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군작전(4)
“네. 금방이라도 우릴 여기서 철수시켜줄 줄 알았는데, 이쪽 제국입헌당과 협력해 볼로드 퇴진 여론을 조성하라니…….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어요.”
‘협력’이라고 해도 몽골 제국입헌당에게 주견하의 의도를 전하고, 칸발리크에서 일이 진행되는 걸 지켜보는 것뿐이다.
“저야 중장 각하와 달리 동명의 핵심부에 들어가 보진 못했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주견하 국장에게 뭔가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야 하겠죠. 하겠지만…….”
왜 계속 칸발리크에 주둔하고 있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몽골 제국입헌당이 탄압받는다면 나서서 지켜주라는 걸까? 아니, 그런 간단한 임무는 아닐 것이다.
효윤은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지만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손꼽히는 정예라는 정확한 판단을 할 줄 안다. 자신의 지휘 아래 있는 태주갑 이하 병력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의 병력을 계속 칸발리크에 체류케 한다는 건…… 그만한 작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
원래부터 꿍꿍이를 읽기가 힘든 애였지만, 이번엔 더 그렇다.
-볼로드 실각은 너무 이르지 않나?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해도, 볼로드는 몽골 내에서 루우의 카간 계승을 지지하는 사람 아니었나?
그렇기에 볼로드의 실각은 게레센제가 루우에게 카간 자리를 내놓고서야 생각해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볼로드가 실각해버리면, 칸발리크 내 루우의 지지 세력은 크게 약해진다. 그에 반해 게레센제의 권위와 권력은 공고해진다.
견하는 루우가 몽골 카간위를 잇는 데 가장 앞장선 사람 아니었던가? 견하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게레센제를 도울 이유는 없다. 그럴 사람은 아니다.
숨겨진 의도.
효윤조차 알지 못하는, 저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은밀한 움직임이 있다.
-어떤 황당한 명령이 내려오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마음 단단히 먹는 수밖에.
***
울제이는 처음에는 의아함을, 이후에는 섬뜩함을, 그리고 조금 더 지나서는 호승심을 느꼈다.
원래 낭키아스 출병은 대원철도주식회사에서 관리하는 신철도가 아니라, 기존의 구철도를 이용하려 했었다.
그런데 원철에서 먼저 키타이군의 수송에 적극 협력하겠노라고 제안해온 것이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걸 넘어서 이건…….”
이것이 울제이가 예상한 대로의 함정이라면, 고려는 응천 궁정에서 분란을 유도하는 한편으로 울제이의 발을 묶었어야 한다.
그런 방해를 예상하고 울제이는 빠른 기동을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고려는 오히려 울제이의 등을 밀어주는 쪽으로 움직였다.
혹시 물자나 병력을 원철의 신철도로 끌어들인 다음 빼돌리려는…… 수작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신철도로 수송된 모든 물자는 구철도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빠짐없이 남쪽 국경에 도착했다.
덕분에 키타이군은 회수대치 때는 뚫지 못했던 국경을 기습적으로 돌파, 다시 한번 원철의 도움을 받아 응천으로 진격 중이다.
당장 이 작전을 지휘하는 울제이도 낭키아스 영내로 들어와 있다.
“화하 특구에 주둔한 장해진뿐만 아니라, 형초, 파촉의 우흥섭도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다?”
덕분에 움직임이 한결 편해진 건 맞지만, 경계를 늦추진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테면 울제이가 응천을 장악하고 승리를 확신하는 그 순간에 저들이 상황을 뒤엎으러 진격해올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그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믿기지 않게도 고려가 끝까지 침묵을 지킨다면……?
화하, 형초, 파촉 특구의 주둔군은 말 그대로 해외주둔군이다. 그 전력이 강력한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주둔지역을 기반으로 장기전을 펼칠 여력은 없다.
그들이 한족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던 건 배후의 키타이와 낭키아스를 보급 기지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둔지의 치안 유지만으로도 바쁜데, 울제이의 측면에 전선을 형성할 여력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남쪽에서부터, 이를테면 보우슈엥의 협력을 얻어 고려 본국에서 보급을 끌어올 수 있다 치더라도…… 이러면 전선도, 보급선도 너무 길어진다.
해상 보급을 보호할 함대부터 동원해야 하고, 북동쪽 본토에서도 병력이 움직여야겠지.
그런데 그러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상황이 ‘전면전’으로 흘러간다.
정치적 격변, 정도로 끝내고 싶은 고려로선 피해야 할 상황이다.
고려는 몽골뿐만 아니라 다이온 전체를 ‘온전히’ 집어삼키고 싶어 한다.
그것은 다이온 정책을 추진하는 고려 정치인들의 욕망이기도 하고, 더는 경제를 악화시킬 수 없다는 현실의 요구이기도 하다.
당장 울제이 본인이 상황을 그렇게 끝내고 싶어 하니까, 확신한다.
그럼 여기서 고려의 ‘다른 의도’를 추리해내야 한다.
고려는 왜 울제이의 행동을 돕는가?
최종적으로 다이온 전체를 집어삼키고 싶어 한다면, 울제이가 낭키아스를 장악하도록 내버려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칸발리크에서 전해진 소식 하나가 그 답이 되어 주었다.
“몽골 제국입헌당을 비롯한 범좌익이 움직였다?”
그 구호가 흥미롭다. 근왕세력을 자처했다니.
“형님 카간께선 그런 행동을 용인하고 계시고?”
볼로드를 끝장낼 셈이시군. 단번에 의도를 파악한다.
하지만 자신이 게레센제였다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몽골 제국입헌당의 배후에는 고려가 있다고 보는 게 옳다.
그들을 고려에서 떼어내어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삼으려는 발상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울제이는 그보다는 볼로드와의 타협을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는 형님부터 탈락시킬 생각이니까.”
울제이는 낭키아스와 바이다르를 무력화하고, 고려는 볼로드와 게레센제를 무력화한다.
그렇게 해서 삼자 대결 구도를, 양자 대결 구도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종결전까지는 일직선이다.”
이젠 모든 상황이 멈추지 않고 끝을 향해 갈 것이다. 게레센제가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면 이전과 같은 소강상태는 없을 것이다.
그대로 누가 최후의 승자인지, 판가름 나겠지.
“즉, 나 역시 낭키아스에 묶어 둘 심산이군.”
울제이가 낭키아스를 장악하는 동안, 고려는 칸발리크를 장악하고 게레센제의 신병을 확보한다.
장해진과 우흥섭, 두 고려 장군이 움직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계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 후방에서 울제이의 시선을 끄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특히 우흥섭. 그가 응천에서 빼낸 고려파 정치인들이 바로 미끼다.
-고려가 이들을 이용해 응천을 장악하려 들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이걸 어떻게 할까 골몰하는 사이 고려는 칸발리크에 입성해 게레센제의 퇴위를 준비하겠지.
“그렇게 둘 순 없다!”
결론은 나왔다. 안 그래도 신속한 울제이의 행동은 빨랐다.
“즉각 예비대를 칸발리크 방향으로 돌린다. 칸발리크 내부 협력자들의 공작도 한 단계 더 발전시킨다!”
낭키아스와 칸발리크, 둘 다 놓치지 않겠다.
“쿠릴타이를 연다. 나의 쿠릴타이를! 쿠빌라이 카간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자신은 쿠빌라이 카간이 될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아릭 부케가 되진 않을 것이다.
***
칸발리크의 상황은 기묘하게 흘러갔다.
볼로드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격화됐다.
게레센제 입장에서는 반길 일이다.
이미 울제이가 낭키아스 북쪽 국경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괜히 울제이를 역적으로 선포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울제이가 응천에 입성하기 전에 볼로드를 궁지에 몰아넣어 퇴진시키고, 낭키아스 정권을 승인해 울제이를 물러나도록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다만 ‘기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은, 격화된 시위가 마치 칸발리크 경찰의 ‘폭력적 진압’을 바라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
시위라는 것은 원래 어느 정도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충돌 대부분은 양측 모두 자제하며 ‘불운한 사고’ 정도로 마무리된다.
보통은 이미 시위를 주도하는 쪽에서 경찰과 이야기해두었기 때문이다. 누가 전면에 서고, 어디까지 나아갈지 합의가 다 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니 합의가 어긋난 사태가 발생해도 시위대와 경찰 모두 ‘무난한 뒷수습’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위대의 태도가 완전히 돌변했다.
모든 방면의 시위가 적대적으로 변했다.
합의가 이행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시위의 ‘평화적 합의’라는 것 자체가 사라졌다.
경찰의 피해가 속출했고, 당연히 그 이상으로 시위대의 피해도 나왔다.
이것이 일종의 ‘계략’임을, 볼로드는 모르지 않았다.
경찰이 피해를 보든, 시위대가 피해를 보든 모든 화살은 볼로드에게 쏟아진다.
시위대야 당연히 시민을 공격한 볼로드의 악을 규탄할 것이다.
경찰 또한 제대로 된 대의명분이 아니라 볼로드 개인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희생당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신문 기사가 나가도 볼로드는 대처하기 어렵다.
언론을 입단속 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는 카간이 아니라 타이시. 아무리 권력이 강해도 강할 뿐 절대적이진 않다.
볼로드가 할 수 있는 건 이 ‘도발’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찰 조직을 확고히 통제하는 것이지만…… 내무성이 파업까지 벌이며 볼로드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잘될 리가 없다.
오히려 경찰 쪽에선 이 도발에 넘어가 주거나, ‘볼로드가 아닌 시민 편에 설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자들까지 나왔다.
헌병대를 대신 들인다는 아이디어야 당연히 전쟁성에서 어깃장을 놓았으니 실행될 수 없다. 그리고 군까지 움직이는 것은 카간이 직접 가로막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대볼 수 있는 건, 고려 황제 루우 테무르의 개입. 외세의 힘으로 태사 자리를 유지한다는 게 무척 굴욕적이긴 했지만, 굴욕이야 어디 한두 번 겪어본 일인가.
굴욕을 겪고 난 다음 일어서는 게 중요했다. 볼로드는 그런 사소한 진리를 깨우친 사람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침묵했다.
침묵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이 상황을 반기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몽골 제국입헌당에 고려의 입김이 미친다는 것이야 천하가 다 아는 사실.
그런 그들이 카간의 친위 세력을 자임하며 볼로드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합류했다.
배신감이 가슴에 휘몰아친다.
-미리안…… 마음에 들지 않는 짓거리만 한다 싶더니 결국 황제의 마음을 돌아서게 했는가.
마침내 카간의 부름을 받았을 때, 볼로드는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황궁에 들어섰다.
“그대가 물러나야겠네.”
담담하게, 아주 당연한 것을 말한다는 듯 카간은 볼로드의 사직을 권했다.
그는 볼로드의 얼굴도 보지 않는다. 등을 돌린 채 창밖의 정원을 응시하고 있다.
그냥 해고 통지였다. 게레센제는 볼로드가 물러나는 것 말고는 대안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저 뒤통수 너머 얼굴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통쾌한 웃음을 감추고 있을까, 아니면 볼로드에겐 그럴 만한 가치도 없다는 경멸을 드러내고 있을까.
“형님께서 세상을 버리시고 난 후, 미루고 미뤄왔던 청구서가 비로소 도착한 것일세. 그렇게 받아들이게나. 그래야 속이라도 편할 테니.”
정말 그럴까.
이것이 볼로드의 몰락인가.
볼로드가 역사에 남길 마지막 행적인가.
볼로드는 여기서 결국 쓸쓸히, 낙향할 사내인가.
“……알겠습니다. 물러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