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94화 (394/541)

사냥(13)

결국 항복을 선언한 건 사제 쪽이었다.

“그전까지는 보나파르트 황가나 엑스라샤펠의 정부를 적당히 압박할 구실 정도였습니다만, 아즈텍 내전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때부터는 ‘정말로’ 독립을 지원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아즈텍 내전의 어떤 요소가 교종청이 지상에 신의 왕국을 건립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했지?

“전하께서도 들으셨는지요. 아즈텍 내전에, 파멸인이라는 괴물이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소식.”

“……예.”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류의 멸망을…….”

“인류의 존속을 정말로 걱정하시는군요.”

약간의 비아냥을 담은 대답이다.

이들에겐 신 외에는 중요한 것이 없지 않았던가? 신의 뜻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삶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는 집단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교종청은 인간도 무척 중시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앙’할 수 있는 인간의 존재를 중시하지요.”

“좋습니다. 교종청의 진실된 의도를 믿기로 하죠. 하지만 그게 신성 제국의 정세와 무슨 상관입니까? 오히려 신성 제국이라는 큰 틀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더 많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말씀도 옳습니다. 교종청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신성 제국은…… 단순히 아즈텍 대륙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내전에 개입한 게 아닙니다. 엑스라샤펠 정부에는 지금도 파멸인 관련 보고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검이라는 그 집단은 참으로 놀라운 정보력을 지닌 모양이다.

황자는 귀국하면 베드로의 검 조직원을 색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어딜 가나 첩자가 넘치는 세상이라지만, 그렇다고 정보가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아예 손 놓고 있을 순 없으니까.

“신성 제국 정부는 파멸인 문제에 대응할 의지도, 역량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적들도 쓰는 병기를 자신들도 쓸 수 없을까, 하는 수준의 궁리만 하지요. 하지만 전하께서도 칸발리크 사태를 통해 아시는 것처럼…….”

“……파멸인이 창궐한 곳에는 그 핏빛 괴물체가 나타날 수 있다.”

사제는 끄덕인다.

“정확한 인과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파멸인의 대량 발생과 그것이 관련되어 있음은 어린아이라도 추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파멸인을 전장에서 병기로 활용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보시는 거군요. 그…… 멕시카 자주국이든 신성 제국이든.”

“인류 전체에 위험합니다.”

사제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벨리사리오스는 이미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토칸이 하려는 일의 위험성은 이미 인지하고 있다.

토칸이 어디까지 나갈지가 문제지만, 통제할 방법은 마련해두었다.

“그러던 중에 하필 이곳 로마시에서 파멸인이 출현했다……. 교종청에서 민감하게 반응할 법하군요.”

“당장은 신성 제국의 행정기관과 협력해 물리치긴 했습니다만, 신성 제국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확신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신성 제국은 여전히 파멸인의 활용에만 골몰했나 봅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신성 제국 정부는 세계대전이라는 참극까지 겪었으면서, 여전히 인류의 존속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니, 신성 제국만 탓할 일은 아니겠지요.”

브리튼과 에스파냐, 칼마르도 마찬가지다. 아즈텍 대륙의 내전에 개입한 모든 나라가 전쟁을 통해 얻은 신기술의 군사적 활용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아마, 로마 제국도.

“교종청은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세속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고민은 있습니다만, 뒤로 물러나 세속 군주들에게 ‘권고’만 해서는……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회의감이 높아져만 가고 있죠.”

“그래서 지상에 신의 왕국을 세우겠다?”

“적어도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늘어날 테니까요. 군대, 영토, 인구, 외교 석상에서의 발언권……. 세상과 인류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일에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로마의 황자인 저더러 도와달라는 거군요.”

“전하께 손해가 되는 일은 아닐 겁니다. 아니, 오히려 전하께 좋은 일이지요. 이런 말씀을 올리게 되어 황공합니다만…… 유스티니아노스 5세 폐하의 태양은 저물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사제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우리를 지원해라. 그러면 우리도 너를 돕겠다.

이탈리아를 신성 제국에서 떼어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너는 로마 제국의 영웅이 될 수 있지 않나?

형들을 제치고 황위에 오를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황자를 속여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조건이 더 갖춰져야 할 것 같소만?”

“물론 교종청을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가 독립 후에 바로 로마 제국에 합류하는 건 어렵겠죠.”

“독립은 교종청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분명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연대로 이루어질 테지요.”

그들 중 몇몇 그룹은 벨리사리오스가 지원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예. 그렇기에 설령 이탈리아가 로마 제국에 합류하더라도 충분한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상을 꽃피울 시간 말이지요. 이를테면 ‘로마인 내셔널리즘’이라든가.”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교종청의 주도권을 잃고 싶지도 않겠지. 나에게 통제권을 넘긴다면서 그에 상응하는 걸 요구할 생각이잖습니까?”

“물론입니다. 우리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네 개 총대주교구에 관한 교종 성하의…… 로마 총대주교의 수위권을 재확립하길 원합니다.”

로마 총대주교, 즉 크리스트교 교종의 수위권.

로마 총대주교와 콘스탄티누폴리 총대주교, 서방 교회의 동방 교회의 대립으로 무너졌던 ‘교종 중심의 통합된 교회’를 다시 한번 세워보겠다는 말인가.

이러한 발상이 시도된 적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의 문턱까지 갔던 시절, 제국의 황제가 크리스트교권 전체의 우두머리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서방 세계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던 시절에 그랬다.

그간 지켜왔던 동방 교회,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누폴리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서방 교회의 교종에게 고개를 숙였었다.

그 결과는…… 로마 제국 내부의 분열. 서방 크리스트교권의 도움을 받으려 했던 당시 황제의 판단이 얼마나 옳았든, 로마 시민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른바 ‘라틴 제국’이라는, 콘스탄티누폴리를 짓밟고 건설된 야만인 제국을 향한 원한은 씻어내기 어려웠으니까.

그렇게 약화된 제국은 투르크인들의 공세에 멸망 직전까지 갔다.

티무르 칸이 오스만 일족을 몰살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 후 당연히 동서 교회 통합도 함께 흐지부지되었다.

“위험한 제안이군요. 아니면 교종청의 위험한 야심이라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까요?”

“물론 예전에 시도된 것과는 다른…… 신중한 절차가 필요하겠죠. 오늘날 우리는 ‘언론의 힘’을 빌릴 수 있지 않습니까?”

“뭐, 교종과 콘스탄티누폴리 총대주교, 두 분 성하가 함께 손을 잡고 ‘형제’로 하나 됨을 축복하는 사진이라도 찍는다면 옛날에 비해선 수월하겠죠.”

“당연히 1054년의 상호 파문도 일종의 ‘오해’이자 ‘사고’로서 철회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과는 상황이 달라진 요인이 한 가지 더 있다.

방금 사제도 이야기했지만, ‘로마인 내셔널리즘’으로 인한, 제국인들의 이탈리아를 향한 관심은 천 수백 년 만에 고조되고 있다.

서유럽이 콘스탄티누폴리를 짓밟고 라틴 제국을 건설했던 일은 이미 수백 년 전 이야기가 되었다. 오히려 근대 이후로는 나폴레옹의 신성 제국과 협력해온 경험이 사람들의 뇌리에 더 강하게 남아 있다.

즉, 옛 원한은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종교적으로는 민감한 문제긴 해도 ‘로마인의 이탈리아 수복’이라는 이슈로 덮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게다가 ‘통합된 교회’는 교종청만의 이익은 아니다.

정치 지형의 변화에 ‘통합된 로마’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교회를 내셔널리즘의 기수로 세울 수 있다면 로마 제국, 벨리사리오스에게도 큰 정치적 이익을 안겨 주리라.

하지만 벨리사리오스는 여기서 순순히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일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신종의 연구 결과 공유’, ‘동서 교회 통합’을 조건으로 내놓았다면, 자신도 하나를 더 받아야 한다.

“‘베드로의 검’. 언제라도 제가 필요할 때 베드로의 검을 빌릴 수 있는 권한. 그거면 공평한 거래가 될 것 같습니다만.”

사제가 눈을 크게 뜬다.

‘만약’을 대비해서 요구하는 게 아니다.

벨리사리오스 황자는 베드로의 검이 ‘반드시 쓰일 상황이 있기에’ 저런 요구를 해오는 것이다.

그게 대체 뭘까.

그런 조건으로 거래에 응할 것인가, 아니면 결렬을 선언할 것인가.

어쩌실 겁니까, 하고 묻는 듯한 청년의 눈동자.

사람 같지 않은 보랏빛 눈동자가 대답을 기다린다.

“좋습니다.”

한숨을 내쉬듯 사제는 대답했다.

“자세한 사항은 따로 논의를 이어나가야겠지만, 큰 틀은 그 정도로 하죠.”

***

제국정보사령부는 며칠 전부터 복잡한 표정으로 업무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다른 제복’을 걸친 인간들, 그것도 무장한 인간들의 감시를 받으며 일하는데 표정이 좋을 리가 없다.

게다가 정보사령부는 바로 얼마 전에 고태용이라는, 조직의 중추적인 인물을 잃었다. 사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뒤처리로 업무량이 한계까지 밀려 올라온 상황이다.

물론 이 하얀 제복을 걸친 정치경찰실, 정확히 말하자면 ‘방첩국’ 직원들은 공식적으로는 감시가 아니라 ‘협력 업무’를 위해 여기 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겉모양은 겉모양이고, 실상은 의심과 감시, 배움을 빙자한 취조가 사령부 건물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당연히 오가는 시선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감찰국’이 아니라 ‘방첩국’이 와준 게 다행이지. 방첩국에는 형님이 데려간 사람들이 있지 않소.”

정보사령관 구종환 중장은 나제홍 예비역 중장, 현 정치경찰실 실장에게 그렇게 불평했다.

“군인이었던 사람들이니만큼 조금은 편의를 봐줄 테니까.”

그 말에 나제홍은 쓴웃음으로 대답했다.

사실 주견하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일에, 간판으로 나서게 된 입장이니만큼 마냥 저쪽의 편의를 봐주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물론 그렇다고 구종환 중장의 요청을 대놓고 거절할 수도 없다.

나제홍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안다.

주견하의 지금 행동이 제국정보사령부의 지나친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중재자 역할을 해줘야 한다.

그러면서도 정치경찰실의 실권자는 주견하이기에 ‘지나치게 나서서는’ 안 된다. 연금이 날아가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다.

나제홍 실장의 얼굴에서 그런 곤란함을 읽었는지, 구종환 중장은 짐짓 이해한다는 듯 말을 꺼냈다.

“민간인 관료의 길은 고달프잖소……? 그것도 정치인들 틈바구니에서.”

“나야 뭐 정치라고 할 것까지야 있나. 이것저것, 균형만 맞추면 돼. 균형만.”

“그 균형이 제일 어려운 것 아니오.”

“그거야 그렇지.”

잠깐 말이 끊긴다. 나제홍은 구종환이 기분 나빠할 만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 하지 않고, 구종환은 그 나름대로 궁금한 걸 물어볼지 말지 망설인다.

인내심이 다한 쪽은 구종환이었다.

“그래 그 ‘주 국장’이라는 사람은 뭔 생각이랍니까?”

0