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군작전(3)
거기까지 들은 볼로드의 노성이, 쿠릴타이 회의장을 울렸다.
“닥치시오!”
누군가 그의 거친 언동을 비난하기 전에, 지난 세월 관료의 정점으로 군림해온 거인의 그림자가 쿠릴타이 회의장에 드리웠다.
“나는 당신들과 달리 내가 그때 무슨 일을 했고, 당신들 말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시시콜콜 따지진 않겠소! 물러나라면 물러나지. 그럼 누가 타이시가 되겠소?”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묵직한 침묵이 회의장을 짓눌렀다. 볼로드는 냉소를 감추지 않았다.
소인배들. 그럼 한번 나서보라고 소리쳤더니 꼬리를 말고 마는 비굴한 떠돌이 개들.
자신을 비난하고 추락시키고는 싶지만, 정작 이 사태의 책임을 지라면 누구 하나 나서서 ‘내가 지겠노라’ 외치지 못한다.
기대에 못 미쳐서 죄송하다, 한 번 더 기회를 달라, 믿어달라고 했다면 자신의 목줄기를 물어뜯었을 비렁뱅이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도, 방법도 명확하오.”
볼로드 또한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그 후로도 숱한 위기를 거쳐 온 사내다.
모두가 잊고 있던 지도력이 새삼 빛을 발한다.
“즉각 응천으로 출병, 역적을 징치하고 바이다르 칸을 구출하는 것이외다.”
그대로 두었다면 볼로드를 흔들려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볼로드의 카리스마가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었을 테지만,
지금 카간은, 시레문이 아니었다.
“……휴회를 선언하노라.”
보통은 의회의 뜻을 존중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을 카간이 입을 열었다.
일단 그가 입을 열면 어떤 논의가 진행 중이었든 간에 의원들은 입을 다물고 카간의 옥음을 들어야만 한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행위다. 그러나 의회의 권한을 크게 훼손할 염려가 있어 군주의 미덕으로 권장되지 않는 일이다.
쿠릴타이야 원래 카간이 주관하는 회의에서 의회제도를 받아들이면서 변화한 것이라, 카간의 이런 개입도 마냥 이상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하지만 쿠릴타이를 서구의 의회처럼 바꾸기 위해 선대 카간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카간, 게레센제 카간의 아버지이기도 한 분까지 노력해오시지 않았던가.
쿠릴타이 회의장을 떠나는 게레센제를 향해 모든 의원이 예를 갖춘다.
게레센제의 갑작스러운 개입, 휴회 선언은 모두의 마음속에 적지 않은 충격을 남겼다.
충격은 금방 ‘다음 수’에 대한 계산으로 이어졌다.
***
게레센제는 따로 자신의 측근들, 이른바 ‘친위 세력’을 불러 모았다.
“볼로드의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폐하에 이르기까지 2대, 관료로서는 호오샤이 카간 이래 3대를 섬겨온 자답습니다.”
호오샤이 카간. 시레문, 게레센제, 울제이 삼형제의 아버지다.
서쪽에선 루스인 개척자들이 몰려와 울루스의 북방까지 휘젓고, 인도양 남서쪽을 돌아 들어온 브리튼과 에스파냐는 무굴 제국을 유린하던 시절.
서양의 배가 발해만을 기웃거리고, 그 사절단이 칸발리크에 들어와 개항을 요구하던 시절.
자유로운 무역이라는 저들의 허울을, 불안과 의심 속에서 지켜봐야 했던 아버지, 호오샤이 카간.
그가 평생에 걸쳐 개혁의 기반을 닦았기에 시레문의 승리도, 산업화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 호오샤이 카간의 방침을 수십 년 만에 거스르며, 억지로 쿠릴타이 휴회를 선언했다.
게레센제가 그런 억지를 부린 이유는, 볼로드의 기세에 모두가 말려들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두면 모두가 볼로드를 비상시국의 재상으로 옹위할 기세였지.”
“볼로드는 바이다르 칸을 구출할 작전을 지휘하려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게레센제도, 그의 친위 세력도 바라지 않는 전개다.
게레센제의 친위 세력. 이들은 낭키아스에서 게레센제르 따라 칸발리크로 올라온 자들이다. 뿌리를 따지고 보면 낭키아스에 남은 관료들과 동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로선 낭키아스에서 일어난 쿠데타를 반역이라 간주할 이유가 미약했다.
오히려 토호들과 연합한 ‘잔류파’ 동료들의 주장대로, 이를 바이다르를 위한 친위 혁명으로 볼 여지도 있었다.
고려에 빌붙는 자, 울제이를 끌어들이려는 자들을 제거하고 바이다르 칸의 권위를 확립한다는 게 그들의 명분이다.
굳이 그 명분을 부정할 필요가 있는가?
게다가 이들 앞에는…….
“낭키아스 ‘과도 정부’에서 은밀히 카간께 상소를 올려왔지요.”
“우리는 카간과 다이온에 반역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바이다르 칸을 능멸하려던 간악한 무리를 벌했을 뿐이다……. 예상했던 대로군.”
상소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충성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응천의 과도 정부는 바이다르 칸을 홍타이지(皇太子), 즉 태자로 삼으라는 상소도 함께 올렸다.
마치 게레센제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이다.
-바이다르를 태자로…….
바이다르를 낭키아스의 칸으로 봉한 시점에서 루우 테무르를 견제하겠다는 의도는 이미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태자’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루우 테무르의 눈치를 보고 있음도 드러난다.
바이다르를 태자로 봉하는 건, 루우 테무르를 확실히 카간위 경쟁에서 따돌렸을 때.
게레센제가 확실히 다른 황족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때.
그때에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렇게 막연히 생각만 해왔다.
그런 게레센제 앞에, 낭키아스의 쿠데타 세력은 명분을 내밀어 주었다.
게레센제의 직계 자손으로 이어지는 왕조의 수립. 자신을 중시조로 한 보르지긴 가문의 새로운 국면. 가슴을 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카간께서 저들의 정부를 승인해주시기만 해도, 쿠데타는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참모의 말에 게레센제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볼로드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지.”
“울제이 칸의 진격도 가로막을 수 있고 말입니다.”
이것이 게레센제가 볼로드의 기세를 막아선 이유다.
볼로드가 타이시 자리를 지켜내고, 그대로 카라코룸 정부를 채찍질해 낭키아스 과도 정부에 대한 정벌을 지휘한다면, 낭키아스 ‘토호 연합’은 반역자가 되고 만다.
일단 한번 반역자가 된 무리는 아무리 게레센제 카간이라 해도 복권하기 어렵다.
역적 토벌이라는 중대한 과제 앞에서 볼로드 퇴진의 목소리는 잦아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게레센제 카간은, 일단 휴회를 선언하여 시간을 벌기로 했다.
“다만 쿠데타 정권을 승인하는 일은…… 시간을 들이실 문제가 아닐지…….”
“음.”
게레센제는 끄덕였다. 당장 낭키아스 과도 정부를 승인하면 그걸로 일은 끝난다.
문제는 일이 끝나고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울제이가 자기 영지의 칸으로 계속 남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볼로드 퇴진의 목소리도 쿠릴타이에서 기세가 한풀 꺾였으니 그도 자리를 지킬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번 일을 교훈 삼아 황정회의 내부 단속에 나서겠지.
“볼로드…….”
타이시는 카간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카간 개인이 아니라 몽골 국가에 충성한다고.
볼로드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그의 진정한 충정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면 게레센제는 카간으로서 권위를 드높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것은 보장되지 않은 미래다.
볼로드의 저울에는 게레센제만 올라간 것이 아니기에.
안정성. 확실하게 보장된 카간의 권력과 권위. 그것을 얻으려면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
“타이시 볼로드를 실각시킨다.”
“메시지는 황정회 일파에 확실히 전해졌을 겁니다.”
-카간께선 볼로드가 정국을 주도하는 걸 원치 않으신다!
이번 휴회 선언으로 그 점은 황정회 내부 볼로드 반대파에게 확실히 전해졌을 것이다.
“볼로드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는 시점에, 낭키아스 과도 정부를 승인한다.”
방침은 그렇게 정해졌다.
문제는, 시간.
볼로드의 실각까지 과연 얼마나 걸릴 것인가.
그리고 그전까지, 울제이는 얼마나 빨리 움직일 것인가.
***
게레센제의 계산은 주어진 정보만을 놓고 보면 충분히 합리적이었지만, 몇 가지 악수를 두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추가적인 정보야 얻으려면 충분히 얻을 수 있었겠지만, 게레센제는 낭키아스에서 일어난 정변을 칸발리크 정세에 활용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조금 더 낭키아스의 상황에 주목했다면, 그 정변이 일어난 전후 사정을 파헤쳤다면 ‘고려’의 행보가 뭔가 수상하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터.
또한 황정회의 ‘볼로드 반대파’에 대해서도, 이들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볼로드를 실각시키는 데 이용하자는 계산만 했다.
칸발리크의 세력 구도만 보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카간은 볼로드 반대파의 배후에 울제이의 공작이 있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친위 세력들과 함께 한 회의 직후 펼쳐진 상황이 게레센제의 마음에 쏙 들었던 탓이 컸다. 게레센제는 자신의 계산대로 되어간다고 느낄 수밖에.
“전쟁성, 내무성 관료 일동은 더는 이런 정부수반의 지시를 받아들일 수 없는바, 이에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전쟁성 및 내무성에 포진한 울제이 지지 세력의 파업. 쿠릴타이에 이어 행정부에서도 반(反) 볼로드의 목소리를 드높인 것이다.
카간의 묵인 및 행정부 관료들의 행동에 용기를 얻었는지, 황정회에선 다시 볼로드 퇴진을 꺼내 들었다.
이번엔 조직된 시위와 함께였다.
“타이시 퇴진!”
“볼로드는 물러나라, 물러나라!”
여기에 더해, 의외의 세력이 이 정국에 등장했다.
몽골 제국입헌당이었다.
이들이 외치는 구호 역시 타이시 볼로드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었으나, 한 가지 구호가 더 붙었다.
“카간께서 친히 통치하소서!”
만약 몽골 제국입헌당이 볼로드의 퇴진만 외쳤다면, 게레센제는 배후에서 고려가 움직이진 않는지 의심했을 것이다.
칸발리크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려는 고려 제국입헌당의 음모는 아닌지, 하고.
하지만 몽골 제국입헌당이 내세운 구호는 ‘존황(尊皇)’의 깃발이었다.
“현 몽골의 정국을 살펴보면, 선대 시레문 카간이 산업화를 주도했듯 게레센제 카간께서 입헌 개혁을 주도하셔야만 한다!”
볼로드도, 황정회도 개혁의 의지는 없다. 몽골 제국입헌당으로 대표되는 범좌익 세력이 의존할 사람은 오직 카간 뿐이다. 그들은 그런 논리로 근왕세력을 자처했다.
아첨에는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게레센제지만, 스스로 아첨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역량이 충분하다 자부하기도 했다. 그래서 게레센제는 몽골 제국입헌당을 이번 정국에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물론 몽골 제국입헌당이 정말로 게레센제에 대한 충성심이 넘쳐나서 저런 구호를 내놓은 것은 아니다.
아직 칸발리크에 체류 중인 최효윤과 부하들이, 몽골 제국입헌당과 접촉한 결과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
혼잣말로 푸념을 늘어놓는 효윤을 보며, 태주갑은 물었다.
“주견하 국장 말씀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