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군작전(5)
예를 표하고 타이시의 권한을 상징하는 모든 것을 카간의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사직서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볼로드가 그런 걸 제출하건 말건 그의 해임에 따를 모든 절차는 준비되어 있을 테니까.
쓰지도 않은 사직서는 이미 인사 절차를 밟고 있겠지.
그러나 볼로드는 볼로드였다.
타이시로서 2대, 관료로서 3대를 섬겨온 남자다.
황정회가 외면하고 관료들이 외면했다 해서, 카간과 황제의 버림을 받았다 해서 ‘볼로드 개인에게’ 충성하는 무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아직 그가 쓸 수 있는 수는 남아 있다.
“울제이 칸에게, 연락을.”
***
“어차피 버릴 패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동정심이 안 드는 것도 아니군.”
리안이 그렇게 짧은 감상을 남겼다. 루우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씁쓸한 얼굴이었다.
아버지 시레문 카간이 붕어한 직후, 자신이 카간위를 이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복잡해지진 않았을 텐데.
마음이야 어떻든, 억지로라도 카간위를 향해 나아갔더라면…….
“그랬다면 다이온 연방이 탄생하기도 전에 게레센제, 울제이와 끝없는 투쟁을 벌여야 했겠지.”
어전 안에서 유일하게 웃음 짓고 있는 사람, 주견하는 그렇게 말하며 루우의 고뇌를 잘라냈다.
주견하는 울제이 및 게레센제와 전면 충돌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길을 돌아오는 게 낫다고 보았다.
고태용이 그렇게 죽지 않았더라면 좀 더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확실하게 카간위를 루우의 것으로 만들었겠지만.
뭐, 지금까지 준비해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고태용과 짰던 계획과는 달리 급조된 예비 계획이지만, 준비가 길었던 만큼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다이온 내에서 고려의 영향력이 크다고 해도, 고려의 간접적인 개입만으로 볼로드를 실각시킬 순 없었다. 몽골 제국입헌당은 칸발리크의 주류가 아니었으니까.
볼로드를 끌어내리려면 모든 방향에서 공격이 이뤄져야 했다.
고려와 고려의 입김을 받는 몽골 제국입헌당과 카간 게레센제, 울제이 칸, 울제이가 배후에서 조종하는 황정회에 이르기까지. 칸발리크라는 도시 자체가 볼로드의 포위망이 되도록.
그렇기에 울제이를 응천으로 끌어들였고, 당연히 후방을 경계한 울제이가 칸발리크에 뭔가 수를 쓰길 기다렸다. 울제이의 사주를 받은 황정회 일파가 움직이자 고려에선 몽골 제국입헌당을 움직였다.
혹시 모를 게레센제의 돌발 행동을 막고자 추가된, ‘카간께서 친히 통치하소서!’라는 구호는 견하의 발상이었다.
“그래, 견하 네 말대로 볼로드의 실각은 성공했어.”
루우는 그렇게 말하며 눈으로 묻는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그 ‘풍군 작전’이라는 것의 다음 단계는 무엇이냐고.
“짐은 철저히 볼로드를 외면했지.”
“볼로드는 이대로 물러설 인간은 아니야.”
그렇게 답하며 견하는 리안 쪽에 슬쩍 시선을 주었다. 만약 리안이 평소 볼로드의 실각을 염두에 두지 않았더라면 이 계획은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견하는 다시 황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국자이긴 하지만, 이런 굴욕을 감수하는 게 애국이라 여기지도 않을 인간이야. 그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다른 ‘애국’의 방향을 찾겠지.”
“볼로드가 택할 대안이 있을까?”
“아직 딱 하나 남았지. 울제이.”
“……울제이와 연합해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는 게, 볼로드가 택할 ‘새로운 애국’이라는 거구나.”
“지금쯤 그걸 우국충정이라며 열심히 합리화하고 있을 거야.”
“자기가 쫓겨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울제이 숙부가 제공했을 텐데.”
“그런 걸 따지고 있다간 정치생명이 끝날 테니까. 당장 자신을 해임한 게레센제 카간에게 어떻게 갚아줄 것인가가 더 중요하겠지.”
“어차피 치욕은 입었으니 사소한 추태 한둘쯤이야 상관없다는 건가.”
“여하튼, 이젠 울제이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주목해야 해. 원철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한 거고.”
대원철도주식회사는 단순히 철길만 까는 회사가 아니다. 철길을 따라 전신망도 함께 확충해왔다. 그 전신망을 통해, 철길을 따라 일어나는 모든 정보를 다룬다.
원철이 울제이를 도운 건 그가 신속하게 행동하도록 유도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울제이가 원철이 건설한 신철도를 이용하는 이상, 울제이의 움직임이 견하에게 전해질 수밖에 없다.
견하는 이 정보들을 방첩국 및 제국정보사령부와 함께 다루기로 했다.
이는 정보사령부를 달래려는 조치이기도 했지만, 합작 과정에서 자기 능력을 과시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무서운 인간이라며 경계를 사기도 하겠지. 하지만 경계와 감탄 사이를 가로막은 막은 얇디얇다.
방첩국, 정치경찰실, 주견하와 일하는 것도 나름 괜찮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 식으로 정보사 구성원들 사이에 서서히, 방첩국의 물이 들어가는 것이다.
언젠가는 정보사가 방첩국과, 정치경찰실과 ‘일원화’되어서…… 견하의 제국을 구성하는 요소가 될 수 있도록.
견하는 황제와 태사, 두 사람 앞에서 양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얼굴에도 활찍 핀 미소가 떠올랐다.
일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있던가.
이렇게 자신에 차서 일을 진행해본 적이 있던가.
“이제부터 더 재미있게 돌아갈 거야.”
***
쿠데타 정권의 특징 중 하나는, 놀라울 정도로 외부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토호파는 친인척 장교들을 활용해 응천을 장악하긴 했지만, 낭키아스군이 쿠데타 정권의 통제 아래 제대로 활약한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변방의 장군들은 자칭 ‘과도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기보다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울제이가 상상 이상의 속도로 남하하자 국경을 활짝 열어주었다.
저항이 있긴 했지만,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울제이의 진격 앞에 무너졌다.
과도 정부가 마지막으로 의지해볼 구석은 칸발리크였지만, 카간은 별다른 응답이 없었다.
바이다르 칸을 황태자로 책봉하려는 조짐도 없었고, 과도 정부를 승인하겠다는 답변도 없다.
만약 게레센제가 이 시점에서 과도 정부를 승인했다면 울제이는 이를 갈며 회군했을 테고, 미적거리던 낭키아스군도 통제 하에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나쁘게 흘러갔다.
물론 주견하의 입에선 시기가 아주 절묘했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딱 칸발리크 정계가 볼로드의 퇴진만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며칠, 아니 하루만 더 버텼어도 게레센제의 과도 정부 승인이 떨어졌을 그때,
울제이가 응천 궁정에 들이닥쳤다.
이미 키타이군, 그리고 키타이군과 적극 협력하기로 한 낭키아스군 일부가 응천을 포위하기 시작하자 쿠데타군 대부분이 도주했다.
그자들은 일단 정권을 장악하고 나면 정치적 해법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게레센제는 침묵했고 울제이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남하했다.
도박은 실패했다. 그런 판단이 서자마자 썰물처럼 응천을 빠져나갔다.
그 틈에 섞여 응천을 탈출한 ‘키타이파’ 정치인들은 곧장 울제이의 사령부를 찾아가, 응천 내부의 중요한 정보들을 바쳤다.
“……시민들을 안심시켜라. 병사들 기강도 서너 배는 더 잡는다고 생각하도록.”
보고를 다 듣고 난 울제이의 입에서 나온 명령이었다.
응천 시민 중에는 아직도 태평천국의 멸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극심한 공포와 혼란에 빠지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이를테면 갑자기 궁궐로 몰려가 바이다르를 살해한다든지…….
응천 내부 소식에 따르면 궁궐 방비는 그렇게 폭주한 시민들을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약화해 있다. 쿠데타 때 한 번 쓸려나갔고, 이번엔 그렇게 쓸어버린 인간들이 도망쳐버렸으니까.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바이다르’가 필요한 울제이는 응천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키타이군은 불을 끄러 온 친절한 이웃으로 인식되어야지, 정복자가 되어선 안 된다.
포로들은 다소 의심스럽더라도 모두 즉각적인 자유를 내려주었다. 어차피 포로들이 뭔가 꾸밀 시간도 없다.
포위는 신속했고, 울제이는 응천 입성을 망설이지 않을 테니.
장강 도하를 막는 자도 없었고, 응천을 둘러싼 키타이군의 소식이 들려오자 그나마 남은 병력도 도주하거나 항복을 선언했다. 울제이는 이번에도 항복한 이들을 받아들였다.
도시를 포위하기보다는 신속하게 입성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지만, 울제이는 여기서 약간 시간을 들이기로 했다.
응천을 외부와 단절시켜 혹시라도 모를 게레센제의 개입을 막고, 지방으로 나간 쿠데타 동조 세력의 반격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런 침착한 절차는 응천 시민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포격으로 민간인이 있는 시가지를 마구 짓뭉개지도 않고, 포로들을 학살하거나 교외 지역을 약탈하지도 않는다는 걸 충분히 입증했으니까.
교전으로 죽은 키타이군보다 군율을 어겨 총살된 키타이군이 훨씬 더 많을 지경이었다.
덕분에 응천 시민들은 조용하다. 그들은 왕궁을 둘러싼 몽골 지배자들의 소란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울제이는 응천에서 자신이 점령한 지역의 시민들에게 계속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것’을 권했다.
그들이 확성기에서 나오는 거친 한어를 믿든 안 믿든, 이런 방송을 하는 것만으로도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효과가 있으므로.
다만 이 시점에서 울제이에겐 한 가지 걱정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마지막 발악을 하겠다며 바이다르를 죽이고 자폭이라도 하는 건 아닐지.
혹은 바이다르를 데리고 비밀리에 응천을 탈출해버리는 건 아닐지.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항복한 쿠데타 정부 측 인사에겐 가택 연금 정도의 조치만 취했다. 심지어 그들이 자택이 아닌 한 장소에 모여 있겠다는 것도 허용했다.
“죽음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는 미친 인간은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응천 왕궁의 구조는 울제이도 철저하게 파악해두었다. 그건 세계대전의 응천 공략전 당시 전훈으로도 남아 있다. 이번에 끌어들인 키타이파 인사들이나 항복한 쿠데타 정권 인사들로부터도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도 혹시 모를 구멍이 없을까…… 형 게레센제가 낭키아스의 칸으로 있으면서 뭔가 손을 써두진 않았을까. 그런 걱정이 울제이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니, 설령 그런 비밀통로가 있다고 해도, 쿠데타군이 알았다면 진즉에 활용했을 터.”
지금까지 들어온 보고는 모두 바이다르가 궁에 남았음을 알려 온다. 즉, 파악되지 않은 비밀통로는 없거나, 있어도 쿠데타군은 활용을 못 한다는 뜻이다.
마침내 울제이는 응천 왕궁의 중심부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