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군작전(6)
피는 최소한으로 흘리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흘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20년을 넘기고 나서야 이 응천의 궁궐에 사람의 피가 흘렀다. 화려한 대들보와 기둥에 허우적거린 핏자국이 남겨졌다.
쿠데타 수뇌부는 어전에서 벌벌 떨기만 하느라 미처 항복하지도 못했다.
울제이는 그런 자들마저 모두 ‘구금’만을 명했다.
정책적인 이유도 있지만, 당장 이 어전에서 ‘연출’해야 할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울제이는 높게 솟은 왕좌를 향해 걸어갔다. 괴이할 정도로 그의 발소리가 어전의 천장을 울렸다.
울제이 뒤로는 그의 측근들뿐만 아니라, 그가 데려온 ‘기자’들도 포진했다.
마침내 왕좌가 있는 곳까지 올라온 울제이는 바이다르를 내려다본다.
바이다르의 얼굴에 그제야 약간의 공포가 스민다. 혹시 숙부는 자신을 밀쳐내고 스스로 낭키아스의 옥좌에 앉으려는 게 아닐까.
“바이다르…….”
그렇게 조카의 이름을 부른 울제이는, 바이다르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와락 끌어안았다.
카메라의 불빛이 정신없이 번쩍였다.
‘전장을 뚫고 달려와 조카를 구출한 숙부’, ‘뜨거운 혈육의 정’. 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그 어떤 전쟁의 승리보다 짜릿한 쾌감이 울제이의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 미소마저도, 조카의 무사함에 안도하는 숙부의 얼굴을 연출했다.
***
응천에서 벌어진 일과 꼭 쌍둥이 같은 일이 칸발리크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개봉에 배치된 키타이군 예비대는 칸발리크에 도착하자마자, 일차적으로 몽골 전쟁성 및 내무성의 지원을 받았다.
형식적인 검문조차 없었다. 이들에게 국경은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비대라고는 해도 정말 아끼고 아끼다 결정적인 순간에 쓰려고 했던 정예들이라, 울제이가 응천에 접근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북상했다.
연락받은 황정회 내 울제이 지지파는 이 병력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들은 이번에도 아무 저항 없이 칸발리크 시내에 진입했다.
마지막 남은 난관은 바로 황궁이었다.
그리고 이 난관을 의외의 인물이 해결해주었다.
바로 울제이 지지파 관료와 의원들에 의해 태사 자리에서 쫓겨난 자, 볼로드였다.
“……귀공을 실각시킨 사람들과 정말 손잡을 수 있겠습니까?”
칸발리크에 들어온 부대의 지휘관은 그렇게 물었다. 황정회의 지원과 볼로드의 지원, 둘 다 받는다고 한다면 듣기엔 좋은 말이다.
하지만 대립이 극한에 다다른 칸발리크 정세 속에서, 서로 적대하는 두 세력이 하나의 작전에 가담한다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더 크다.
지휘관의 우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볼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내 정치 인생에 실각의 위기가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하시오? 결국 지금 몽골의 체제에서 재상이 얼마만큼의 정책추진력을 갖느냐는 카간께 달려 있다오.”
볼로드가 관료의 우두머리로 오래 권력을 누려올 수 있었던 건, 선대 카간 시레문의 전폭적인 신뢰 덕분에 가능했다.
반면 게레센제는 호시탐탐 볼로드를 몰아내고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길 원했다.
이것이 입헌군주제에 굳이 ‘몽골식’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몽골 현 체제의 특징이었다.
혹은 군주의 변덕에 정책의 일관성이 침해당하는, 몽골 체제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볼로드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고려는 황실을 다시 세우면서 황제의 권력을 어디서부터 제한할지 많은 논의를 거쳐 새로운 체제를 세웠소. 이제 우리 몽골도 그런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되었지.”
“우리 칸을 새로운 카간으로 세워, 새로운 체제의 기점으로 삼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까?”
“당신들도 그럴 생각으로 여기 온 게 아니오? 울제이 칸의 입헌 개혁도 그런 방향을 지향하고 있을 텐데?”
“……그 이야기는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군요.”
“여하튼 지금 중요한 건 음모를 꾸민 황정회 일파와의 싸움이 아니오. 내겐 몽골의 체제를 어떻게 바꾸느냐가 더 중요하지. 그런 맥락에서 협력하겠다는 거요.”
지휘관은 일단 끄덕였다. 칸발리크의 복잡한 정치싸움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위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당장 그에겐 신속하게 달성해야 할 명령이 있었다.
일이 꼬이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황궁으로 직행한다.
칸발리크 내 대부분의 정파가 이 상황에 협력하거나 묵인하니 황궁의 문은 활짝 열린 것과 마찬가지다.
낭키아스에서 바이다르가 억류되었듯, 여기서도 게레센제의 신병을 확보하겠다는 거침없는 발걸음이 황궁을 더럽힌다.
***
계산과 어긋난 일이 너무 많았지만 게레센제 카간은 흔들리지 않았다.
볼로드가 타이시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진정 볼로드의 실정을 규탄하려는 정의감에서 비롯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황정회라는 집단은 볼로드가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주진 못하리라 판단 내렸을 뿐이다.
가장 큰 이유는 고려 태사 미리안이 주창한 입헌혁명이었다. 여기에 게레센제와 울제이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이 하나둘 합류하고 있는데, 볼로드 타이시는 손을 놓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따라서 일차적으로 볼로드를 제거해야 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게레센제 카간도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쯤이야 게레센제 본인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기회에 두 세력 모두 제거한다면 모든 권력은 카간께 집중됩니다. 진정으로 카간께서 원하시는 개혁도 비로소 가능해질 겁니다.”
적이 황궁의 문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게레센제의 측근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진언을 올렸다.
저항은 적이 황궁 깊숙이 들어올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다. 쉽게 여기까지 도달하진 못할 터.
이번 일은 확실히 위기지만, 또한 카간께 충성할 자와 제 잇속만 챙길 자를 구분할 기회다.
상황은 측근들의 그런 담대한 전략에서 거의 어긋나지 않았다. 그러니 동요도 없다.
“다만 키타이 칸이 이번 일에 그렇게 깊이 개입할 거라곤 짐도 예상치 못했다.”
“예상보다 낭키아스 사태에 대처하는 속도도 빨랐습니다.”
울제이는 형을 방심시키기 위해 계속 응천에 머물며 사태를 수습하는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게레센제의 촉수는 진즉에 개봉으로 뻗어가, 거기서 출발한 정예 병력이 칸발리크에 잠입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황정회가 대안으로 울제이를 고르리라고도 예상하지 못했지. 울제이의 협상 능력을 다시 평가해야겠군.”
물론 그런 평가는 눈앞의 일을 해결한 뒤에 내려도 늦지 않다.
게레센제가 온전한 몽골의 군주가 되는 것, 그리하여 몽골과 게레센제가 다이온 연방을 이끄는 것.
그 전환점이 눈앞에 있다.
“기갑사를 보내라.”
***
한재연은 침을 삼켰다.
황제 왕서라, 혹은 루우.
태사 미리안.
그의 친구이자 상관인 감찰국장 주견하.
세 사람 앞에서 이번 ‘풍군 작전’의 진의를 설명해야 했다.
고등학생 시절 역사 수업에서 손들고 발표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견하와 시선이 교차한다. 이 계획의 상세한 가닥은 재연이 잡았지만, 발상 자체는 견하가 떠올렸으니까.
주견하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것을 신호로 재연은 입을 열었다.
“‘풍군 작전’에서 풍군(馮君)은, 북연의 마지막 군주 풍홍을 뜻합니다.”
이 작전의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번 작전의 발상을 이루었으니까.
“화북을 거의 통일한 북위, 그리고 동방의 패자 고구려 사이에 끼어 있던 북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멸망합니다. 북위군이 동쪽으로 진격하고 있던 그때, 고구려 역시 북연의 수도 용성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리안이 흐음, 하는 콧소리를 냈다. 아마 용성이 몇 년 전 고려 내전의 격전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있으리라.
“북위는 북연을 끝내 멸망시켰습니다만, 그로 인한 결실은 반밖에 거두지 못했습니다. 고구려군이 이미 수도 용성에서 인구와 물자, 그리고 군주 풍홍 일가를 빼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로 망명한 풍홍은 그때 장수왕에게서 조롱 섞인 위로를 받게 된다.
‘용성왕 풍군이 들판에서 고생이 많소.’
스스로를 천자라 여겼던 풍홍이 용성‘왕’이니 풍‘군’이니 하는 호칭을 참을 수 있었을 리 없다. 결국 풍홍은 고구려에서 행패를 부리다 바다 건너 남쪽 유송으로 재차 망명을 시도했다.
“장수왕은 풍홍을 끝내 살해하고 그 병사와 백성을 고구려에 편입시켰습니다.”
재연은 잠깐 말을 멈추고 세 사람의 얼굴을 바라봤다.
모두 지금까지의 설명만으로 이 작전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한 듯했다.
“‘풍군 작전’은 이때의 일을 재현하는 작전입니다.”
“우리가 고구려 장수왕의 역할이군. 키타이는 북위고, 게레센제 카간이 바로 ‘풍군’이지. 맞나?”
리안이 확인하듯 물었다. 재연은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리안의 눈길이 견하를 향했다. 그녀는 한쪽 입꼬리만을 들어 올렸다. 제법이라 말하는 미소였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흥미로워. 응천에서 우흥섭과 고려파 관료들을 철수시킬 때부터, 여기까지 일이 진행되리라고 내다본 건가?”
견하가 이런 과감한 작전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안세규 덕분이었다.
한 방 크게 얻어맞았던, 안세규의 과감한 행보.
더는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의 저자세로, 미리안과 루우의 정책에 협조하는 안세규에게 견하는 의표를 찔렸다.
견하도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곧 그의 방식을 학습하고 흡수했다.
때로는 상대에게 모든 걸 내맡기는 듯한 행동이, 상대의 손발을 묶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 결과물이 ‘풍군 작전’이다.
물론 견하는 굳이 이런 이야기를 리안에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작전의 뼈대만 이야기하기로 했다.
“전쟁에도 공세종말점이 있듯, 정치에도 공세종말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어요. 울제이의 기세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면, 언젠가는 그 기세가 꺾이는 순간이 반드시 와요.”
고려는 울제이의 진격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듯 보이지만, 반격의 기반은 이미 넘칠 만큼 준비되어 있었다.
“낭키아스도 내어주고, 바이다르도 넘겨주고, 칸발리크도 울제이에게 바친다…… 그리고 우리는,”
“……게레센제 숙부의 신병을 확보하는 건가.”
루우가 낮은 목소리로 꺼낸 말에, 리안은 끄덕였다.
“북연이 풍군을 얻지 못했듯, 울제이는 게레센제의 양위를 받지 못하겠지.”
그런 감상을 뒤로하고, 재연은 작전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듯 발표를 이어나갔다.
“울제이 칸은 당연히 우리 고려가 바이다르 칸의 신병을 먼저 확보하지 않을까, 그런 초조감에 휩싸였을 겁니다. 그래서 조급하게 움직였고, 지금도 고려의 반격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막상 얻고 나면 빼앗길까 두려울 테니.”
“네. 형초, 파촉 특구로 물러난 우흥섭 장군도 경계해야 하고, 바다 건너 상륙해오거나 발해도에서 남하할 고려 본국의 군대도 경계해야 하죠. 마찬가지로 화하 특구의 장해진 대장이 개봉을 노리지 않을까 걱정될 겁니다.”
“이제 칸발리크로 진입하면 정말 고려와 국경을 맞댈 테니 그 걱정이 더 깊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