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군작전(2)
낭키아스 정계의 균형은, 우흥섭이 이끄는 고려군이 빠져나가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더는 우흥섭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몸을 사리지 않아도 될 테니, 누군가는 ‘과감한 결단’이라며 행동에 나설 것이다.
즉, 본국은 일부러 응천 궁정 내 혼란을 유도할 셈이다.
이미 낭키아스의 정국을 장악할 야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 사이에, 그 야심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응천 궁정 내 고려파를 ‘탈출’ 시킨다는 표현만 봐도 이는 명백하다.
“준비하도록.”
짧은 한마디 말로 참모들을 해산시켰지만, 씁쓸함은 영 가시지 않았다.
우흥섭은 소년 칸 바이다르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여겼다. 그것은 조국인 고려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태사와 소년 사이의 약속을 증거하는 행위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본국의 명령 한마디에, 군인 정신이고 사내다움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소년을 전장 한복판에 버리고 퇴각해야 한다니.
바이다르는 자신이 주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인형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열넷이면 알 나이긴 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대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건 그저 자신의 비열함에 던져주는 싸구려 변명이 아닌가.
“목숨이 위험하진 않겠지만…….”
누구든 바이다르의 목숨을 앗아간다면 다이온의 모든 정치세력이 등 돌릴 것이다. 민심도 달아나겠지.
바이다르가 자질이 있고 없고와는 별개로, 누가 무고한 열네 살짜리 소년을 살해하는 걸 용납하겠는가.
다만 고생은 꽤 할 것이다. 누가 먼저 응천의 정국을 주도하든, 다른 한편에선 그 주도권을 빼앗으려 할 테지.
“우리 고려는 그 틈을 타 정국 탈환을 노리는 건가.”
응천의 고려파를 함께 탈출시키라는 명령은, 향후 그들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노리라는 뜻일 것이다. 한 번 혼란이 휩쓸고 지나간 응천에서 바이다르를 옹립하고 고려파 정권을 수립시키게 되겠지.
지지 세력이 될 수도 있었던 친려파를 싹 쓸어버린 신수덕보다는 낫지만.
“……군인이 이런 정치적 격변까지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니.”
슬픈 시대다.
세계대전 시기도 물론 슬픈 시대였지만, 그때는 훨씬 단순했다.
애국심. 명민한 전략. 전술적 판단. 군인 정신. 딱 그만큼만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것은 우리가 그토록 증오했던 침략전쟁의 일종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뒤통수로 기어 올라왔지만, 우흥섭은 애써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장까지 올라와서도, 그 계급을 걸고 이의제기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비겁함을 비웃으면서.
***
“화하 특구의 장해진과 고려군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계를 늦춰선 안 됩니다. 사중 전선의 위협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참모들의 의견대로다. 울제이가 남쪽으로 움직이는 순간 서쪽의 화하 특구 주둔 고려군, 북쪽의 형 게레센제, 동쪽의 고려가 한꺼번에 울제이를 치러 움직일 것이다.
다이온의 균형은 현재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
아니, 유지되고 있었다.
우흥섭을 비롯한 낭키아스 주둔 고려군이 응천에서 철수하고, 고려파 정치인들도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기 전까지는.
-다른 정파를 도발하려는 얕은 수작!
울제이와 그 참모들은 단숨에 그런 결론에 도달했지만, 낭키아스의 토호 연합 파벌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레센제에게서 버림받았다 판단한 ‘잔류 귀족’들과, 낭키아스 현지에서 이권을 지키려는 토호들의 연합은, 이러한 정세 변화를 기회라 여긴 듯하다.
그들도 아주 미련한 사람들은 아니니 ‘뭔가 있다’라는 것쯤은 짐작했겠지만, ‘함정의 가능성’과 ‘정권 장악의 기회’를 저울질하다 후자를 고른 모양이다.
일단 정권을 장악하고, 제대로 굳히는 데 성공한다면 외부의 다른 음모로부터 정권을 지켜내는 게 가능하다고 내다보았겠지.
아니면…… 조급함인가.
울제이를 등에 업은 키타이파가 먼저 정권을 노릴 것이라는 조바심. 그게 토호파를 움직이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토호파는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장교들을 동원, 응천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뜻을 같이한다, 표면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상은 토호와 잔류 귀족 가문에서 배출한 장교들이, 친인척의 뜻을 따른 것에 불과하다.
“흘러간 상황을 보면, 29년 고려 내전 초기의 상황과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또 다른 참모의 보고에 울제이는 상쾌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담에 씩 웃었다.
미리안의 이른바 ‘친위혁명’은 여기서도 일종의 모범 사례가 된 건가.
군인들을 보내 착실하게 방송 시설, 신문사를 장악하는 한편으로, 왕궁을 비롯한 중심지를 습격해 요새화한다.
칸 바이다르의 신병을 확보했음은 물론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재계 인사들이 허동주에게 넘어가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던 미리안과 달리 경제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일까.
애초에 각종 기업뿐만 아니라, 지방의 농촌까지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이 토호파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돌아간 탓에 울제이도 아주 곤란하게 됐다.
정권과 언론을 장악한 이후, 토호파의 영향력은 빠르게 전국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키타이파의 정치 활동은 소멸하고 만다.
이런 쿠데타 세력이 늘 그렇듯이,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곧장 이어졌다. 언론을 장악했으니 반대파의 목소리는 응천 시민들에겐 닿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외부에서 온 지배층인 몽골인들 사이의 싸움.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 민중은 이 싸움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오히려 토호 중에 한족의 비율이 높아 민중의 지지를 얻기는 더 쉽다. 잔류 몽골 귀족들, 토호화한 몽골인들 또한 비교적 한족들과 친하다.
키타이파가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외부의 울제이 칸뿐.
“움직일 수밖에 없나……!”
낭키아스 내 자신의 지지 세력이 소멸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칸이시여, 명분은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폭도들의 손에 납치된 조카를 구출한다는 명분이 하나.
다이온 입헌 개혁에 반기를 드는 반동들을 처단한다는 명분이 하나.
몽골의 지배를 무력화하고 한족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토호들의 음모라는 명분이 하나.
출병을 위한 명분은 이 정도로 이미 충분하다.
“문제는 이런 명분은 다른 두 보르지긴도 쓸 수 있다는 거지.”
루우 테무르는 사촌 동생을 구하기 위해, 게레센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들을 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설 수 있다.
“다른 두 분을 묶어둘 방책을…… 써야 합니다.”
‘마련해야 한다’가 아니다. 방책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 참모는 ‘써야 한다’고 말했다.
황정회, 그 내부의 울제이 지지 세력.
몽골 정부 관료들 사이에 심어둔 울제이 지지 세력.
이 둘을 활용해…… 칸발리크에서 혼란을 일으킨다.
“고려 쪽에선 우리가 낭키아스로 머리를 돌릴 거라는 예상은 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이 상황 자체가 고려인들의 계산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낭키아스로 향한다. 울제이의 그런 행동을, 고려는 유도하고 있을 것이다.
넘어가 주지 않을 순 없다.
그러니 넘어가 주면서, 고려인들이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일으켜야만 한다.
그것이 칸발리크에서 일어날 혼란.
싸움은 속도전이 된다. 루우 테무르와 게레센제 모두 칸발리크의 일로 발이 묶인 사이에 응천을 장악하고 바이다르의 신병을 확보해야 한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리라는 각오를 해야겠지.
“……행동에 나선다. 선전전도, 출병도, 칸발리크와의 연락도. 즉각 개시한다!”
***
황정회의 울제이 지지파는 비밀리에 회합을 열었다.
낭키아스 사태가 칸발리크에 전해진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내일 있을 쿠릴타이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논의를 시작했다.
몇몇 의원들은 동원 가능한 하부 조직들과 접촉, 황궁 밖에서 해야 할 행동 방침을 전달했다.
그 모든 밑 작업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열린 쿠릴타이에서 황정회는 곧바로,
볼로드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를 악물면서, 볼로드는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노한 기색을 밖으로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당했다.
바라트 문제, 대원철도주식회사 사업과 루우 테무르의 즉위 문제에 완전히 정신이 팔렸었다.
그러느라 그의 발밑에서 적들이 함정을 파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칸발리크 정계 최대 세력인 황정회가 그를 지지하는 만큼, 방심했던 것도 있다.
아니, 지지받는다고 착각했다.
-이 자들이 이념으로 뭉친 정당이 아니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건만…….
배후는 어디지? 울제이? 게레센제? 아니면 자신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누군가일까? 혹시 루우 테무르나 미리안이 배신했나?
그게 누구든, 볼로드의 쓸모는 다했고 이제 없애버려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음이 분명하다.
쿠릴타이를 주관하는 게레센제 카간은 어좌에 앉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사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타이시는 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규탄하는 말이 고막에 아프게 와서 꽂힌다.
“모든 몽골인은 그의 무능함을 참고 견뎠습니다. 몇 번이고 기회를 주면서, 타이시의 사정을 이해해주려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볼로드 타이시는 그 자비에 어떻게 보답했습니까? 비상시에는 일관된 정책이 필요하다는 변명만 일삼으며, 자기 자리를 지키기밖에 더했습니까?”
그 말에 동의하는 목소리와 반대하는 목소리가 겹쳐 소음이 된다.
반대하는 쪽이 다소 약하다.
그럴 수밖에.
다시 한번 실감한다. 황정회는 자신의 지지 세력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끄는 정당도 아니었고. 황정회는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볼로드를 골랐을 뿐.
그렇기에 황정회의 절반이 볼로드에게 반기를 들자, 남은 절반도 적극적으로 이에 반대하진 않는다.
어떤 이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를 보면서 침묵하고, 또 어떤 이는 벌써 저쪽으로 넘어갈 생각을 한다.
아예 황정회는 침몰하는 배라고 단정 짓고, 몽골 제국입헌당으로 넘어가거나 게레센제 카간의 친위 세력에 합류할 계산을 하는 자도 있겠지.
“선대 카간께서 세상을 버리셨을 때, 칸발리크가 불타오를 때 타이시가 한 일은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본인이 나서서 해낸 일은 없습니다!”
“비극적인 내전도 충분히 막을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불순분자들이 날뛰고 칸발리크까지 스며드는 동안 그는 위기에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애초에 위기가 다가온다는 걸 알아차리긴 했을까요?”
“울루스의 존경받는 기둥들이시여, 만약 볼로드 타이시가 우리와 같은 사람 중 하나였다면 우리는 그의 책임을 이토록 엄중히 묻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타이시는 지금까지 일어난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한족 반란은 어떻습니까? 이는 세계대전 이후 타이시가 주도해온 한족 정책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사건 아닙니까?”
“애초에 선대 카간의 탈출 방법으로 왜 비행선을 고집한 겁니까? 선대 카간께 일어난 비극에는 타이시 당신의 책임도 있어!”
“지금까지의 무능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바이다르 칸이 납치되는 지경에 이르렀잖습니까! 물러나시오, 볼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