끌수록 여론이 나빠질 거라며. 지금도 그렇게 되어 가는 중이고.”
“누나한텐 미안하지만 지금은 계속 버텨달라고 해야지.”
효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뭘 기다리는 거야? 울제이는 이미 카간을 칭하기 시작했는데.”
“불완전한 쿠릴타이, 불완전한 카간 즉위, 불완전한 체제. 이 세 요소가 빚어낼 부작용의 비명을 기다리지.”
“시인도 아니고 은유가 너무 심한 거 아냐?”
“은유가 아니야. 말 그대로의 이야기야.”
몽골 내전 이후 게레센제가 소집한 쿠릴타이는, 말이야 많았지만 어쨌든 당시엔 몽골의 모든 정파를 불러 모아 연 것이었다. 정당성 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울제이의 쿠릴타이는 딱 자신의 편이라고 확정된 인간들을 모아 꾸린 것이다. 여기서 거취를 분명히 하지 않은 자,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자, 복종이 아니라 동맹을 바라는 자는 배제되었다.
“게레센제가 결국 칸발리크의 모든 정파를 끌어안는 데 실패했으니 자기는 확실히 ‘내 편’만 끌어안고 가겠다…… 뭐 그렇게 생각한 것 같은데, 언제 내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니만큼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냐. 하지만,”
견하의 얼굴에 비웃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효윤은 전에도 견하의 날카로운 표정을 몇 번 봤지만, 지금 이 표정은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비웃는 게 아니라 ‘비웃음 비슷한 것’이다.
저것의 정체가 뭘까…… 그런 의문은 뒤이은 견하의 말로 끊겼다.
“너무 쿠빌라이 카간의 사례에만 매달리고 있어.”
“쿠빌라이 카간이 그런 식으로 내전에서 승리해 다이온의 주인이 되었으니. 자신도 그를 모델 삼아 승리하겠다는 생각일까?”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역사를 참고하는 사람들이 종종 저지르는 실수는,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밟기만 해도 성공을 보장받는다고 착각하는 거야.”
참고자료는 참고자료일 뿐. 정답지가 아니다.
“어떤 이는 역사를 기억해야 미래가 있다고 하지만, 때로는 ‘역사를 망각할 줄도 알아야’ 해. 특히 역사를 자기 입장을 적당히 편하게 설명하는 데 쓰고 있다면 말이야.”
그런 식의 역사는 사실도 교훈도 아닌 오답이 된다.
이 길의 끝에 성공이 있으리라는 안도감을 주기 위해, 그 안도감에 부합하는 역사만을 참조하게 되니까.
자기도 모르게 ‘부합하지 않는 역사’는 편집해서 의식 너머로 흘려버린 것도 깨닫지 못한 채.
“고려의 협력, 전국적으로 퍼진 범좌익과의 타협, 이런 과정을 통해 즉위에 정당성을 갖춘 게레센제와는 사정이 아예 달라. 게다가 고려는 그때처럼 몽골군 침략을 걱정해야 할 나라가 아니야.”
“고려 황제 왕서라는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로서 카간위에 오를 수 있으니까.”
“그래. 고려에는 이제 몽골 황위 계승마저도 결정할 힘이 있지.”
“카간이라 칭한다 해서 저절로 그 이름에 힘이 깃드는 건 아니란 말이구나.”
“정당성에 한 번 손상을 입었고, 그렇다고 해서 고려를 압도할 실력을 갖춘 것도 아니니 이중으로 손상을 입은 카간 자리지.”
“그게 ‘불완전한 카간 즉위’라는 거지? 그럼 ‘불완전한 체제’라는 요소는?”
“마찬가지야. 울제이는 자기만의 쿠릴타이를 소집하려고 많은 사람을 배제했지만, 때문에 일단 쿠릴타이에 끌어들인 사람들은 어떻게든 안고 가야 해. 그리고 그들은 울제이를 다음 카간으로 택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지.”
“공통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적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지.”
“지나친 타협은 화를 부르는 법이니까.”
황정회는 볼로드를 물러나게 했다. 볼로드는 이 굴욕과 원한을 그냥 넘길 사람이 아니다.
황정회에서도 당할 순 없으니 다시금 볼로드를 공격할 텐데, 울제이는 볼로드와 황정회 양쪽 모두 놓칠 순 없으니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될 것이다.
“둘 중 하나를 버린다는 과감한 조치도 지금 시점엔 어렵지. 누구든 울제이가 자신을 버린다면 마지막으로…… 고려에 투항한다는 방법을 택할 테니까.”
견하는 울제이에게 독으로 만든 과자를 건넸다. 칸발리크와 카간이라는 달콤한 꿀을 바른 과자였다.
울제이를 궁지로 몰아넣고, 황정회와 볼로드도 궁지로 몰아넣어 결국 고려를 향해 납작 엎드리게 한다.
“칸발리크만 해도 이렇게 복잡한데 울제이는 응천까지 떠안았지.”
응천의 키타이파, 혹은 울제이파라 불리는 자들은 낭키아스 정국의 승자가 되긴 했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혼란에 빠졌다.
이전처럼 키타이, 몽골 본토와는 분리된 정치체를 유지할 것인가? 하지만 토호파를 몰락시킨 지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은가.
무엇보다도 키타이만의 힘이 아니라 울제이가 장악한 모든 영토의 힘을 끌어내려면 통합된 정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칸발리크, 개봉, 응천의 정부를 모두 하나로 묶어 새로운 국가 체제를 출범할 것인가? 울제이가 고려와 맞서기로 했다면 그보다 나은 변혁은 없다. 실제로 이뤄진다면 견하도 전략을 크게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바이다르 칸의 존재가 그걸 가로막지.”
“바이다르 칸은 인질이 아니라 울제이가 보호하기로 한 대상이니까.”
“맞아. 뭐 실제 행정은 통합하고 바이다르는 ‘이름뿐인 낭키아스 칸’으로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지금 그랬다간 울제이에게 반발할 사람이 많을걸. 드디어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냈다고 말이야.”
살짝 아래로 향했던 효윤의 시선이 다시 위로 올라온다. 이해의 빛을 담은 것도 같고, 견하를 도발하는 것도 같은 시선이다.
“그래서 지금껏 게레센제를 공개하지 않았구나.”
“게레센제를 지금 내보이면 울제이는 결단을 내리고 말아.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바이다르의 권리를 빼앗고 ‘인질’로 만들겠지.”
“울제이를 반역자로 단정하지 않은 것도 그런 맥락이고?”
“울제이가 카간이 되기 전에 반역자라 매도하면 울제이는 우리와 타협하려 들었을 거야. 사냥감은 땅굴로 사라지고 우리는 놓치는 거지. 하지만 우리가 울제이를 반역자로 규정하는 그 ‘한 계단’을 마저 밟지 않는다면?”
울제이는 고려 쪽에서 타협을 바란다고 착각할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보라는 듯이 카간으로 즉위해버린다.
“견하 네가 처음에 기다렸던 건 울제이의 카간 참칭이었지?”
“울제이는 이제 자기 굴로 도망 못 가.”
게레센제를 루우의 즉위 전 ‘징검다리’로 삼은 건 그저 루우의 감정만을 배려해서가 아니었다.
시레문 사후, 루우의 즉위를 고집했다면 게레센제는 낭키아스에서 독립을 선언했을 것이다. 아마 울제이도 그랬을 테고.
독립으로 끝난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두 사람 모두 황위를 향한 야심을 버리지 않고 끝없이 루우에게 도전했겠지.
그러나 게레센제도, 울제이도 한 번씩 카간이 되게 한다면?
이제 ‘도전자’는 루우만 남는다. 게레센제와 울제이는 도전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아직도 울제이를 역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건 스스로의 모순으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는 거고.”
“그냥 기다리기만 해선 울제이가 기막힌 해결법을 찾을지도 모르니까, 이쯤에서 뭔갈 던져주긴 해야지.”
뭘 던져줄 건가. 효윤은 그건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게레센제의 쓸모가 다하면 나한테 넘겨줄 수 있어?”
“게레센제는 고태용을 죽이지 않았어.”
의외의 답변에 효윤의 머리가 갸우뚱 기울었다. 효윤의 부탁을 받자마자 단번에 이유를 추론해 내놓은 대답. 혹은 효윤이 이런 부탁을 해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게레센제가 아니라 울제이가 죽였다고 보고 있어. 아마 게레센제를 곤란하게 만들 심산이었겠지. 나는 판을 키운 거고.”
그리고 울제이는 고태용의 가방 속에 있던 걸, 게레센제의 치부에 관한 자료를 모조리 가져갔다.
울제이가 카간을 참칭하길, 궁지에 몰리길 기다리는 것은 결국 울제이가 그 자료를 꺼내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만 바꿔서 다시 부탁할게. 울제이의 쓸모가 다하면 넘겨줄 수 있어?”
침묵이 흘렀다. 거절당할 걸 알고 던진 부탁. 그런 부탁엔 거절밖에 돌려줄 수 없지만 견하는 조금 망설였다.
“허동주가 태평천국 황제를 죽이게 해달라고 선대 태사 각하의 허락을 구했단 이야기, 들어 봤어?”
“알고 있지.”
“내가 해줄 대답도 선대 각하께서 하셨던 것과 다르진 않을 거야.”
“드러내놓고 도륙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병사나 사고사로 처리하는 것도 안 되는 거야?”
“나도 기분 같아선 울제이의 피를 흐르게 하고는 싶지만 안 돼. 미심쩍은 죽음 뒤에는 당연히 의심이 따라. 루우 테무르가 ‘보르지긴의 피’를 흘리게 할 순 없어.”
“의외의 대답이네.”
“의외의 부탁을 들은 나는 어떻겠어.”
치켜 올라간 효윤의 눈이 깜빡임도 없이 견하를 바라본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견하의 눈도 마찬가지다. 다만 견하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다.
절대로 우호적이지 않은 미소가.
처음 만났던 날을 빼곤 이제껏 없던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
결국 효윤이 먼저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뭐 나도 복수심에 불탄다기보단 화풀이를 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울제이 본인은 자결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감시받으면서 평생 유폐될 거야. 그건 보장할게.”
효윤은 혀를 한 번 차고,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근데 이제 울제이한테 던져준다는 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