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군작전(9)
공간만 놓고 보면 울제이가 유리했다. 울제이는 칸발리크에 게레센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걸 토대로 자기 좋을 대로 선전 활동을 하면 되니까.
일단 게레센제를 국내로 호송하는 데 걸리는 시간, 게레센제의 의욕을 박살 내고 꼭두각시로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을 따져보면, 아무래도 고려가 불리하다.
하지만 게레센제의 측근들은 카간을 납치한 고려를 적대하는 것만큼이나, 울제이의 카간 즉위도 용납하지 못한다.
“말씀하신 대로 울제이가 칸발리크의 정국을 장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죠. 몽골 제국입헌당도 울제이에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테고, 게레센제의 측근들은 황궁에서는 밀려났다 해도 칸발리크 전체를 쉽게 내어주진 않을 겁니다.”
황정회를 등에 업고 자신의 카간 즉위에 방해되는 모든 세력을 짓부숴버린다면 빠른 정국 장악도 가능은 하겠지.
“하지만 울제이는 그런 선택만큼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바이다르가 아직 낭키아스 칸 자리를 지키고는 있지만, 울제이가 응천의 정국을 장악한 이상 실질적으로 키타이와 낭키아스는 통합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즉, 이대로라면 울제이가 다스릴 땅의 구성원 중 대다수는 한족이라는 뜻이다.
한족, 몽골인, 그 외 기타 다양한 구성원을 별다른 마찰 없이 통치하기 위해선, 입헌 개혁을 비롯한 각종 개혁이 이어져야 한다.
“태사 각하께선 한족들 좋으라고 다이온 연방에 입헌 개혁을 촉구하신 게 아닙니다. 개혁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기에, 다이온 연방 전체의 생존을 위해 주장하신 거죠.”
“그렇다면 울제이와 황정회의 공조는 오래갈 수 없겠구먼.”
늙은 장군의 말에 견하는 끄덕였다.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울제이는 장기적으로는 몽골 제국입헌당이나 게레센제 지지파에게 극단적 조치를 취할 순 없습니다.”
극단적 조치를 취해준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견하는 웃음을 삼켰다. 스스로 민심을 잃고 추락하겠다는데 누가 말리랴.
“일분일초가 귀합니다. 울제이가 진땀 흘리는 동안 우리는 게레센제를 이용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모두 황제 폐하와 고려를 위해 힘을 보태주시기 바랍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영관급 장교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보고를 검토하거나 작전도를 노려보는 장성들. 어떤 이들은 계급을 의식하지 않고 작전의 여러 요소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인다.
견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껏 내밀었던 상체를 다시 의자 등받이로 끌어당겼다.
군인들은 생각 이상으로 잘 작동한다. 물론 견하는 이게 자신이 잘나서라고 자만하지 않는다. 이렇게 군인들을 정치적 목적에 복종하도록 잘 길들인 리안의 위업을 실감하는 것이다.
주어진 도구를 잘 활용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풋내기라면 더욱 그렇다. 견하는 자신을 그렇게 고평가하는 김천열을 비롯한 몇몇 장교들의 시선을 기억해두었다.
언젠가 충실한 말로 쓰기에 적합한 인간들이니까.
-그보단…….
견하가 할 일은 작전의 방향을 잡아주는 일 정도고, 작전의 경과는 군인들의 손에 맡긴 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해봤자 소용없는 걱정을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해야만 하는 생각으로 사고를 전환한다.
-울제이 당신도, 최소한의 피만 흘리길 바랐겠지.
게레센제의 피를 흘리지 않고, 형에게서 무사히 양위를 받아냈다면 그보다 이상적인 결말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흘린 최소한의 피에 고려인의 피는 넣지 말았어야지.
대부분 게레센제가 고태용을 죽였을 것이라 예상했고 그럴 개연성이 가장 컸지만, 견하는 용의선상에서 한 번도 울제이를 빼놓지 않았다.
안세규라는 사냥감을 놓쳤을 때, 그 안세규가 울제이의 제안을 견하에게 털어놓았을 때, 울제이는 사냥감이 되었다.
고태용 살해라는 음모에 울제이가 뭔가 관련되어 있지 않다면, 바로 그 시점에 안세규를 흔든 게 설명이 안 되니까.
게다가 견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다.
가끔은 그게 지나쳐 모든 인간이 자신처럼 몇 겹의 계산을 품었다고 의심하지만, 이번에 울제이를 겨냥했던 의심은 정확했다.
견하가 다이온의 상황을 뒤흔들 음모를 꾸미듯, 울제이도 게레센제의 카간 자리 굳히기를 두고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견하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울제이도 망설임 없이 움직임으로써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그저 상황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 빠르다.
울제이는 마치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대비했다는 듯 움직였다. 응천 장악과 바이다르 확보에 이르는 그 과정은 너무도 깔끔했다.
-고태용을 죽인 사람은 울제이 당신이지.
최소한 수년이 걸렸을 상황 변화를 단번에 진전시켰다는 점에선, 고태용의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는 견하에게도 반가웠다.
하지만 사적으로는 아니다.
견하는 무슨 뜨거운 동포애로 같은 고려인을 건드렸다는 분노를 느끼진 않는다. 그는 재연과는 다른 인간이니까.
다만 견하는, 함께 어떻게 다이온을 장악해나갈지 의논하던 고태용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떻게 보면 견하가 꿈꾸는 이상적 미래에 동조해준다고 볼 수 있는, 부하도 상관도 아닌 대등한 동료……. 그게 고태용이었다.
전우애 같은 거창한 이름은 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복수심이라는 감정도 부정하지 않는다.
-당신은 일개 소장과 칸을 저울에 올려두면 당신 쪽으로 기운다고 믿겠지. 나는 내 저울에 당신을 올려두고 고태용 쪽으로 기우는 걸 보여주겠다.
그리고 그 순간 비참하게 일그러지는 울제이의 얼굴을 꼭 보고 싶다고, 견하는 생각했다.
-내가 흘릴 최소한의 피는 당신의 피다, 울제이.
견하는 의자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감찰국장의 측근들이 곧바로 그를 따랐다. 선두에 선 견하의 시선은 먼 곳을 향했다.
마치 울제이를 노려보기라도 하듯.
***
“이 무슨 참상이란 말인가…….”
울제이 칸의 목소리는 깊이 잠긴 채 떨린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비참하다는 듯,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이 몸은 조카를 형님 품에 되돌려드리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단 말인가!”
비통한 노성이 대명전의 대들보를 울렸다.
옆에 선 바이다르의 어깨를 감싼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바이다르는 조금 아팠지만 내색하지 못했다.
“간신배들이 형님 카간의 눈과 귀를 가로막아 동생과 아들이 다가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뒤로는 카간을 외국군의 손아귀에 넘길 음모를 꾸몄다. 몽골인이라면 어찌 노하지 않을 수 있으랴!”
물론 울제이의 말은 사실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의 칸발리크 입성이 카간을 향한 쿠데타 시도가 아니라 형을 구하려는 시도였다고 포장하려면…… 형의 진정한 충신들에게 누명을 씌워야 했다.
응천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기자들은 사진을 찍고, 울제이가 한 말을 받아적는다.
“칸발리크의 절반이 아직도 역도의 손아귀에 있소. 칸발리크가 안정되는 대로 우리는 우리의 카간을 돌려받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오. 그에 앞서 고려와 역도의 이런 비상식적인 행위를 규탄하는 바요.”
곧 울제이가 내세운 대의가 방송을 타고 다이온 전역에 퍼져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먼저 칸발리크 시내의 방송국을 확보해야 하는데, 울제이는 여기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말은 사실을 왜곡했어도, 노기만큼은 진실이었다.
울제이는 자기 앞을 이렇게 가로막은 모두를 향한 분노를 감추지 않은 채, 참모들과 함께 회의실에 들어섰다.
아직 카간의 어좌에 앉을 때는 아니었다. 그는 전에는 볼로드가 앉았던 상석, 태사의 자리에 앉았다.
공식적인 지위가 없는 볼로드는, 마치 울제이의 조언자 노릇이라도 하듯 오른편에 자리 잡았다.
“형님이 기갑사 같은 물건을 꺼내실 줄이야.”
어렴풋이,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간과했었다. 야전도 아니고 황궁 한복판에서 그렇게 요란한 병기를 꺼낼 거라는 생각은 못 했으니까.
“저희도 안일했습니다. 바이다르 칸의 신병이 확보된 상태에서 우리 군이 황궁으로 밀어닥치면 체념하리라고 여겼는데…….”
참모 중 하나가 자책하듯 말하자, 울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의 허물이 아니다. 나도 그렇게 판단했으니까. 주군이 이미 그렇게 판단했는데 그대들이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순 없었겠지.”
그보다는 황궁에서 벌어졌던 처절한 전투와 앞으로의 일이 더 문제다.
게레센제가 갖춘 기갑사의 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았고, 끈질기게 저항했기에 하마터면 키타이군 선발대는 황궁 밖으로 밀려날 뻔했다. 고려군이 카간을 납치해준 게 고마울 지경이었으니까.
지휘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볼로드가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경 인사들을 동원하고, 황정회에서도 힘을 보태면서 간신히 다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남쪽에서 후속 부대가 올라오고 나서야 황궁 장악에 성공했다.
“격파한 기갑사 수는 많지 않았지…….”
그저 게레센제의 측근들이 황궁에서의 농성은 불리하다고 여겨 물러났을 뿐이다. 그들은 도시 북동쪽을 장악하고 주요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 여전히 저항 중이다.
칸발리크의 비극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민들 앞에서 시가전을 벌일 순 없다. 어느 쪽이든 그건 민심을 잃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양측은 지금도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북방,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한 본토의 장군들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줄지도 미지수다.
“다들 ‘또’ 내전에 말려들 순 없다는 판단으로 자리만 지킬 가능성이 큽니다.”
“형님이 안 계신 형님의 친위 세력과 손잡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섣불리 나를 지지하고 나설 수도 없겠지.”
알타이 자유 공화국으로 넘어가지 않고 카간 체제를 지지했다 해도, 그게 게레센제의 군 장악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으니까.
“카라코룸이 사실상 고려인들 손에 있는 것도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동명과 카라코룸을 잇는 선상에서 고려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니, 장군들은 움직임을 더욱 삼갈밖에.
젠장. 미리안보다 카라코룸에 일찍 입성만 했더라면……. 그때 그 실책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울제이의 속을 뒤집는 사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곧바로 또 다른 보고가 올라왔다.
“칸이시여, 고려에서…….”
우물쭈물 망설이는 말을 통해 울제이는 대강 어떤 일인지 알아차렸다.
“내용의 참람됨은 상관없다. 그대로 고하라.”
“예. 고려에선 이번에 칸발리크 정국을 멋대로 휘두르려 한다며 칸을 비판하고 나서는, 몽골 정국의 안정을 위해 불가피하게 카간을 구출했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