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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03화 (403/541)

풍군작전(8)

어떤 희생도 감당하겠다는 말은 고려군 병사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소총 이상의 무장을 갖추지 못한 경호원들을 도륙 낸다. 그러고 나선 어전에 들어앉은 게레센제의 측근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걷어찬 발길질에 누군가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또 누군가는 피 섞인 토악질을 했다.

당연히 침입자들은 저항하려는 자를 망설임 없이 쏘고 찌르고 베었다.

효윤의 피 묻은 박도가 게레센제의 목을 겨냥했다. 칼날 위, 부하들의 뒤섞인 피가 그 동작을 타고 게레센제의 얼굴에 흩뿌려졌다.

“카간께선 우리를 따르셔야 합니다.”

어전 바닥에 흐르는 측근들의 피는,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경고가 되었다. 남은 측근들도 죽을 수 있다는 경고는, 그대로 게레센제에 대한 인질극이 되었다.

살아 있는 이상은 훗날을 도모한다. 고려 측 습격자들은 훗날을 내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훗날을 도모하려면 그때 도움을 줄 측근들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라.”

허파에서 쥐어 짜낸 숨이 기도를 긁어댄다. 게레센제는 침통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효윤은 조금 안도했다. 만약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면 게레센제의 측근들을 모두 죽여야 했다.

그랬다면 궁지에 몰린 게레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할 수도 있었지만.

준비해두었던 대로 게레센제의 눈을 가리고, 재갈을 물리고, 손발을 묶는다.

이들이 하는 짓은 변명의 여지 없는 납치다. 이미 이곳에 들어온 이상 카간의 권위는 능멸당했다. 더한 능멸을 저지른다고 해서 망설일 이유는 없다.

누군가 “폐하!”라고 원통히 외치며 바닥에 엎어졌지만 그뿐이었다. 이제 게레센제는 측근들의 손발을 묶는 인질이 되었다.

일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엎드려 소용없는 한탄을 내뱉는다.

황궁을 기습한 키타이군과의 싸움은 게레센제가 확연히 우세했다. 키타이군은 기갑사 대책은 세워두지 않았으니까. 그걸 감안하더라도 게레센제가 비밀리에 준비한 기갑사는 예상 이상으로 잘 싸웠다.

그래서였을까.

후방을 급습한 적의 소규모 부대 출현을, 칸발리크 황궁은 무심코 키타이군의 양동작전이라 판단해버렸다. 궁지에 몰린 적이 후방으로 시선을 돌려 정면의 압박을 줄여보려는 시도라 여긴 것이다.

양동작전엔 넘어가지 않는다. 지금까지 싸워 온 기갑사의 역량으로 보아, 미완성품이라 할지라도 일반 병사에 비하면 훨씬 강하다.

따라서 후방의 기습을 저지하는 덴 기갑사를 1기만 차출해도 충분할 터.

후방의 적이 키타이군의 양동부대가 아니라 또 다른 세력임을 알아차린 후에도 오판은 이어졌다.

그들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데 시간을 허비했고, 고려군임을 파악하자마자 당황하는 바람에 의도 추측에 시간을 허비했다.

당황. 그렇다. 그 찰나의 당황이 ‘황궁을 탈출한다’라는 올바른 판단을 방해했다.

탈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답은 너무도 뻔한데, 여기서 정치적 입지를 먼저 생각해버렸다.

칸발리크 황궁을 버리고 도망친다면 그것으로 게레센제는 카간위를 빼앗긴다. 딱히 카간으로서의 위엄을 세운 적이 없는 게레센제는 칸발리크 바깥으로 쫓겨나는 순간 ‘부적격’ 판정을 받게 된다.

반면에 남으로는 바이다르를 구하고, 북으로는 칸발리크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울제이는 그것만으로도 자격을 입증하는 셈이다.

그러니 상대가 누구든, 게레센제는 황궁에서 승부를 볼 수밖에 없다. 황궁을 지켜내기만 한다면, 그 후로는 게레센제의 위엄을 떨치고 상황을 유리하게 끌어가는 게 가능하다…….

그런 계산이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이들의 판단은 일리가 있었다. 또한 결정에 이르는 과정도 신속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효윤과 부하들의 능력은 그들의 판단력을 훨씬 상회했다.

세계대전 이후 건설되어 현대전에서도 방어 기능을 할 수 있는 동명시의 황궁과 달리, 칸발리크 황궁은 중세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라 현대적인 방어에는 부적합했다.

특히 황궁까지 들어오는 운하는 세계를 지배하던 때의 자신감을 드러낼 뿐, 이런 방어전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했다.

하나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패착에 대한 어떤 분석을 내놓든 패배는 뒤집지 못한다.

끝난 것이다.

“추격해오면 우리는 카간을 시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한마디 경고를 남기고 효윤과 부하들은 어전을 빠져나왔다.

게레센제의 측근들은 별다른 조치 없이 그대로 어전에 남겨두었다. 방금 남긴 경고로 그들은 효윤을 쫓아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 키타이군의 침입을 방어해야 했다.

물론 참수 작전으로 타격을 입은 게레센제의 어전은 방어전을 오래 지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패잔병을 긁어모아 황궁을 탈출하는 정도겠지.

그리고 어전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키타이군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게레센제는 어디로 갔지? 고려군이 카간을 납치했다고? 정말인가? 패잔병과 함께 탈출한 걸 가리려는 연막은 아닌가? 누구를 추격해야 하지? 황궁 장악, 상황 안정이 아니라 추격에 나서야 하나?

이런 물음이 이어져 결정을 망설이게 하면 할수록, 효윤의 일은 수월해진다.

풍군작전은 성공에 더욱 가까워진다.

효윤은 황궁 진입에 사용한 북서쪽 운하가 아니라, 정북 방향의 문을 통과하기로 했다. 대사관으로는 가지 않는다. 그쪽 직원들은 진즉에 칸발리크를 빠져나갔다.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칸발리크를 벗어나 국경으로 가야 한다. 고려로 들어가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다.

“……어처구니가 없네. 이런 탈출작전을 바란 건 아닌데.”

농담과 비아냥을 섞어서 그렇게 한마디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김천열은 자신이 내전을 겪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대원수의 측근들에게 주어진 계급을 비웃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격을 맞추기 위한 가짜 계급, 철없는 미리안의 대원수 계급만큼이나 애들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소년이 청년이 되기까지 4년 동안, 어떤 식으로 괴물처럼 성장해왔는지 직접 보았으니까.

아니 그가 미리안을 따라 격동의 시대에 몸을 맡긴 것이 1929년 봄의 일이니까, 1932년의 가을이 깊어가는 지금까지 4년도 채 되지 않았다.

여하튼 그땐 주견하 ‘대령’이 뭔가를 한다고 했을 때도 사고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지만, 지금까지 주견하는 대령 계급 이상의 일을 해왔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능력에 따라 계급을 받는 게 아니라, 주어진 계급에 따라 능력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싶다.

여기, 용성으로 나와 풍군작전의 모든 과정을 지휘하고 있는 주견하를 보면 더더욱.

“다소간의 교전은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쪽이 살아 있는 게레센제를 고려에 넘기느니 차라리 게레센제를 시체로 만들어 떠나지 못하게 하자고 마음먹는다면 말이죠.”

이제는 ‘카간’이라는 호칭조차 붙이지 않고, 냉혹하게 어떤 이의 삶과 죽음을 저울질하는 청년.

그는 지금 대령이 아니라 ‘준장’의 별을 빛내고 있다.

4년 만에 대령에서 준장이라……. 아니, 4년 만에 소장에서 대장까지 진급한 자신이 할 말은 아닌가.

고급장교들을 앞에 두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 보고를 받고, 방침을 전하고 명령을 내리는 청년. 이 청년에겐 준장마저도 족쇄가 아닌가.

-최소한 원수 계급은 다는 게 적절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대원수 미리안에 대한 생각이 점차 변해왔듯이, 주견하에 대한 생각도 지난 4년간 이렇게나 많이 변했다.

“게레센제의 측근들이 그의 죽음까지 각오하면서 덤벼들 것 같진 않네. 그럴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진즉에 칸발리크에서 최효윤 중장의 작전을 저지했겠지.”

“다만 울제이 칸이 얼마나 빨리 칸발리크 정국을 장악할 수 있는지에 따라선 주 장군의 말도 옳을 듯하군. 하지만 그렇게 될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리라 보네만.”

장성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는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계급으로 보나 한참 아래인 주견하의 참모라도 된 듯 말이다.

하긴, 숙군까지 거치고 나선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사람만 군에 붙어 있을 테니.

주견하가 장성이 되면서 받은 검. 그 검집이 허리춤에서 매끈한 빛을 뽐내는 게 보인다.

대원수까지 차고 있는 저 검. 미리안은 저 검으로 이단의 목을 베고 파멸인의 배를 갈랐다지.

주견하의 검은 무엇을 벨 것인가.

“용성의 통합사령부를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만, 국경의 부대를 전진시켜 최효윤 중장을 맞이할 준비는 해야 합니다. 최소한 울제이가 카간을 칭하기 전에 명분에 손상을 입히려면 이번 작전에 차질이 있어선 안 됩니다.”

임시통합사령부. 그렇다. 여기 용성엔 지금 서부군 사령부, 황성방위군 사령부의 주요 구성원이 모여 이 풍군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울제이의 명분에 손상을 입힌다, 라…….”

“울제이는 칸발리크를 장악하자마자 우리의 행동을 ‘납치’로 규정하고, 자신은 고려의 음모를 미리 눈치채고 카간을 지킬 부대를 보냈으나 애석하게도 늦었다…… 이런 식으로 선전하겠죠.”

“우리는 울제이가 그런 수작을 부리기 전에 ‘무사한 카간’의 신병을 확보해서, 울제이의 음모로부터 카간을 지키기 위해 미리 ‘탈출’시켰다고 선전해야 하니.”

상황을 중립적으로 볼 줄 아는 지혜로운 이라면 양쪽 모두 자기 좋을 대로 떠들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그렇게 지혜로운 이는 많지 않다. 보통은 처음 받은 인상이 머리에 각인되어, 그걸 토대로 굳어버린 사고를 하기 마련이다.

즉 먼저 입장을 발표한 쪽이 더 설득력 있다는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울제이가 먼저 고려를 규탄하면, 사람들은 나중에 나온 고려 측 발표를 ‘카간을 납치, 겁박하고선 변명을 하는 것’이라 인식할 것이다.

반대로 고려 쪽이 먼저 ‘우리가 카간을 보호했다’라고 선언하면, 사람들은 울제이의 발표를 ‘형의 뒤통수를 쳐 놓고 궁색한 변명을 한다’고 여길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두 인식 모두 오해가 아니라는 점이다. 고려는 카간을 납치했고, 이제 그가 손아귀에 들어오면 겁박해서 고려의 유용한 도구로 만들 것이다. 울제이는 형의 뒤통수를 쳤고 이제 카간이 되려고 들 것이다.

바로 여기서, 견하는 시간을 확보할 방법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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