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군작전(10)
화는 나지만 예상은 했던 일이다. 이쪽이 선전전을 벌인다면 저쪽도 당연히 선전전으로 맞설 수밖에.
다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누구 말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유치한 논쟁이 되어버린다.
울제이는 카간이 납치되었다고 주장하고, 고려는 카간을 보호했다 주장한다.
울제이가 북쪽까지 전선을 넓힐 여력이 있었다면 몽골 전역을 자신의 목소리로 채울 수 있었겠지만, 당장은 칸발리크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고려는 국내외로 신나게 자기네가 정당함을 호소하고 있겠지.
“빠르다. 계속 우리를 앞서나간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안세규를 통해 고려 정국을 흔들어보려던 게 지나친 욕심이었나.”
안세규가 고려와 몽골의 동군연합을 방해해주었다면, 그래서 고려가 이번 일에 개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고려는 마치 울제이의 행보를 예측했다는 듯이 어떤 때는 협력하고, 또 어떤 때는 방해하며 기민하게 반응했다.
원철이 울제이를 도울 때는 안세규의 입김이 작용한 것은 아닌가, 희미하게 그런 희망도 품어보았다. 일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아주 잘 돌아간다고 여기며.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모든 흐름도 고려의 음모가 아니었나 하는 후회와 의심이 든다.
자신을 영광의 길처럼 꾸며진 함정으로 이끄는 음모.
안세규에게 접근했던 게 어딘가에서 새어 나갔거나, 안세규가 직접 울제이의 계획을 고려 정부에 누설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괜한 짓이었다.
낭패감이 발밑을 무너뜨려, 끝없이 추락하는 듯한 기분이 몸을 감싼다.
하지만 결국은 기분일 뿐이다. 추락하는 것도 자신이고, 그 추락을 거스르고 날아오르는 것도 자신이다.
“……저쪽도 틈은 있다.”
분노 속에서도, 울제이는 판단의 냉철함을 잃지 않는다.
“고려 측 발표에 나를 ‘반역자’로 규정한 부분이 있나?”
“……? 아, 아닙니다. 그런 부분은 없습니다.”
“그럼 됐다.”
미적지근하군. 미리안.
“나를 역적이라 부르지 않은 건 사태를 지금보다 더 심각하게 만들고 싶진 않다는 뜻이겠지. ‘다이온 내전’은 피하고 싶은 거다. 그러니 내 ‘권력욕’에 대한 비판으로 우회했고.”
“칸이시여, 그렇다면…… 저쪽은 타협의 여지를 두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아마 지난 내전 때보다 더 큰 걸 내어주고, 그쯤에서 사태를 일단락 지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전쟁장관 겸 내무장관보다 더 큰 것. 아마 타이시 자리에 키타이와 낭키아스를 통합한 영지를 모조리 넘기는 것. 다이온 내 최대 인구를 보유한 제후로 삼는 선에서 타협을 보려 하지 않을까.
울제이가 먼저 그런 제안을 한다 해도 저들은 수용할 것이다. 어쨌든 칸발리크에서 개봉과 응천에 이르기까지, 당장 승자처럼 보이는 사람은 울제이다.
내전을 각오한 게 아니고서야 칸발리크를 강제로 빼앗으려 덤비진 않을 것이다. 고려의 국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태평천국급의 영토를 확보한 울제이와 전면전쟁을 벌일 순 없다.
참모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곧장 고려에 연락을 넣도록 하겠…….”
“아니, 그러지 않겠다.”
울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참모들은 다시금 당혹스러운 얼굴이 된다. 칸은 대체…… 여기서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하지 않고 뭘 하시겠다는 거지?
“저들은 그걸 노린다. 카간은 저들의 수중에 있다. 즉, 내가 더 큰 세력을 얻는 데 만족해 칸발리크에서 물러나면…… 고려는 곧장 양위를 준비하겠지.”
그렇게 되면 카간까지 가는 길은 더 멀어진다.
루우 테무르의 카간 즉위를 자신이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몸짓을 한 셈이니까.
아무리 자신의 세력이 커진다 해도, 그저 세력 큰 제후로 남은 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계속 저들이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왔다. 그러니 여기선 우리가 저들을 앞질러보자. 저들이 감히 저지르지 못하리라 여긴 일을 저질러, 주도권을 넘겨받는 것이다.”
참모들이 침을 삼킨다.
“쿠릴타이를 열겠다.”
***
견하는 몽골과 고려 국경에 서 있었다.
서쪽으로 이어진 철도는 저 멀리서 칸발리크에 닿는다. 칸발리크엔 지금 울제이가 있다. 울제이와 견하 사이, 철도 위엔 효윤과 ‘귀한 물건’을 실은 기차가 달린다.
몽골 측 국경수비대를 내쫓으면서까지 국경에 부대를 주둔시킨 건, 순전히 그 ‘귀한 물건’을 받기 위해서다.
그렇다. 지금 견하에게 게레센제는 화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루우에게 올릴 옥새나 면류관 같은 것이다.
혹시 모를 폭격에 대비해, 고려 공군이 하늘을 바쁘게 오간다. 들어오는 보고는 모두 이상 없음을 알린다. 일의 진행은 순조롭다.
“곧 도착합니다, 각하.”
준장이라지만, 어쨌든 장군이 되니 나도 각하 소리를 듣는군.
리안의 백부 미승휴는 ‘원수 각하’라 불리던 습관 그대로, 대원수이자 태사가 되고 나서도 자신을 그저 ‘각하’로 부르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장군들도 그렇게 불리는데, 리안은 좀 차별을 둬야 하지 않을까.
중세, 근세에 쓰던 ‘합하’라는 호칭을 재발굴해서 리안에게 올리는 것도 좋겠지.
그런 생각을 굴리는 동안 열차는 마침내 국경 안으로 들어왔다.
긴장과 피로로 얼굴이 굳은 채, 효윤은 내리자마자 견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별 달았다고 사람 막 부려 먹기야?”
“별이라고 해도 중장 각하에 비할 바는 아니지. 임무 중 곤란한 사항은 없으셨는지?”
“없었어. 카간은 무사해.”
견하는 효윤의 말을 되새김질하듯이 끄덕였다. 두 사람은 발맞춰 걷기 시작했다.
“언니는?”
“용성까지 나와 계셔. 덕분에 나도 거기서 몸을 뺄 수 있었지.”
견하는 지금까지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느라 무척 피곤했다고 강조라도 하듯, 한껏 기지개를 켰다.
저 표정과 동작은 자신이나 리안, 루우 앞에서만 보여주는 행동이라는 걸 아는 효윤은 피식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리듯 쓰다듬어주고 싶지만, 보는 눈들이 있으니 참는다.
그 대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자.
“준장이 된 주견하 감찰국장께서 국경까지 나와 계신다는 건, 역시 ‘보여주기’겠지?”
견하는 씩 웃는 얼굴로 대답한다.
“게레센제 카간을 맞이하는 중요한 일에 내가 직접 나와 감독한다, 이 일에 얼마만큼의 무게를 두고 있는가 울제이가 알아차리도록 해야지.”
“‘알아차리도록’인가? 울제이는 그쯤은 알고 있을 텐데. 견하 네가 원하는 건 알아차리는 걸 넘어서 ‘여기 일에만 정신이 팔리도록’ 하려는 거 아냐?”
견하는 자신의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웠다.
“최효윤 중장 각하께서 정세를 읽는 능력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그 이상은 국가의 대사라 답변드리기 어렵겠는데.”
“뭐,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꾸몄을까마는.”
그리고 리안도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견하의 능력을 신뢰한다 해도 몇 번이고 그의 계획을 검토해봤을 것이다.
대체 뭘까.
견하는 뭘 노리는 거지.
“승부는 올해 안이나 내년 초에 날 거야.”
“그렇게 빨리? 길어봤자 반년인데?”
“자신도 있지만, 그 이상 끌면 위험하니까. 본격적으로 총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끝내야 해.”
총선거 기간에도 이 난리를 질질 끌고 있으면, 당연히 불만의 목소리도 나올 것이다. 다이온 연방을 만든다더니 그 안에서 또 내전인가. 대체 미리안 정권의 외교 정책은 왜 이리도 엉망인가, 하고.
그때 가서도 류성일이나 안세규가 지금처럼 순순히 협조해줄 것이라 기대하긴 어렵다. 아니 어쩌면…… 안세규는 그럴 가능성을 내다보고 몸을 굽힌 걸지도.
이번 일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것만으로도 안세규의 모든 의혹과 과실을 덮고 넘어갈 수 있다. 사람들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총선거라…….”
그렇게 중얼거린 효윤의 눈길이 기차를 향했다. 기차에서 화물을 내리는 병사들이 모습이 보인다. 태주갑과 부하들에겐 휴식을 명령해두었다. 아마 견하가 이미 그들을 위한 편의를 준비해뒀을 것이다.
“그렇게 급하다면 곧 새 임무가 떨어지겠네.”
“아니. 한동안은 쉴 거야. 계속 여기서 대기.”
“급하다면서?”
“급해도 기다려야 하는 소식이 있으니까.”
“뭐야……. 사실은 여유 있는 거 아냐?”
“여유는 없어. 그래도 기다려야 해.”
싱글거리는 얼굴은 아리송한 대답만을 반복했다.
***
개봉의 왕궁도 그러하듯이, 칸발리크 황궁에도 몽골인들의 천막, 게르를 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봉 왕궁이 칸발리크 황궁을 본받아 그렇게 개축된 것이다.
오늘 여기서, 울제이는 어설프게 쿠릴타이를 소집하고 어설프게 카간 자리에 오른다.
영기, 술데를 이루는 말총이 바람에 흩날린다.
제대로 된 즉위식이라면 칸발리크에서 새너두를 거쳐 카라코룸을 향해 나아가며, 마침내 오논강에 닿아 의식을 치렀을 것이다. 칭기스 카간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쿠릴타이가 의회의 역할을 하게 된 현대엔 옛날처럼 몇 달에 걸쳐 열리진 않더라도 한동안은 카간을 축수하는 떠들썩한 잔치가 온 나라를 뒤덮었겠지.
하지만 형 게레센제 때처럼 나라가 도저히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고 보긴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울제이도 비상시의 카간 즉위임을 천명하고, 약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래도 아예 하늘 아래 나설 수 없었던 형보다는 나은가.
검붉게 물든 하늘 때문에 아예 실내에서 급하게 즉위식을 치른 형과는 달리, 자신은 어떻게든 전통적인 방식을 흉내라도 낼 수 있었다.
아니, 카라코룸 총대주교에게서 대관식을 받지 못하니 게레센제 형과 마찬가지 신세인가.
몽골 황실이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즉위식은 전통적인 방식과 크리스트교식, 이렇게 두 번에 걸쳐 치러졌다.
그러나 전 카라코룸 총대주교 레오 6세는 내전에서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편을 들었고, 내전이 끝나자 그 책임을 지고 자결하는 바람에 게레센제에게 대관식을 치러주지 못했다.
새로 선출된 총대주교도 카라코룸이 사실상 고려의 손아귀 안에 들어 있으니 대관식을 치를 수 있을 리 없다.
-삼형제 중 이 두 번의 절차를 제대로 밟은 사람은 큰형님 시레문 카간뿐인가. 살아 있는 보르지긴 군주 중엔 루우 테무르가 유일하다.
게레센제와 울제이가 그녀를 견제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저 상징적인 절차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 ‘상징’을 우습게 여기다간 언젠가 그것이 육중한 무게로 덮쳐온다.
-아쉽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만으로 만족해야겠지.
쿠빌라이 카간도 그랬다. 그의 형 뭉케 카간이 죽자 동생 아릭 부케와 내전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세력을 끌어모아 따로 쿠릴타이를 열고 즉위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도 그때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을 지지하는 황정회 일파, 볼로드, 전쟁성과 내무성 관료들……. 그들이 울제이가 임시로 모은 쿠릴타이를 구성했다.
몽골 제국입헌당으로 대표되는 범좌익은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은 쿠릴타이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울제이를 카간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칸발리크에서 사라지기 직전에는 ‘존황’의 구호 아래 성명을 발표, 자신들은 게레센제의 정통성을 지지한다며 울제이의 칸발리크 입성을 규탄했다.
-위선자 놈들.
실상은 고려인들의 꼭두각시인 주제에.
그놈들이 게레센제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것도 결국은 루우 테무르에게 ‘물려줄 정통성’ 때문이다.
그러니 선수를 친다.
미적지근한 타협을 논하는 자들의 입을 닥치게 하고, 당황스럽게 하고,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